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사무실 밖으로 나온 뒤 재철은 지젤과 함께 근처의 카페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자리를 잡자 마자 분이 안 풀려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크으...”
“저기, 어떻게?”
지젤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재철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에반젤이 연락해 주더군요. 그 덕분입니다.”
“에반젤이...”
지젤이 놀랐다.
“누나가 감독과 있다고 위험해 보인다고 연락하더군요.”
재철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정말 이런 일이 있더군요.”
“소문이 안 좋은 사람이었나 보군요.”
지젤이 울적한 얼굴로 작게 말했다.
에반젤이 함께 있는 걸 보자마자 연락했을 정도면 정말 안 좋은 소문이 많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생각 없이 권유에 응하고 말다니.
“그러니까 보자마자 나한테 연락을 했겠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었으면...”
지젤은 경황중에 하지 못했던 인사를 했다.
“아니요. 뭐 이런거야...”
어흠.
재철은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휴우...”
“그런데 얼굴이 밝지 않군요.”
지젤이 한숨을 쉬는 걸 보고 물었다.
방금 강간당한 위기에 처했던 여자가 한숨을 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 지젤의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였다.
“동생이 걱정이라서...”
“다른 팀으로 옮기면 되지 않습니까?”
“네... 그러면 되겠죠.”
씁쓸하게 웃으며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철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에반젤이 가게로 들어왔다. 재철이 휴대폰으로 연락한 것이다.
“누나!”
“에반젤!”
억지로 웃으며 지젤이 동생을 맞이했다.
누나를 보자마자 에반젤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안부를 물었다.
“무사해? 그놈한테 더러운 짓 당하지 않았어?”
“응. 여기 재철 씨가 구해준 덕분에...”
“정말 고마워. 이건 나중에 열배로 갚을게.”
고개를 숙이고 에반젤은 재철에게 인사했다. 건방진 녀석인데 누나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갸륵하다 싶어 재철은 기분 좋게 웃었다.
“됐고, 일단 오늘은 여기서 식사라도 하자.”
“그래.”
그리고 세 사람은 함께 가벼운 식사를 주문했다.
***
긴급한 일이 있어서인지 다들 식사는 늦었다.
하지만 꾸역꾸역 어떻게 식사를 한 다음 커피를 시켜 차분하게 대화할 시간을 만들었다. 지젤은 막 샌드위치를 다 먹은 에반젤에게 물었다.
“클럽은 괜찮겠니?”
“어쩔 수 없지 뭐. 감독 자식 그렇지 않아도 더러운 소문이 많았어. 돈을 받고 실력도 없는 녀석을 주전으로 세운다던가, 또 여자관계가 더럽다던가 같은 거로 말야. 그런데 누나한테 손대려고 했으니 이제 있으라고 부탁해도 내가 떠나야지.”
“그래. 그게 당연하지.”
분노해서 에반젤이 하는 말에 재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한데 이야기하다 보니 기이한 점이 있어서 지적해 봤다.
“그런데 경찰은?”
어엿한 강간미수다.
당연히 경찰에게 신고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지젤도 에반젤도 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을 전혀 꺼내지 않았다.
에반젤이 분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소용없어. 그 새끼 그 구역 경찰과 친해서. 그리고 또...”
“여기도 그런 모양이군.”
울적하게 에반젤이 지젤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재철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여자가 강간을 당하면 강간당한 여자를 나쁘게 보던 풍습이 있다.
남자를 꼬시는 차림을 하고 다니니까 강간을 당한거라는 둥, 사실은 꽃뱀이라는 둥 하는 모욕적인 말이다.
브라질 역시 사정이 크게 틀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
지젤이 걱정스레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걱정되는 것은 에반젤이 축구 선수로서 대성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인 모양이다.
에반젤은 자신 있게 웃었다.
“나는 실력이 있으니까 어떤 팀이든 갈 수 있어. 걱정하지 마!”
“남자답군.”
“그래. 에반젤은 잘하니까.”
재철과 지젤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고 해야 옳은 말이겠지만 말이다.
에반젤은 곧 자리를 떠났다.
“아, 나 잠시만 화장실 좀.”
둘만 남았다.
잠시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재철은 지젤의 표정을 살피다가 물었다.
“표정이 별로시군요.”
“그게...”
지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상황이 좋지 않나요?”
“저, 이 이후에 따로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지젤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재철에게 부탁했다.
“물론이죠.”
애절한 표정의 미인이 하는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남자로서 불가능하다. 남자는 그렇게 만들어진 생물인 것이다!
*
에반젤과 헤어진 뒤 두 사람은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가게에서 지젤은 구아나에게 들었던 말을 재철에게 들려줬다.
“...그런 형편입니다.”
“곤란하게 됐군요.”
재철의 표정도 이야기를 다 들은 다음 심각해 졌다.
“네. 어떻게 하면 좋을지...”
“흠...”
지젤에게 이야기 들은 대로라면 에반젤의 선수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믿을 거라곤 축구에 대한 재능뿐인 에반젤이 환경의 벽을 뛰어넘기는 극히 힘들다.
재철이 얼굴을 찌푸린 것을 보고 지젤은 애걸하듯이 부탁했다.
“저, 혹시 괜찮으시면 에반젤을 도와주시지 않겠나요?”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재철은 물었다.
에반젤을 돕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재철은 브라질 사람이 아니다. 축구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다. 돕고 싶어도 방법을 모른다.
지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창피한 말이지만... 지금 저희가 겪는 문제는 돈이 부족한 겁니다. 반드시 갚을 테니 에반젤이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부탁드릴 수 없을까요?”
지젤은 자신의 말에 다급하게 이어서 외쳤다.
“물론 그냥 도와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바라시는 게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특히 지젤은 ‘뭐든지’라는 말을 강조했다.
“뭐든지요?”
“네. 뭐든지...”
재철이 당황해서 물으니까 지젤은 얼굴을 붉히고서는 고개를 푹 떨궜다.
그 답이 뭘 뜻하는지는 뻔하다.
몸이라도 내놓겠다는 것이다. 재철은 당황해서 손을 휘둘렀다.
“그, 그런 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지젤은 미안하게 말했다.
지금 형편에서 큰 신세를 지면서 재철에게 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지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재철이 그걸 거절하고 에반젤을 돕지 않는 경우다.
그렇게 되면 지젤은 구아나에게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돼선 저도 그 감독이라는 작자하고 별 차이가 없는 셈이 되어버리잖아요?”
재철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뭘, 똑같죠.”
지젤은 한 번 더 수줍어진 모습으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 저기... 재철 씨가 마음에 들어서.”
“네?”
재철은 당황해서 물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젤은 이어서 충격적인 질문을 했다.
“혹시 사귀는 분이 있나요?”
“아, 아니요.”
있어도 없다고 해야 할 판이다.
지젤은 기뻐했다.
“아 다행이다!”
“네, 다, 다행입니다.”
재철은 지젤의 웃는 모습이 너무 이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니 두 사람은 사이의 분위기가 멋쩍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지젤이 재철의 옆으로 왔다.
몸을 기대오는 지젤을 재철은 자연스럽게 안으면서 키스를 했다.
“음.”“으음...”
둘은 서로의 혀를 섞으며 깊은 키스를 했다.
긴 키스였다.
입이 떨어졌을 때, 지젤은 얼굴을 붉히고 재철에게 제안했다.
“저희 집으로 가실래요?”
“그, 그렇게 하죠.”
재철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행복한 밤을 보냈다.
***
호텔로 돌아온 재철은 한층 증세가 심해졌다.
“헤헤헤.”
정신 나간 것처럼 실실거렸다.
“히히.”
계속 실실거렸다.
수구가 말했다.
“이놈이 미쳤나.”
“미쳤다기보단 일이 잘 풀린 거 아닐까?”
만수가 불길하단 표정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으으 배 아프다!”
그럴수도 있다 싶어서 수구는 경악하며 쓰라린 얼굴을 했다.
다 같이 모태 솔로나 다름없는 입장에서 재철만 끝내주는 애인을 얻다니!
너무도 억울한 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동정 딱지는 다 비슷하게 땠다는 거지만 그런건 진짜 멋진 애인이 있다는 것의 우월함에는 이길 수가 없다!
그때 그들의 방문을 열고 강민이 방문했다.
“오늘도 bope에게서 다음 작전 계획서를 입수했다. 내일 습격하러 갈 거니까 준비해.”
“아, 강민!”
업무 이야기를 하면서 들어온 강민을 가장 반가워한 것은 특이하게도 재철이었다. 강민은 짜증 난단 얼굴로 그를 피했다.
“헉, 남자놈이 친한 척 달라붙지 마!”
“나도 남자랑 붙는 취미 따윈 없어! 어여쁜 애인이 있다고!”
재철은 항변했다.
“애인이 있다고!”
“벌써 그런 수준까지!”
수구와 만수는 한방씩 얻어맞은 표정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의 비명소리는 재철의 승리감을 채워주는 음악에 지나지 않는다.
“후하하하하!”
재철은 더 부러워하라는 듯이 즐겁게 웃었다.
“제기랄!”
“추월당하다니!”
“그것도 남미 미인!”
“열등감 느껴진다!”
수구와 만수는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지젤이 얼마나 대단한 미인인지 이미 알고 있는 탓이 더욱 컸다.
그때 강민의 뒤를 이어서 세나와 에이리가 들어왔다. 수구와 만수는 에이리에게 달려가서 구걸하듯이 외쳤다.
“저, 저기 어떻게 좀 빨리 안 되겠습니까?”
“네. 부탁드립니다!”
그들의 부탁이 바로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는 것인 걸 아는 에이리는 곤혹스런 표정이 됐다.
“그건 좀...”
“그래. 돌아가면 붙잡혀서 절대 지구로 못 올거야.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세나가 에이리의 심경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으으...”
“아아...”
수구와 만수는 절망적인 표정이 됐다.
한번 가서 잡히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데 억지로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재철이 웃으면서 말했다.
“급하면 뭐 자력갱생하는 수밖에 없지 않냐.”
“나쁜놈! 자기는 이제 상관없다고!”
“그래! 친구의 슬픔을 위로는 못 할망정.”
수구와 만수가 이를 갈며 그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들의 욕설과 분노는 재철의 즐거움과 승리감을 고취 시킬 뿐!
“뭐라 떠들어도 상관없어! 이제 내가 승리자다!”
“그런데 승리자인건 좋은데 나를 급히 찾은 이유는 뭐야.”
강민이 웃기는 소란을 서둘러 말리며 물었다.
재철은 정신을 차린 듯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아, 돈이 급하거든. 저금해 둔 것 좀 찾자.”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수구와 만수가 진정으로 기뻐했다.
“아싸!”
“꽃뱀이구나!”
지젤이 꽃뱀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지. 나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럼 저 녀석 좋다고 달라 붙어올 여자가 흔할 리가 있나!”
둘은 안도감에 가득한 대화를 나누었다.
재철은 욱하는 표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