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글로브 아미의 일은 고달프다!
삭신이 쑤시는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재철은 곧 밖으로 나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말이 잘 통하지는 않지만, 관광도시인 만큼 영어로 어지간한 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풍물 구경 정도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재철은 한 골목을 접어서 넓은 운동장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 운동장에서는 유니폼을 입은 수십명의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호오, 축구를 하고 있네.”
재철은 가로수 그늘 아래 서서 게임을 잠시 지켜봤다. 그는 곧 감탄해 중얼거렸다.
“역시 브라질이네. 아직 애들인데 아주 공이랑 붙어 있는 것 같은데.”
경기장에 있는 아이들은 높게 잡아도 나이가 15살 정도에 불과해 보였는데 공을 다루는 솜씨만 보자면 K리그에 나오는 선수들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세계 최강의 축구 국가 브라질다운 위용이라 싶었다.
게임은 이미 종반이었기 때문에 곧 끝났다. 재철은 아이들이 흩어지는 걸 보고 자기도 떠나려 했다.
“응?”
한데 떠나려던 아이들 중 하나가 다른 아이들의 공격에 갑자기 잔디 위로 넘어져 구타를 당했다.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야야! 거기!”
재철을 크게 외치며 구타현장으로 갔다.
“어린애 하나한테 여러놈이 붙어서 뭐 하는 짓이야.”
“퍽큐!”
“겟아웃!”
두들겨 패던 아이들은 재철이 말리는 데 한껏 성내며 영어로 그들이 아는 욕을 했다. 재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허, 이것들 보게.”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한층 한심했다.
그래서 용서 없이 주먹이 날아갔다.
퍽!
퍽퍽!
“아악!”
“으앙!”
아이들이 어른인 재철에게 욕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브라질의 험악한 환경 탓도 있겠지만 운동을 해서 몸이 튼튼하다는 자신감도 있었을게 틀림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자신감 따위는 가소롭다는 듯, 재철은 한방에 하나씩 울며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아주 세게 때린 것도 아니었건만 그랬다. 하긴 맨주먹으로 마약상들을 때려잡는 재철의 주먹은 어린애들이 견뎌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후.”
도망치는 아이들을 보며 혀를 차고서 재철은 얻어맞던 아이한테 갔다. 그 아이는 쓰러진 채 아직 끙끙거리고 있었다.
“으으...”
“괜찮냐.”
“치워!”
영어로 성난 거절이 돌아왔다.
재철은 반가운 표정이 됐다.
“아, 영어하냐?”
“옐로우 몽키의 도움 따윈 필요 없어!”
“도와줬더니 까칠하게 구는 애들은 만화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실제로도 있구나. 참신한데. 어쨌든 이 꼬맹이가...”
재철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고 양손으로 아이의 관자놀이를 쥐고 세게 비틀었다.
“아야야야야야!”
아이는 비명을 내질렀다.
눈물이 송글!
그 소년은 애들한테 얻어맞던 것보다 이게 더 아프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재철은 눈물을 쏙 뺀 다음 애를 일으켜 세워 주고 말했다.
“도움을 받으면 고마워해야지 어디서 까칠하게 굴어.”
“누가 너 따위...”
여전히 소년은 까칠하게 굴었다.
“자자 적당히 하고. 다친 모양인데 병원에나 가자.”
소년은 안 간다고 떼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재철이 손을 꽉 잡고 질질 끌어서 병원까지 가버렸으니까. 소년은 이 정체 모를 동양인의 무시무시한 힘에 경악할 뿐이었다.
***
재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무슨 개같은!!!”
재철은 분노해 외쳤다.
지금 재철이 떨리는 손으로 잡고 있는 것은 한 장의 작은 종이.
영수증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그것은 병원 영수증!
바로 집단으로 구타당하던 소년의 치료비였다. 한데 겨우 가벼운 타박상 정도 치료햇을 분인데 미국 달러로 200이 넘게 나왔다.
한국 돈으로 20만원이 넘는단 소리!
의료보험이 없다는 사실의 끔찍한 공포를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숫자였다. 그 돈이 얼마나 큰 것인지 소년 역시 절실히 아는 듯, 쩔쩔매며 발 뺄 궁리만 했다.
“니, 니가 데리고 온 거니까 돈은 못 줘!”
“너 같은 애한테 돈 받을 생각은 안 해. 그나저나 이거 정말 후덜덜한 가격이네. 그냥 침 바르고 치울 걸 그랬나. 아니 축구를 잘하니 저런 상처를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법이지.”
재철은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는 한국 의료보험이 얼마나 위대한지 주변에 전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돈을 받지 않는다는 말에 안도하면서 소년이 겨우 정식으로 인사했다.
“어쨌든 고마워.”
“이제야 사람다운 말을 하는구나.”
“쳇!”
재철의 말에 또 반발심이 든 것인지 소년은 고개를 홱 돌렸다. 재철은 소년의 흥미도 끌 겸 화제를 바꿔서 말했다.
“그런데 너 축구 잘하더라.”
이야기를 붙이기 위한 핑곗거리 같은 말이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길게 시합을 보지 못했지만, 소년이 시합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했다.
“당연하지! 나는 펠레 같은 선수가 될 거야!”
소년은 냉큼 미끼를 물면서 말했다.
“펠레? 꿈이 큰데.”
펠레는 축구 황제다.
펠레 같은 선수가 되겠다는 말은 그것은 축구 선수로서 고금제일이 되겠다는 말과 다를게 없다. 세계 제일도 아니다. 고금제일인 것이다.
비록 요즘이야 펠레 하면 그의 저주실력 때문에 더 알려져 있긴 하지만.
“누나가 가능하다고 했어!”
“누나도 있냐?”
“그럼. 얼마나 미인인데.”
“헤에.”
누나가 있다는 말에 살짝 관심이 갔다. 소년은 이목구비가 잘 생겨서 크면 꽤 미남이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누나도 미녀이지 않겠는가.
누나 이야기가 되자 소년의 말은 더 짙은 열의를 띄었다.
“펠레 같은 선수가 돼서 브라질을 떠나 많은 연봉을 받고 누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게 내 꿈이야!”
“기특한 꿈이군.”
“헤헤.”
소년은 웃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마도 축구 실력에 꿈을 칭찬받으니 경계심이 많이 풀린 모양이었다. 재철은 역시 애들은 다루기 쉽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하긴 너 축구 잘하니.”
“그렇지? 클럽에 있는 다른 녀석들은 다 바보야!”
바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여러모로 실력 차가 있는 건 사실이라는 것이 재철의 소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의아했다.
“그런데 왜 괴롭힘을 당하던 거야?”
“그건 클럽의 다른 녀석들이 나를 시기해서 그래. 자기들이 못해서 내가 활약한 걸 어쩌란 말야. 흥. 이번에 시합이 있으니까 거기서 활약을 하게 되면 더 좋은 클럽으로 갈 수 있을거야. 그러면 정식 선수 발탁도 꿈이 아니야.”
“벌써 프로가 되는 거야?”
“빠른거 아냐. 브라질엔 더 어린 나이에 프로 선수가 되는 경우도 있어.”
실제 그렇다.
펠레의 경우 프로 선수로 뛰었던 나이가 만 15세.
한국식으로 14살이니 중학생 때부터다.
“과연 축구 강국이군...”
브라질의 최고 수출 상품은?
축구 선수.
이런 농담이 있을 정도로 축구는 브라질 사람들의 꿈이 집약된 스포츠다. 단지 좋아한다기보다 거의 사라진 성공의 기회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여겨진다.
소년이 이제 관심을 바꾸어 재철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당신은 어디서 온 거야? 중국? 일본?”
“음, 기분이 나쁘군. 한국이다.”
한국은 안 나오고 중국에 일본만 나온 데서 짜증 난 얼굴을 하고서 재철이 말했다. 이어진 답이 한데 더욱 걸작!
“아, 그래. 한국. 들어본 적 있어. 축구 못하는 나라잖아?”
“브라질에 비하면 그렇긴 해도 나름 괜찮다고! 적어도 중국이나 일본보다야 세!”
욱해서 재철이 외쳤다.
소년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봐야 동양이지. 동양은 결코 남미 축구를 못 이겨.”
“거슬리는 말이군.”
문제는 거슬리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반론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최소한 지금까지 동양은 축구에 있어 처절하게 박살 나기만 했다.
“헤헤, 좋아. 내가 프로 선수가 되면 한국에서 오퍼가 들어왔을 때 조건을 보고 심사숙고해 줄게.”
불쾌한 듯 투덜거리는 재철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소년이 말했다.
“조건보고 심사숙고 하는게 은혜냐?”
그러자 소년은 뭘 모르는 소리를 한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좋은 선수는 커리어가 중요하다고. 명문팀에 들어가는게 얼마나 중요한데. 계약 조건이 좋아도 팀이 무명이면 손해라고 봐야해. 그런데도 한국 같은 약소국가를 내가 봐 주겠다는 거야. 고마운 일이지!”
“아, 알았어. 알았어.”
축구에 대해 사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이걸로 애기해 봐야 어린애한테 체면 깎이게 박살나는 수밖에 없다 싶어 재철은 휘휘 손을 저었다.
그리고 소년은 재철에 대한 호기심이 인 듯 물었다.
“무슨 일로 브라질에 온 거야?”
“리오에 왔으니 놀러 온 거지 별거 있겠어?”
“리오에서 동양 관광객이 당신처럼 느긋하게 굴면 총 맞아 죽어. 가이드 꽁무니나 쫒아 돌아다닐 것이지.”
“걱정마라. 내가 이래 봬도 아주 강하거든.”
재철은 가슴을 한 손으로 탕 치면서 말했다.
“전혀 그렇겐 안 보이는데.”
“허, 참 시건방지군.”
재철은 이 쥐톨만한 꼬맹이가 참 기가 막혔다. 하지만 꼬맹이 쪽은 역시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일 뿐이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못 들었군. 뭐라고 하냐?”
“나는 에반젤이라고 해. 그럼 당신은?”
“그냥 재철이라 불러.”
“이상한 이름이네.”
에반젤이 말했다. 재철도 한 소리 해 줬다.
“외국인 이름이 이상하게 들리는 건 당연한 거지. 그렇게 따지면 니 이름도 이상...”
이상하다고 하려다가 재철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외국이름이 한국인에게도 이상하게 들린다고 하려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진 않아서였다. 한국인은 무수한 영화와 영어 공부를 통해 어지간한 외국인 이름은 이제 친숙하다!
그런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반젤!”
에반젤은 고개를 돌리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아, 누나가 왔다!”
재철도 호기심과 함게 소리가 들린 쪽을 봤다.
그리고 놀란 얼굴이 됐다.
에반젤의 누나가 미인일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인이었다. 약간 검은 피부에 몸매가 정말 끝내줬다. 세나나 에이리에는 못 미친다고 해도 지연 정도 수준에는 충분할 정도!
“저 분이 네 누나구나...”
“그래.”
재철의 반응에 에반젤은 자랑스러워 하는 기색을 봄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에반젤의 누나는 전화로 연락을 받고 여기 온 참이라 경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재철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돼서 도운 거니까요.”
“저기 치료비는...”
에반젤의 누나가 곤란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지불 했으니 괜찮습니다.”
“그래. 이 동양인이 자기가 낸다고 했으니 누나는 걱정하지마!”
에반젤이 이어서 외쳤다.
“하지만...”
에반젤의 누나는 재철의 말에 반가워하면서도 곤혹스런 기색이었다. 재철은 미인의 호감도 살겸, 또한 체면 문제도 있다 싶어 손을 저어 거절했다.
“괜찮다니까요.”
“그러면 감사합니다. 저는 지젤이라고 합니다.”
“용모처럼 아름다운 이름이시군요. 저는 재철이라고 합니다.”
재철은 건치를 드러내며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