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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8화 (8/250)

8화

“그리고 뽀뽀 좀 하면 또 어떻담. 기적의 얼천이라는데 나 같으면 열두 번도 더 했다.”

“너 그렇게 얼굴 밝히다 큰일 난다.”

“꼰대 같은 소리 하지 마요. 예쁘고 잘생긴 게 최고야.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이도하씨 담당 안 했지.”

꼰대라는 소리에 이도하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뒤의 말은 조금 칭찬 같았으나 별로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남신이니 조각이니 떨어대는 주접을 보다보면 이런 말은 별로 믿지 못하게 된다. 좋기는커녕 또 수치스럽기만 했다. 이도하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뭘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네. 게이 될까봐 그래요?”

“야!”

이도하가 기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풀에 놀라 한껏 몸을 낮춘 그가 김윤혜를 노려보았다. 김윤혜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아니야.”

정말 아닌데, 근래에 들어 역사가 좀 생긴 탓에 그 말은 또 궁색해지고 말았다.

“나는….”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그는 그릇에 놓인 애먼 새우만 노려보았다.

“그냥 좀 마음 가는 대로 즐겨 봐요. 어차피 다른 세상이잖아요.”

“……”

“누구도 평생 머무를 수 없는 곳인데, 좀 마음대로 하면 어때요. 이도하씨는 특히나 더 오래 머무를 수 없고.”

“왜?”

이 질문에 김윤혜는 좀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진짜. 이제 좀 자각 좀 하고 살아요. 이도하씨는 인소더블이잖아요. 매개하는 마력이 크다는 건 그만큼 계약주의 마력이 많이 든다는 건데, 오르페노스 황제가 아무리 기적의 현신이니 뭐니 하는 난 사람이래도 한계가 있지.”

음. 이도하는 할 말이 없었다. 말마따나 그 자각 없이 나댔다가 계약주가 피를 토하게 했으니 이제는 정말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좀 억울하기도 했다. 그는 의욕이 투철한 편이 아닐 뿐 생전 어디에 가서 이렇게 허술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제가 느끼기에도 자꾸 바보 같은 짓만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 말은 없고, 마음은 억울하고, 이상하게 심통도 나면서 또 가슴 한 구석이 이상하고. 괴상한 기분에 이도하는 턱을 괴고서 괜히 한 입도 먹지 않은 볶음밥 속의 새우만 괴롭혔다. 제 인생이 이제 어디로 튈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근데, 그 대단하다는 제국에 제대로 된 의사는,”

“어? 우와!”

요란한 감탄사가 이도하의 말을 끊었다. 세상에 신기하고 희한하다는 일이라면 대체로 다 특기자와 계약자와 관련된 일이었고, 아이라는 그런 일을 연구하는 곳이다 보니 이곳에서는 영 들을 일이 없는 순진한 감탄사였다. 이도하가 고개를 돌려보니,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애였다.

몇 명의 무리와 함께 쟁반을 들고 있던 그 애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명백히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짧은 틈에 이도하가 벌써 냉면을 들이키고 있는 김윤혜에게 눈짓했다. 누구야? 그러나 김윤혜가 미처 냉면 그릇을 내려놓기도 전에 이 청소년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그는 쟁반을 그들의 식탁에 내려놓았다. 거침없는 행동에 이도하는 약간 눈썹을 들어 올리며 몸을 물렸다.

“이도하씨 맞죠? 인소더블?”

“……”

이도하는 특별히 낯을 가리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대뜸 다가와 잔뜩 친하고 반가운 척을 할 때 넉넉히 웃으며 장단을 맞춰줄 만큼 싹싹하지도 않았다. 잠깐 그를 바라본 이도하가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누구시죠.”

“아?”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는 것처럼 청소년은 당황했다. 이도하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질문이었는데, 설마 그렇게 되물을 줄은 몰랐다는 태도로 봐서는 딱히 자기소개를 할 필요가 없는 유명인인지도 몰랐다. 연예인인가, 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어디서도 본 기억이 없었다.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 죄송해요. 저 유세오라고 합니다.”

“……?”

자기소개를 했음에도 이도하가 영 모르는 눈치이자, 유세오는 좀 안절부절못하며 가엾게도 민망해하기 시작했다. 이도하가 보자마자 찐빵처럼 하얗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그, 특기잔데. 저도 계약자예요. 제 계약주도 이리스티리움 사람이라.”

“아.”

두서없이 늘어놓는 신상에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고만 있던 이도하의 머릿속에 불현듯 짧은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오한울, 유세오- 인소더블 만나보고 싶어’ 얜 뭐야.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유세오. 뻔질나게 포털 메인에 언급되는 걸 보면 아마 세간에 알려진 계약자들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활동하는 계약자 중 하나일 것이다. 광고에도 나오고, 영화에도 나오고, 드라마에도 나오고, 예능에도 나오고. 결국 연예인이라는 소리다. 미성년자인 줄은 몰랐다. 마침내 이도하가 저를 알아보는 눈치이자 유세오가 반색을 했다.

“저 완전 팬이에요! 진짜 만나보고 싶었는데. 아이라에도 잘 안 오시고 그렇다고 찾아갈 수도 없고, 이리스티리움에서도 볼 수 있을까 싶고, 인터뷰는 했는데 그래도 그건… 아, 오해하지 마세요. 그건 진짜 그냥 인터뷰였어요. 막 흑심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설마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말 진짜 많다. 정말 저세상 붙임성이었다.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며 이도하는 생각했다. 다다다다 쏟아지는 말 중에 어느 것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난감하게 붕붕 잡고 휘둘러대는 손만 가만히 두고 있으니 어느새 말끔히 입가를 닦고 립스틱도 새로 바른 김윤혜가 그를 도왔다.

“이도하씨는 원시인이나 다름없어서 아무것도 몰라, 세오야. 안녕하세요 선배. 안녕하세요, 차장님.”

“윤혜 누나, 원시인이 뭐예요.”

별 말도 아니었는데 빵 터져 까르륵 웃는다. 졸지에 원시인이 된 이도하는 어이가 없었다. 저 혼자 홀랑 날아온 유세오를 따라온 이들을 향해 인사한 김윤혜가 그를 가리켰다.

“여기 있네요, 의사.”

“뭐?”

“에트레제에 드나드는 한국인 계약자 중 한 명이에요. 특기가,”

“으아악 누나!”

유세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의 식탁을 반쯤 넘어간 유세오는 팔을 마구 휘저었다. 어떻게든 김윤혜의 입을 막아보려는 노력이었다. 손이 닿지도 않았으나, 김윤혜는 시큰둥한 낯으로 입을 다물긴 했다. 거의 가라앉았던 얼굴은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난데없는 행동이었으나 이도하는 십분 이해했다.

세상에는 정말 온갖 특기가 있었다. 발동 조건이 있는 경우도, 없는 경우도 있었고 같은 특기인 것 같아도 원리도, 과정도 전부 제멋대로였다. 편하게 염력, 투시, 이런 식으로 통할 수 있으면 편하겠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특기가 판별되는 순간 아이라에서 지어주는 이름이란 것이… 꽤 은유적이었다.

특기자들이 제 특기를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게 부끄러워 꺼릴 정도로. 딱히 비밀도 아닌데 특기가 알려지지 않은 대다수의 경우는 다 이 때문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특기라고 하면 또 다른 인소더블인 우르슬라의 ‘되돌아가는 태엽’일 텐데, 이건 정말 양호한 편이었다.

“의사는 아니고, 그, 제 특기가 치유 쪽이라서요.”

이도하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흘긋 김윤혜를 보자, 그녀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눈치로 부연 설명을 더해 주었다.

“이리스티리움의 궁성 이름이 에트레제예요.”

“앗, 형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유세오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말간 얼굴에는 악의라곤 없었다. 김윤혜야 그렇다 쳐도 유세오까지. 이쯤 되니 이도하도 제가 이 방면으로 무관심한 게 아니라 ‘무지’한 수준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해야겠다. 이도하는 반성했다.

어쨌든 김윤혜가 비유한 대로 로마 제국에서 단종의 핏줄로 태어난 이순신을 치료하기 위해 궁성으로 불려갔다면 특기가 아주 대단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솔직한 인상으로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으니 아주 의외였다. 그런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아니면 짧은 대화로 김윤혜가 원시인이라고 일컬은 이도하의 무지를 눈치챘는지 유세오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특기도 특기고, 이리나… 이리나는 제 계약준데 이리스티리움의 궁성기사단장이거든요. 그래서 원래도 에트레제를 드나들었어요. 그러다가 황제 폐하 딱 한 번 봤는데 와- 대박, 한 번 만 더 보여주면 안 되냐고 아무리 졸라도 이리나가 엄청 고지식해서, 진짜 바늘 틈도 안 들어가요. 매번 씨알도 안 먹혔는데 이번에 황제 폐하 가까이서 봤잖아요! 와 진짜 오지게!”

크흠- 누군가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잔뜩 흥분해서 열변을 토하던 유세오가 합, 입을 다물더니 슬쩍 눈치를 보았다. 여태 쟁반을 들고 기다리던 그의 일행 중 나이가 그나마 유세오와 비슷해 보이는 남자 하나가 눈짓했다. 유세오가 입술을 말아 물며 눈웃음 지었다. 남자가 푹 한숨을 쉬었다.

이도하는 확신했다. 유세오는 얼빠고, 전형적인 이 시대의 고딩이다. 그리고 그의 담당 팀으로 보이는 이들은 청소년의 올바른 우리말 사용을 선도하는 중이고. 계약주가 궁정기사단장이라고 하더니 폐하니 뭐니 하니 말투도 제 계약주와 비슷하게 패치된 모양이다. 뭐든 그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상관있는 건 그의 계약주인 시오한 오르페노스의 상태였다

“치료를 했는데 왜 그렇게 골골해?”

“그거 기력이 다 빠져서 그래요! 형이 진짜 마력 쪽쪽 다 빨아먹었던데요!”

유세오의 얼굴은 여전히 해맑았으나 말은 전혀 해맑지 않았다. 마력을 쪽쪽 빨아먹었다는 말에 이도하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큼큼- 유세오의 뒤에 있던 남자가 한번 더 헛기침 했다. 유세오가 흘끔 눈치를 보더니 말이 좀 셌다 싶었는지 순화했다. 그가 뺨을 긁적였다.

“어… 그러니까, 형을 소환하는데 마력이 너무 달아서 기본 체력도 회복이 잘 안 되고 있었어요. 그 정도면 시간이 해결해 주거나, 아니면 더 큰 마력을 부어줘야 하는데 오르페노스 황제는 형의 계약주잖아요. 형은 인소더블이고. 노답… 아니, 음. 특기로 어느 정도는 회복을 시켜놨는데 이리나의 마력이 달려서 그 이상은 힘들었어요.”

유세오는 얼른 말을 곱게 포장했지만 이도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건 노답이었다. 상황도, 통 감 잡을 수가 없는 이도하 저도.

모든 특기자들은 잠재적 계약자였다. 언제든 짝이 맞는다면 그들은 소환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고, 필수 이수 교육도 그래서 받는다. 해서 특기자라면 대개 한 번쯤은 계약에 대해, 혹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계약주가 될 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는데 맹세컨대 이도하는 단 한 번도 계약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서른세 번에 달하는 집요한 소환을 집요하게 거절한 이도하였다.

그러니 정작 계약은 해 놓고 소환주가 그를 소환할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이 상황이 달가워야 하는데 문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도하는 그냥 인정했다. 그는 한 번 더 제 소환주가 보고 싶었다. 기적의 현신이라는 얼굴에 죽빵을 날려 정갈한 옥수수를 우수수 털어버리고 싶어서든 뭐든 그냥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한 번 만 그가 절 부르는 걸 들어보고 싶었다.

[화이람.]

그래,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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