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CIA의 국장 버클리는 오늘도 전 세계의 정보를 탐색하고 있었다.
미국의 강함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정보전의 우위라는 것을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익혀 왔었다. 그래서 미국의 말을 안 듣는 나라에게 못된 짓도 많이 해 정부를 전복시켜 말 잘 듣는 미국의 개로 만든 것도 여러 차례!
요즘은 소련이 사라져서 예전처럼 화려하게 활약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CIA라고 하면 세계 최강의 정보 집단이다. 이스라엘의 모사드니 뭐니 해서 나름 잘 나간다는 놈들이 있긴 하지만 결국 CIA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서류를 살피는 버클리의 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뭐야?”
전화가 울릴 일이 없는데 울리자 버클리는 놀랐다.
그의 전화는 평범한 게 아니라서 긴급한 일이 아니면 아무도 연락하지 못한다. 그는 어디서 온 전환지 확인했다. 번호는 나오지 않았다. 미 정부의 인정을 받았으며 비밀을 지켜주기로 한 사람의 연락이란 말이었다.
그는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헉!”
들려온 목소리에 버클리는 깜짝 놀랐다.
“뭘 그렇게 놀라나요.”
“아, 아니, 설마 장갑맨의 동료가 연락해 올 줄이야.”
들어본 적이 있는 여자의 목소리는 바로 세나의 것이었다. 세나는 화들짝 놀랐던 버클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화난 목소리로 따지며 물었다.
“미국이 우리한테 얼마나 신세를 졌는데 환영하지는 못할망정 화들짝 놀라다니요. 뒤가 켕기는 짓을 하고 있던 거 아닙니까?”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아주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장갑맨은 역시 CIA의 최대 관심거리 중 하나니까. 하지만 적대 행위를 하거나 음모를 꾸민 것은 아니었다.
“못 믿겠는데.”
“어흠. 다소 켕기는 짓을 하는 건 모든 정보기관의 숙명이지.”
버클리는 대범하게 나섰다.
세나도 피식 웃어 그의 말을 받았다.
“그건 그렇다 치죠.”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한 건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죠.”
“그게 뭔데?”
“브라질에서 우리가 신나게 설친 건 아시죠?”
“그야 알지. 뭐, 덕분에 마약 문제 같은 것도 좀 나아졌네. 감사하고 있어.”
미국으로 마약이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루트가 남미다.
남미 중에서도 브라질과 멕시코가 핵심!
그중 한 곳의 마약상이 피박살이 났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 피박살이다. 그러니 미국으로 들어오는 마약 단속이 훨씬 쉬워지는 건 당연했다.
물론 마약도 결국에는 시장원리에 따른다. 브라질이 피 박살 났다고 해서 마약을 사려는 수요가 줄어들 리는 없으니 풀린 마약 값이 올라가고 향후 멕시코 쪽의 공급이 늘어나 예전 같은 꼴이 될 건 뻔하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마약 관련 업무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잘됐네요. 어쨌든, 그때 우리 측에서 다소 위험한 꼴을 당했습니다. 내부 정보가 새나가서 말이죠.”
“그랬나?”
흥미로운 정보였다. 자연히 목소리가 흥분됐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세나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쓸데없이 탐색하면 미국과 원수지는 수가 있어요.”
“자, 자제하지.”
세나의 목소리가 너무 공포스러워서 버클리는 조사해 보려던 생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장갑맨은 적으로 만들어선 안 되는 존재다.
“그래서 겨우 막아내고 주모자들을 잡아들여 작살을 냈는데 그 정보의 출처가 중국이라고 했거든요.”
“중국이라.”
중국.
소련의 뒤를 이어 미국을 위협하는 슈퍼파워.
뭐, 여러 가지 의미에서 소련과는 달리 그렇게 큰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상대는 물론 아니다. 소련은 아예 체제가 달랐지만, 중국이야 결국 둘 다 자본주의국가니까.
하지만 어쨌든 중국에 대한 정보는 현재 CIA의 최우선 임무다.
“네. 어떤 세력이 있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지. 삼합회네.”
그랬기에 쉽게 거론할 수 있었다.
“삼합회라. 확실히 자주 들어본 이름이긴 합니다.”
세나는 익숙하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삼합회.
인터넷에 검색하기만 해도 알 수 있는 단체다.
“그들은 정말 거대해. 야쿠자나 마피아 따위완 비교도 못 할 지경이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외국을 상대로 자기들끼리는 똘똘 뭉쳤거든. 화교로서 밖으로 나가 활동할 일이 많았으니까. 마피아나 야쿠자가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에 비하면 대단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지.”
“그렇군요.”
“구성원만 수백만에 달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네. 그들의 적이 된다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할 정도지.”
“과연 중국답군요.”
폭력조직의 단원 수가 수백만이란 이야기에 세나는 혀를 내둘렀다. 국가조차 천만 명도 안 되는 인구로 구성되는 곳이 허다한데 일개 폭력조직의 머릿수가 수백만이라니.
“그래. 머릿수가 어마어마해. 대만과 중국 본토 양측에서 영향력도 강하게 발휘하고 있고, 중국의 폭력단체라고 하면 그들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네. 장갑맨이 얼마나 잔혹한지 알고도 건드릴 자신감을 가진 세력을 따져보면 더욱 그렇지.”
“그렇군요.”
장갑맨을 보호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어쩌면 장갑맨의 그 강한 힘이 아니다.
공포다.
바로 적에게는 인정사정없다는 점! 죽음을 각오한 자라도 장갑맨에겐 공포에 떨 수밖에 없다. 자기만 죽어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갑맨의 특기는 고통을 주는 것. 죽을 각오를 한다고 해서 공포가 덜해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에 대한 공격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삼합회에 속하면 아니다. 그들은 막대한 규모의 조직이 장갑맨에게서도 자기들을 숨겨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물건을 숨기려면 시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물론 그건 장갑맨이 사람 찾는 데 어떤 힘을 사용하는지를 몰라서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장갑맨의 힘을 모르는 이상 그러면 안전할 거라 착각하는 것도 별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들의 기원에도 관계되는 거네.”
“기원이요?”
“비밀단체에서 시작됐거든.”
“결사인가요?”
“그래. 반청복명이라고 청나라를 쓰러뜨리기 위한 결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거야. 지금은 유명무실해졌지만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한족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
중국은 한족에 의한 통일국가로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민족에 의해 많이 당해왔던 나라다. 우선 금나라가 있다. 요나라도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원나라도 있다. 또 당나라도 따지고 보면 이민족 국가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그리고 왕조 중국의 마지막을 장식한 국가는 청나라, 만주족의 국가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한족의 국가로서 중국은 의외로 그리 길지가 않다. 한족들이 이런 상황에 분노하고 바꾸고 싶어 했으리란 건 뻔하다. 특히 강했던 것이 원나라와 청나라 둘 정도다. 그중에서도 청나라는 반청복명이라고 해서 아주 본격적인 결사가 형성되어 싸웠다.
하지만 청은 아편전쟁으로 인해 서구 열강에게 피박살이 났고 신해혁명까지, 아니 국공합작을 넘어 대장정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정체하고 만다.
“흥미롭군요. 자세한 정보를 전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삼합회에 대한 정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전란이 계속되는 와중 삼합회가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해외로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 무수한 화교들 가운데 삼합회 출신은 정말 많다.
이것은 화교의 그 막대한 재력과 권력 네트워크를 삼합회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대에 와서 그들을 더욱 무서운 존재로 만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 가지 더 부탁할 텐데 그것도 좀 들어주셨으면 하는군요.”
“무슨 부탁을 하려고……. 불길하게.”
“CIA라면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미국 입장으로서도 화교가 그런 집단이면 다소 골려주는 게 앞으로 편해지지 않겠어요?”
세나 말이 옳기도 해서 버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네. 그러면 시간을 들여 좀 더 상세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그렇게 하죠.”
세나는 전화를 끊었다.
버클리는 이후 머리를 벅벅 긁으며 오늘도 철야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
강민단원들은 기지에 모여 있었다.
그들 가운데 재철 일당은 세나와 한자리에 모여 끙끙대고 있었다. 세나가 그들을 한심하단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재철 일당은 서로 간의 실력을 테스트했다.
“밥 먹었냐 해봐. 밥 먹었냐.”
“그러니까…… 니시팔노마?”
수구가 만수의 말에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이게 어디서 쌍팔년도 개그를! 니츠판르마!”
“니, 니츠판르마.”
“그래.”
세나가 듣고 그게 옳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한 문장을 발음하고 나서 만수가 지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 되게 어렵다. 성조가 개 빡세.”
“그래. 중국어 최대의 난관이지. 한자만이라면 어떻게 할 텐데 말이야.”
수구도 같은 뜻이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중국어의 성조는 네 가지가 있다. 성조란 말의 높낮이를 말하는 건데 같은 말이라도 이 높낮이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한국어는 사실 성조가 없다. 성조가 아예 없던 건 아닌데, 장음과 단음이라고 하고 있던 건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사실 성조가 없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온갖 말을 구분하는 데 성조가 쓰이는 중국어는 한국인에게 발음이 대단히 어려운 언어다.
영어만큼이나!
“그래도 대충 일상생활은 될 거 같지 않아?”
재철이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배운 중국어로 주정주정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워뜨밍쯔스재철.(내 이름은 재철)”
수구가 이어서 말했다.
“워먼스꾸완꽝커.(우리는 관광객)”
만수가 이어서 말했다.
“워샹츠판.(우리는 밥 먹고 싶다.)”
세나가 그들이 중국어로 떠드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겨우 굶어 죽진 않겠네.”
물론 세나는 지금 중국어가 완벽하다.
한 가지 언어를 익히는 데 불과 2개월. 어처구니없는 속도였지만 눈앞에서 직접 배워 익히는 걸 본 이상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런 중국어를 하고 돌아다니면 정신병자같이 보일 거 같아 걱정인데.”
완벽한 중국어를 하는 세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재철 일당의 중국어는 발음이 너무 어설프다. 하지만 강민은 걱정 없다는 입장이었다.
“뭐 어때. 관광객인 거 다들 알아볼 텐데.”
“그럼 문제없으려나.”
“그래도 중국어를 잘할수록 편할 테니. 가능한 한 확실히 익혀둬.”
강민은 재철 일당을 향해 말했다.
“응.”
“브라질에서 말을 몰라 제대로 못 논 아쉬움도 있으니까.”
수구와 만수도 외국어 공부 제대로 할 겸, 또 이왕 해외여행을 가는 김에 즐겁게 지내볼 겸 나름대로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만수는 달랐다.
“후후후후.”
열심히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별로 상관없다는 태도.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인지 알기 때문에 수구와 만수는 매우 화가 났다.
“아 짜증나!”
“중국에서 부디 천사처럼 예쁜 꾸냥을 만나 한국에 데려와야 할 텐데!”
“그래! 그래야 저 꼴을 안 보지!”
꾸냥은 아가씨를 뜻한다.
재철은 둘을 보면서 비웃었다.
“쯧쯧. 지젤 같은 미인은 전생에 지구를 구해야 얻을 수 있는 거야. 전생에 소나 돼지였을 너희는 절대 무리라고!”
“저 더러운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그러게!”
수구와 만수는 버럭버럭 화냈다.
강석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면서 간단히 말했다.
“그야 뭐…… 이미 승리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 아닐까.”
틀림없이 그렇다. 재철은 이미 지젤이라는 만인의 우러름을 받을만한 애인이 있다.
“으으, 확 찢어지라고 저주를 할 수도 없고.”
“아, 저걸 진짜…….”
수구와 만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재철에게는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즐거운 일에 불과했다. 승리했다는 확신을 더욱 즐기게 해 주니까.
“우하하하하!”
중국어 공부에 열중 중인 강민단의 기지에서 재철의 웃음소리가 드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