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어머...”
지젤은 재철의 말에 기뻐하는 기색을 보였고 에반젤은 신경질을 냈다.
“뭐야 동양놈이 우리 누나한테 눈독 들이려 하다니!”
“꼬맹이 이런 건 눈독이 아니라 사교 인사라고 하는 거다!”
“그게 그거지!”
재철은 에반젤의 말을 무시하고 지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영어를 잘하시네요?”
지젤은 꽤 능숙한 영어를 사용했다.
덕분에 재철과도 대화가 가능한 것!
재철이 썩어도 준치라고 서울대학생인 만큼 어느 정도 간단한 영어로 대화하는 건 가능했다. 지젤은 답했다.
“리오는 관광도시니까 영어를 쓸 일이 많거든요. 제 동생을 돕기도 해야 하고.”
“과연.”
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어는 국제 공영어니 관광도시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필요한 언어다. 그리고 에반젤이 유망한 선수가 되어 해외로 나간다면 더욱 필요하다.
그런면에서 누나인 지젤이 영어를 익혀두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지젤이 말했다.
“이렇게 신세를 졌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고...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흠, 그러면 신세를 지도록 하죠.”
재철도 이걸 거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들였다.
“네.”
세 사람은 병원을 빠져나갔다.
***
세 사람은 텍시를 타고 이동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올라가 도착한 곳은 매우 낡은 한 건물 앞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다음 그 집을 보면서 재철이 말했다.
“여기군요.”
“네. 파벨라죠.”
지젤은 창피한 듯이 말했다.
“다들 여기 산다고!”
에반젤도 창피했지만, 허세를 부리듯이 외쳤다.
재철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좁았다. 하지만 더럽진 않았다. 지젤이 부지런히 청소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간살이라 할 것은 별로 없었고 TV도 구식이었다. 지젤은 얼른 에반젤에게 돈을 주며 말했다.
“에반젤, 가서 여기 이것들 좀 사 와. 남는 건 가지고.”
“응.”
에반젤은 집 밖으로 나갔다.
이제 집안에는 지젤과 재철만 남았다. 지젤은 허둥대며 재철에게 권했다.
“어디든 편히 앉으세요.”
“여긴 폭력배들이 괴롭히고 하는 것 없습니까?”
재철은 근처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파벨라는 브라질 행정력이 닿지 않는 곳이 많다. 그 지역의 지배자는 마피아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있죠. 여길 관리하는 건 타이거에서 관리하고 있어요.”
“고생이 많겠군요.”
의외로 지젤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건 아니예요. 정부에서 저희는 신경을 안 써주기 때문에 그런 마피아들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가요?”
지젤이 놀라워하는 재철에게 설명했다.
“마피아들이 나쁘다는건 알아도 가진게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들 편을 들게 되는 거죠. 제 동생을 치료해 주셨는데 치료비가 많이 나왔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저흰 병원에 갈 수 없으니까 대신 마피아들이 배급하는 약 같은 걸 받아서 견디는 경우가 많아요. 좋은 약들은 아니지만 병원에 가는 것 보단 훨씬 나으니까요.”
“그런...”
재철은 혀를 찼다.
병원비가 비싸서 병원에 가지 못하고, 그래서 마피아에게 약을 받아 그걸로 견디면서 마피아 덕을 봤다고 그들의 지배를 받아들인다니.
어처구니없는 비극이었다.
지젤은 슬프게 말했다.
“그래서 여기 아이들은 모두 마피아의 일원이 되는 것을 꿈꾸죠.”
“마피아가...”
“그 아이들 입장에선 영웅이니까요. 사실 그게 여기 있는 아이들의 가장 큰 문제기도 하죠.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못하고 마피아가 되길 원하게 되니까.”
재철의 얼굴이 한층 찌푸려졌다.
그렇지만 지젤 말대로라면 여기 아이들이 마피아가 되길 원하게 되는 것도 너무 당연하다. 실제로는 어쨌든, 그들에게 보이는 건 정의의 편인데다 돈도 많다. 마피아가 되고 싶은게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면 에반젤은 굉장히 운이 좋군요.”
“네. 다행히 축구를 좋아하니까요.”
지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말했다.
“잘 됐으면 좋겠군요.”
축구를 좋아하고, 축구로 성공하는 한 범죄자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젤은 웃으면서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힘껏 도울 생각이에요. 하지만 브라질에서 축구는 큰 산업이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잘해나갈 수 있을지...”
“잘 해나갈 겁니다. 굉장히 실력이 뛰어나던걸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지젤은 웃으며 말했지만 약간 자신이 없다는 인상이었다.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브라질에는 뛰어난 선수가 너무 많으니까.
에반젤이 뛰어난 선수가 될 재목이라고 해도 지금 브라질의 입장에서는 흔한 선수다. 그런데 경쟁을 뚫고 성공한 선수가 될 수 있을까.
걱정하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선 재철이 아무 말이 없는 와중 지젤은 몇 번이고 재철을 바라봤다. 이어서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저기.”
“네?”
재철이 대답했다.
지젤은 뭔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기보다 먼저 문이 열렸다.
“누나, 사왔어!”
“그, 그래.”
지젤은 허둥대면서 에반젤에게 갔다. 재철은 못들은 지젤의 말이 아쉬웠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
재철 일당의 방.
“으응?”
“후응?”
수구와 만수가 표정을 찌푸리고 같은 곳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강민이 들어왔다. 그는 수구와 만수가 기괴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궁금함을 느끼고 물었다.
“왜 그래?”
“저기.”
“이상하잖아.”
수구와 만수가 동시에 같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민이 보니 거기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재철! 한데 몽롱한 표정으로 창밖을 계속 바라보는 게 정상적인 상태가 결코 아니었다.
“확실히 이상한데.”
그때 언제 온 지 세나가 얼굴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저건 사랑에 빠진 거야!”
“사랑? 누구랑?”
“그건 모르지.”
세나에 이어 에이리가 방에 들어오며 말했다.
“나도 세나 말에 동의해. 저건 사랑에 빠진 모습이야.”
“그런가.”
강민은 두 여자가 같은 의견이라면 아마 맞으리라 생각했다. 그 말에 크게 반응을 보인 것은 수구와 만수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래. 여긴 한국도 아닌데!”
거의 분노한 것 같은 기색!
삼인방 가운데 가장 먼저 솔로를 빠져나가려 한다는데 조급함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어디서든 사랑에 빠질 수는 있지.”
“꽃뱀에게 물렸을 수도 있고.”
세나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럼 큰일인데.”
강민은 장난으로 넘길 말이 아니라는데 다소 심각한 얼굴이 됐다.
“하지만 그게 가장 그럴 듯한데.”
“내 생각도 그런 것 같다는게 문제군.”
세나와 에이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세 사람의 걱정스러운 표정과 달리 수구와 만수는 도리어 안도하는 표정이 됐다. 끓어오르는 질투심은 우정보다 강한 것이다.
세나가 먼저 제안했다.
“일단 상황을 알아보는게 어때?”
“그래야겠어. 그래서 혹시 제대로 된 사랑이라면 응원해 주는 것도 좋겠고.”
에이리가 말했다. 그러자 강민이 흥미가 동한 듯 작게 수군댔다.
“그러려면 미행을 해야지!”
“그래!”
수구와 만수도 동의!
에이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냥 본인에게 직접 묻는 게 어때?”
“재미없잖아!”
“그래. 재미없으니까 안 돼!”
이건 세나와 강민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일리는 있어.”
에이리도 피식 웃고는 그 의견에 찬동했다.
기본적으로 남의 일이니 재밌게 즐길 수 있으면 그게 좋다는데 강민일당의 생각은 일치해 있던 것이다.
“그렇지.”
“기대되는데.”
강민과 세나도 기대된다는 얼굴로 미행 계획을 몰래 짜기 시작했다.
***
다음날 오후.
강민의 방에는 강민 일당과 수구, 만수가 함께 있었다.
오늘은 새벽에 bope와의 협동 작전이 있었다. 그걸 끝내고 나서 글로브 아미가 먼저 떠났고, 그다음 강민 일당이 악당들을 손봐준 뒤 떠났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뒤 호텔에 모인 것이다.
재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행 결과는 어때?”
이들이 지금 모인 이유는 바로 수구와 만수에게 보고를 듣기 위해서였다.
다름 아닌 재철 미행 보고를!
“오늘 일을 끝마친 다음 옷을 갈아입고 부리나케 리오의 외곽 쪽으로 가더라고. 거기 축구 클럽이 시합했어. 그걸 응원하더군.”
미행을 간 것은 수구였다.
수구는 세나의 마법으로 완벽하게 기척을 숨기고 재철을 따라갔기 때문에 재철은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아주 간단한 미행이었다.
강민이 그 이야기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됐다.
“그냥 축구 보러 간 거야?”
“저 녀석이 그렇게 축구를 좋아했나.”
“그런 이야긴 들은 적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도 의견은 대동소이.
“그러게 말야. 그냥 뭐 나름처럼 국가전이 있을 때만 좀 관심을 가진 거지.”
만수의 말은 재철이 평균적인 한국인 정도로만 축구를 좋아했다는 말이다.
에이리가 문득 물었다.
“그럼 한일전에 열광했겠네?”
“그야 뭐!”
“한국인 기본 특성 같은 거니.”
수구와 만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 다음 수구가 이야기를 이었다.
“자자, 이야길 계속 들어봐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니까.”
“호오! 역시 더 있는 모양이군.”
“하긴, 그게 당연하지.”
세나도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수구의 말을 기다렸다.
“게임이 끝나니 거기서 웬 꼬맹이가 나오는 거야. 그리고 둘이서 친하게 어디로 가던데.”
“오오.”
“뭔가 있을 듯한 분위기!”
“흥미진진한데.”
다들 수구가 하는 말에 몰입했다.
듣는 이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이해하겠다는 듯, 수구는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서 그만둘 순 없잖아? 그래서 좀더 추적을 했지. 그러니까 거기서 광경을 봤지!”
“뭔데?”
“뜸 들이지 말고 얼른!”
수구는 재촉에 득의양양한 표정이 되어서는 말했다.
“어떤 브라질 미인이 기다리고 있더라니까! 그리고 셋이서 사이좋게 떠났지.”
모두 경악했다.
“브라질 미인!”
“으음 이건 심상치 않던데.”
브라질 미인과 사이좋게!
확실히 대단한 장면이다.
“꽃뱀 아니야?”
만수가 의문스레 물었다.
수구는 고개를 저었다.
“꽃뱀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어. 친해 보였고, 또 꽃뱀이 장사에 방해되게 남자애를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꽃뱀은 남자를 홀려야 한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홀리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다름아닌 아이다. 그런 혹을 데리고 있다면 역시 꽃뱀일 가능성은 적다.
세나가 말했다.
“이러지 말고 그냥 당사자에게 사정을 물어 보는게 어때?”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에이리도 동의했다.
“그럴까.”
강민은 아직도 멍하니 있는 재철을 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