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흠, 그건 말이야. 장기적으로 나를 돕게 할 거라서 그래.”
“장기적으로?”
“뭐, 지금은 내가 지구에 있지만, 꾸준히 쭉 있을 건 아니잖아?”
“그런가?”
“하긴 왕이라고 하니까…….”
모두 잠시 당황했다가 곧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강민은 이곳에 와 있으나 이곳 사람이 아닌 셈이다. 지구에도 놀러 왔다고 하고, 또 해야 할 일을 많이 놔두고 도망쳐 왔다고 하니…….
결국은 돌아가서 다 해결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면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것은 당연.
“나는 여기 휴가차 와 있는 거라고. 그러니 언젠가는 돌아가야지.”
“그런 날이 오는 건가.”
“쓸쓸할 것 같다.”
모두 납득했지만 강민이 떠날거라고 생각하니 쓸쓸해지는 모양이었다.
강민도 쓸쓸하게 웃었다.
“나도 아쉽긴 할 것 같다. 그런데 어쨌든 내가 지금까지 많은 일을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사라져 봐. 그것들이 모조리 다 갑자기 파탄이 날 수도 있는 거 아냐?”
“그건 그렇지.”
“재단 관리 같은 거만 해도…….”
“범죄율도 많이 내려갔다는데 그것도 다시 올라가겠지.”
다들 강민의 말에 동감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강민은 좋은 일에 사용하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모아 눴다. 현재가지 모은 금액만 해도 천억이 넘는다. 그런 금액의 관리자가 사라진다면 어떤 꼴이 될까?
그렇지 않아도 강민이 자기 신분을 가지고 관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위험한 면이 많은데, 본인이 아예 사라진다면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 들러붙어 돈을 쪽쪽 빼먹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강민이 무서워서 감히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고 있을 놈들도 이걸로 제 세상이라고 날뛰게 될 것이다.
강민은 단순히 체포를 하는 게 아니라 처참한 고문과 평생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신체를 파괴하는 악독함으로 강력 범죄를 많이 줄였는데, 범죄자들은 이제 다시 그런 걱정에서 해방되는 꼴이 될까.
“그래. 그런 여러 사정이 있는 만큼 내 일을 대신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걸 우리들이?”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국 정도에선 꾸준히 해 줘야 하니까. 그런 면에서 믿을 수 있고 훈련도 받은 편인 너희들이 좋지.”
“그런가.”
“그럼 뭐 걱정할 필요 없겠네.”
모두들 강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고, 또한 강민을 돕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해 얼른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 맹세란 거 얼른 하자.”
“그래. 길게 끌 것도 없겠다.”
“그런데 맹세는 뭐야?”
“아, 그건 내가 설명할게.”
세나가 나섰다.
“말 그대로 마법적인 맹약을 맺는 거야.”
“부, 불길한데.”
맹세에 마법이 끼어드니 다들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게 갑자기 마법이라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너희들이 그 힘으로 아주 나쁜 짓을 하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위해도 없으니까.”
세나는 안심시키려고 한 말인데, 도리어 다들 불안해지고 말았다.
위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들어가 버렸으니까!
“위, 위해라고요?”
“그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거 아냐?”
“그렇지. 맹세의 내용에 따라 거기에 반하면 죽을 수도 있는 거니까.”
세나는 여전히 별거 아니라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강민단원들의 태도는 방금전과 달리 좀 주저하는 것이 됐다.
“그, 그건 좀…….”
“싫으면 물론 강요는 안 해.”
강민은 그들의 걱정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단원들은 그 말에 안정을 되찾았고, 강석이 입을 열었다.
“자자, 벌써 겁먹을 필요 있겠어? 일단 맹세의 내용만 들어보면 될 거 아냐.”
“으음.”
“그래도 무섭다.”
“갑자기 저주 같은 소리가 나오니 말이야…….”
강석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다들 불안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한 모습이었다.
세나는 그들을 안심시킬 겸 말했다.
“좀 무섭게 여겨질 수도 있는데, 중요한 일을 맡기거나 할 때 우리들 세계에서는 대리인을 세우려고 자주 쓰는 방법이야. 맹약을 지키도록 강제하는 거니까.”
“그러면……. 강민에게서 배운 걸로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건가요?”
호성이 세나에게 물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말하면 그렇지.”
“그런데 어느 정도의 나쁜 짓이 안 된다는 건가요?”
강석이 물었다.
사실 나쁜 짓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범위가 아주 넓고 진짜 나쁜 짓인지 말하기에 애매한 것도 많다.
이에 대한 세나의 답은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건 개개인마다 달라.”
“다르다고요?”
“뭐는 되고, 뭐는 안 되고 하는 식으로 일일이 조절하는 건 불가능하잖아?”
모두들 세나의 말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죠.”
“그러면 너무 복잡해질 거 같아.”
한국의 형법과 민법책의 두께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그건 명백히 범죄라 할 수 있는 행위들을 적어 놓는 것인데도 아득할 정도로 양이 많다. 그런데 사소한 나쁜 짓까지 포함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무시무시해진다.
심리에 반응하는 게 올바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마법에 걸리는 당사자가 이건 정말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힘을 사용할 때 반응하는 거야.”
“그렇군요.”
“그러면 남들이 보기엔 진짜 나쁜 짓인데 저지르는 놈은 별거 아니라 여기면 작동 안 한다는 거 아닙니까?”
재철이 물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적으로는.”
“그러면 별 의미 없어 보이는데요.”
지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아. 그렇게 다른 사람과 생각이 완전히 다르게 되는 경우는 드물거든.”
“수꼴이니 좌빨이니 해서 투닥거리는 걸 보면 그런 거 같지도 않던데.”
호성이 미심쩍게 말했다.
실제로 한국 인터넷은 매일같이 수꼴이니 좌빨이니 하는 말로 전쟁터다.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이 보기엔 이게 저거 같고, 저게 이거 같은데 그걸 가지고 상대를 악마로 몰고 화형시켜야 한다는 식의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극단적인 모습을 보자면 다른 사람과 생각이 크게 다르기 힘들다는 말은 도저히 신빙성이 없다.
그 지적은 일리가 있어서 세나는 웃으며 설명했다.
“호호호! 확실히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그런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 그렇지만 그런 미묘한 문제들 말고는 뻔한 거 아냐? 어려운 사람 돕고, 강도짓 하면 안 되고.”
“그건 그렇죠.”
그건 그런 것 같았다.
정책 부분에서 이게 옳네, 저게 옳네 싸우는 건 사소해 보이는 걸로 극단적으로 나뉠 수 있지만, 도둑질이나 강도, 비리나 사기 같은 것에는 그런 게 달라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 그런 부분에서만 효과를 발휘하는 걸로 충분하잖아.”
“그것도 그렇군요.”
“아참, 그리고 정치적인 것에는 되도록 관여하지 마.”
생각난 김에 말한다는 듯, 강민이 끼어들었다.
“왜? 투표는 열심히 하라고 맨날 괴롭히더니.”
“그러게 말이야.”
강민단원들이 투덜거렸다.
강민은 투표를 안 하고 놀러 가면 벼락 맞아 죽을 거라면서 매일 협박해 항상 다원들에게 투표하도록 요구했다.
벼락의 정체가 강민의 주먹일 거란 점을 잘 아는 강민단원들은 물론 그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니 기묘해 보일 수밖에.
“시민의 의무는 행해야 하지만 정치적인 것에 휘말려서 장갑맨 활동이 분란에 휩싸이면 그것도 피곤하니 말이야.”
그리고 세나가 말했다.
“안 그래도 한국에선 범죄잔데 그런 걸로 잡음이 생기면 곤란하잖아.”
“음, 알만하군.”
모두 강민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수꼴과 좌빨이 싸우는 걸 보자면 상대의 흠집을 잡기 위해 인간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존재다. 정치에 괜히 끼어들면 피곤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장갑맨은 현재 범죄자니까. 한쪽에 밉보이면 끝도 없이 비판받을 수 있다.
이야기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세나가 물었다.
“그럼 하겠어?”
“음…….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줘.”
강민단원들이 요청했다.
급한 일도 아니라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강민단원들은 수군거리며 각자 의견을 나눴다.
***
회의는 곧 끝났다.
세나가 물었다.
“됐어?”
“응.”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할 거야.”
먼저 입을 연 것은 재철.
그리고 다른 강민단원들 역시 우후죽순처럼 손을 들기 시작했다.
“나도.”
“나도!”
“이하 동문.”
“나 역시.”
호성과 강석도 손을 들었다. 그걸 보고 다른 단원들이 기이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호성, 너는 굳이 이런 거 할 필요 없지 않아? 강석도 그렇고.”
호성도 대단한 부자고, 강석은 공부가 특기나 마찬가지다.
특별히 이런 맹세 같은걸 하면서 초인이 될 필요는 없다. 하긴 필요만 따지면 재철 일당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강해지는 걸 좋아한다는 특징은 있다.
“일단 뭐 재밌을 거 같잖아.”
“그리고 강해진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하지만 호성과 강석 역시 남자!
초인이 될 수 있다는 매력은 쉽게 떨치기 힘든 모양이었다. 더구나 초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웅이 되는 것이니 젊은 남자의 공명심이 자극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면 환영하지.”
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저기!”
“나도나도!”
한데 지연과 혜경도 얼른 손을 들며 참가 의사를 보였다.
강민을 비롯해 남자 단원들은 모두 의외라는 표정이 됐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왜 이런 걸 하려 한단 말인가.
“아니 두 사람은 왜?”
“그게…… 헤헤.”
“장갑맨 활동을 하고 싶진 않지만 강해지는 건 배우고 싶어.”
지연과 혜경은 웃으면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때 세나가 생각나는 바가 있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알겠다!”
“뭐가?”
“두 사람이 노리는 건 노화 방지와 몸매 보정! 맞지?”
정곡!
“호호호.”
“호호호!”
두 사람은 얼굴을 붉힌 채 얼버무리듯이 웃었다. 이어 웃음이 잦아들고 진지한 얼굴이 되어 둘은 강민과 세나에게 물었다.
“안 되나요?”
“곤란해?”
강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안 될 것도 없겠지. 어쨌든 맹세는 해야 합니다.”
“그야 문제 없어!”
“그럼요!”
두 여인의 눈에서는 세나나 에이리와 같은 몸매를 가지고 말겠다는 타오르는 의지가 읽혔다. 미용에 대한 여인의 집착을 새삼 느끼며 강민은 세나에게 뒷일을 맡겼다.
“그럼 부탁해.”
“응. 자, 그러면 한 사람씩 나와.”
세나는 거들먹거리며 말했고, 강민단원은 한 사람 한 사람 그녀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 작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