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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3화 (13/250)

13화

밤새 그런 일이 있었으니 잠자기는 영 글렀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도하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핸드폰이 어디선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도하는 잠결에 비척비척 그리 넓지도 않은 방을 돌며 핸드폰을 찾다 지난밤에 핸드폰이 침대 아래로 들어가 버린 걸 간신히 기억해냈다. 침대를 통째로 들어 올렸더니 아래에 잔뜩 쌓여 있던 먼지들도 함께 떠올랐다.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며 화면을 보니, 유세오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됐어?”

-으와… 형,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설마 잤어요? 난 방금 전까지 특기 잔뜩 쓰느라고 힘 다 빼다 왔는데….

유세오가 징징거렸다.

-상태는 많이 안정됐어요. 저 말고도 스웨덴의 그 힐러랑 제이콥 휴스도 있더라고요. 왜 호주의 인간 재생기 있잖아요. 실물 처음 봤는데… 와 특기 진짜 대박. 개신기해요. 번호도 땄는데 아 씨, 영어를 못해 가지고 연락을 못 해보겠어요. 아무튼 그렇게 셋이나 붙으니까 금방 나아지긴 했어요. 근데 오르페노스 황제가 피통이 너무 커가지고 다 채우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진짜 졸라 부었는데도 간신히 3분의 1쯤 채운 느낌? 보스는 다르긴 다른가 봐요.

유세오가 떠들어댔다. 신이 난 목소리였다. 보스는 무슨 보스. 피통이니 뭐니 유세오가 오즈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알 만했다. 고딩이다, 고딩. 이도하가 인내심을 추스르며 스스로 되뇌었다.

“말 했어?”

-뭘요? 아.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던 유세오가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그거… 못 전했죠. 아직 일어나지는 못 했어요.

이도하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개복치. 종이 인간.

“너 또 안 가?”

-아마 당분간은요? 이리나가 마력을 많이 써가지고 좀 쉬어야 돼요. 다들 오르페노스 황제처럼 괴물이 아니에요, 형.

“괴물은 무슨 괴물.”

-괴물이죠! 피통 3분의 1이 이리나 피통보다도 훨씬 큰데요! 이리나가 형 소환하려고 했으면 소환진 반짝 하는 순간에 피통 끝났을 걸요. 으.

“소환을 하면 뭐하냐. 매번 기절인데….”

잔뜩 떠올랐던 먼지들을 한 데 모아서 둥글둥글 말아 쓰레기통으로 넣은 이도하가 침대를 내려놓았다. 위에 풀썩 누우니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탈력감이 쫙 쏟아졌다.

“네 계약주한테라도 전하지 그랬어.”

-형. 형이나 오르페노스 황제한테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황제예요…. 개수작 하지 말라는 말을 이리나가 어떻게 해요.

목소리가 울먹거리고 있었다. 설마 우나 했더니 웃겨 죽는 목소리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별것도 아닌 걸로 까르륵 웃어댄다.

-형, 혀엉. 근데 개수작이 뭐예요? 황제가 뭐래요? 진짜 세 번 봐도 하나도 안 질리게 잘 생겼던데.

“오밤중에 고생했는데 자라. 바쁘다.”

-아 거짓말! 뭐가 바빠요, 형 백수잖아요!

백수는 아니지만 백수처럼 지내고 있던 이도하는 발끈했다.

“누가 백수야.”

-진짜 어디 가요?

“어. 학교.”

-학교요?

학교요오? 하고 묻는 말끝이 잔뜩 올라간다. 그래 인마- 짧게 대충 대답한 이도하가 전화를 끊었다. 오디오를 가득 채우던 유세오의 목소리가 없어지니 몹시 조용했다. 창밖으로 참새만 짹짹 울었다. 넋을 놓고 누워있으니 상념이 몰려들었다.

유세오가 그 말을 전했어야 했는데. 좀 살 만해졌다고 또 소환하는 건 아니겠지. 언제쯤 멀쩡한 낯의 시오한을 볼 수 있을까. 황제, 그래. 황제가 그렇게 몸져누워 있는데 나라가 돌아가기는 할까. 옆에서 폐하- 하고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 언제 또 저를 부를까. 일주일쯤 쉬어야 하나. 넉넉잡아 한 달? 그건 너무 긴데.

오즈와의 시간 차이는 아직까지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 원리로, 다음 소환이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시오한은 멀쩡해지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아기 새처럼 주는 족족 받아먹던 걸 생각하면 또 어떤 참신한 개수작을 생각해 놓았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숟가락이 무겁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해대다니, 나무젓가락을 만들어 들려주며 대응해야 했다.

띵, 알람이 왔다.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던 이도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두둥실 핸드폰을 띄웠다. 윤윤형이 보낸 문자가 와 있었다.

-죽었냐?

띵, 띵, 연달아서 문자가 왔다. 아래에서 떠오른 알람이 위의 것을 밀어내며 죽죽 올라왔다.

-자퇴 하냐?

-너 그럼 고졸

-오늘도 안 오면 너 F. 고급회계 재수강해야 됨

학교. 그래, 학교 가야지. 멍하니 문자를 보던 이도하가 몸을 일으켰다. 남들 다 학교가고 출근할 때 혼자 집에서 뒹구는 쾌감도 하루 이틀이지. 내리 집에만 있자니 이제 슬슬 지루하고 심심했다. 자꾸 잡생각만 난다. 유세오에게는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대로 둘러댄 말이었는데 말하고 보니 그럴듯했다.

화장실에 가 세수를 하려던 이도하는 거울을 보고 멈칫했다. 오른쪽 눈 밑에 새겨진 계약명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들어 슬쩍 가려보았다. 얼굴에 문신을 한 꼴이라며 뒷목을 잡았던 게 새삼스러울 정도로 이제는 눈에 익었다. 새까맣고 반듯한 글자들이 없는 얼굴이 낯설 정도로. 하여간 인간이 간사하지. 헛웃음을 친 이도하가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

“아, 이건 아니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인마.”

“사기를 이렇게 치냐.”

“따지고 보면 사기꾼은 너지, 이도하야. 너 그때 분명 군말 않고 한다 그랬었다?”

“뭔지 얘기도 안 하고 다짜고짜 하라며?”

“뭔지 듣지도 않고 그냥 알겠다며? 한다며?”

“에이씨.”

짧은 실랑이 끝에 이도하는 결국 윤윤형의 손에서 머리띠를 탁 낚아챘다. 윤형이 그럴 줄 알았다며 뿌듯하게 웃었다. 대충 머리에 끼워 넣자 핸드폰을 들이댄다.

“아이고, 예쁘다 예뻐. 잘생겼다 이도하.”

이도하가 심드렁하게 코웃음을 쳤다. 머리띠에는 깜찍한 토끼 귀가 아주 큼지막하게 달려 있었다. 한쪽은 위로 쫑긋 서고, 나머지 한쪽은 반쯤 축 늘어져 있었다. 하얀 털은 아주 빵빵하고 보드라웠으며 띠 부분은 검은색으로 되어 있어 언뜻 보면 정말 귀가 솟은 것처럼 디테일했다. 이런 머리띠는 조그만 애들이나 여자애들이 해야 진짜 귀염뽀짝 할 물건 아닌가. 시커먼 남자한테 씌워봐야….

“변태 같잖아.”

“선배 뭘 모르시네요. 윤형 선배가 하면 변태 같지만 선배가 하면 귀염뽀짝.”

“변태라니…. 이주연 말이 너무 심하네.”

쥐 머리띠를 한 윤윤형이 시무룩한 척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주연은 연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그녀는 이도하의 과 후배였다. 주변에 우르르 몰려있는 후배들 전부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그런 머리띠를 하나씩 쓰고 있었다. 호랑이, 돼지, 여우, 개, 기린, 쥐, 통 저건 뭔지 알 수 없는 초록색 더듬이… 그 하고 많은 것 중에 왜 하필 저는 이 토끼인가.

“와 진짜 존잘. 요 며칠간 선배가 없어서 학교 다닐 맛이 안 났어요.”

“주연아. 좀 조용히 해.”

“왜요. 모름지기 잘생긴 건 찬양해 줘야 하는데.”

기분은 안 나쁜데 괴롭다. 이도하가 괴로운 얼굴을 하자 이주연이 그것마저 좋아 죽겠다며 까르륵 제 동기들과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귀여워요 선배! 이도하는 체념했다.

“선배는 여자친구 사귀지 마요, 알겠죠? 도하 선배 경영대 공공재니까 여자 친구 사귀면 안 됨. 사귀어도 몰래.”

“내가 왜.”

“선배 저번에 도장 찍었어요. 발뺌하기 없기.”

“기억 안나.”

주변이 아주 시끌벅적하고 바글바글했다. 떠들썩한 음악 소리가 광광 울리고 호객 소리가 가득했다. 학교는 축제 중이었다. 이도하는 집에 있기 심심하다는 아주 복에 겨운 소리를 하며 학교에 온 걸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초입부터 벌써 여기저기 걸린 현수막들과 음악소리로 축제 중인 건 눈치챘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간만에 인사나 하려고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인원이 많은 경영대는 이번 축제에 출석률 최고를 기록했다. 오지랖 넓은 성격으로 학생회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윤윤형 덕에 본의 아니게 여기저기에 얼굴을 내비쳤던 이도하가 아는 후배들은 전부 있었다. 모르는 후배들도 수줍게 인사를 해 왔다.

위로는 선배, 아래로는 후배, 넓게는 오가며 몇 번 마주쳤던 사람들까지 인사를 해대니 안 그래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이번 경영대 부스로 끌려 와 이따위 머리띠를 쓰게 된 것이었다. 이번 경영대의 부스는 두 개였다. 흔한 주점과, 안 흔한 체험부스.

한국대 남신과의 공중 산책.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도하는 좀 정신 나가고 몹시 쪽팔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커다란 현수막에는 어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금발머리 캐릭터가 여자 주인공과 함께 나란히 하늘을 걷는 장면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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