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이게 뭐야?”
호성이 대표로 강민이 내민 걸 받았다. 그것은 봉투였는데 안에는 하얀 종이 수십 장이 들어있었다. 호성은 그중 하나를 꺼내 뭔가를 확인했다.
사인이었다.
“사인?”
“그래.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배우와 뮤지션들의 사인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강민이 말했다.
“우와!”
“대단한데!”
모두들 우르르 몰려들어 사인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쟁쟁한 배우와 뮤지션들의 사인이 모두 있었다. 개중에는 사인을 잘 않기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나 가수의 것도 있었다.
모두들 앞다투어 달려와서는 좋아하는 스타나 뮤지션의 사인을 하나씩 얻었다. 사실 미국은 특산품다운 특산품이 없었기 때문에 각종 스타에게서 직접 얻어오는 이런 사인이야 말로 진짜 미국적인 선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스타들은 미국 출신이 많고 미국에서 안 나가니까!
“그런데 그런걸 선물로 줘도 돼? 누가 보고 알아보면……?”
강석이 걱정스레 말했다.
특이한 사인은 희소성이 있는 만큼 가지고 있다는 걸 남들이 알게 되면 그걸로 장갑맨과의 연관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건 강민도 이미 생각해둔 바였다.
“괜찮아. 같이 간 스태프가 다 같이 사인을 받아서 같은 사인이 아주 많으니까.”
그 말을 하자마자 강민단원들은 사인에 대한 관심이 죽어버렸다.
“에이 뭐야.”
“그러면 희소성이 떨어지잖아.”
다들 시시하다며 물러갔다.
장갑맨의 신분으로 미국에 가서 받았으니 귀한 사인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많이 있다니 관심이 죽어버린 것이다.
“기껏 선물을 줬더니…….”
강민은 투덜거리다가 제안했다.
“그러면 미국 갔던 얘기 해 줄까?”
“별로.”
“한국에서도 다 알 수 있었으니까.”
다들 시큰둥했다.
시대는 바야흐로 세계화!
그리고 정보화!
미국에서 일어난 일은 한국에서 안방에서도 알 수 있었다.
장갑맨의 일거수일투족이 한국에도 소개됐기 때문이다. 물론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가슴 아픈 조건은 붙지만!
“음, 하기야.”
“그럼 뭐 우리한텐 네가 돌아와도 별 볼 일 없는 거네.”
“그러게.”
다들 시시하다는 듯 말했다.
강민은 투덜거리며 물었다.
“쳇, 그럼 내가 물어야겠군. 한국에선 어땠어?”
“말할 필요가 있냐.”
“안 봐도 비디오. 척 하면 삼천리지.”
“평소 네가 사건을 저지르면 일어났던 반응들의 확장판 같은 거였지, 뭐.”
그것도 생각했던 대로였다.
기껏 한국에 돌아왔는데 별 새로울 게 없다 싶어 강민은 실망했다. 역시 기술이 발전해 봐야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새로울 게 없으니…….
한데 호성이 생각난 게 있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아, 맞다, 재밌는 게 있었어.”
“뭔데?”
“일본 혐한 새끼들이 말이야…….”
“그것들이 왜?”
흥미진진했다.
호성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 계속 네가 날조된 존재라고 떠들잖아.”
“어이구, 패배자 새끼들. 쯧쯧.”
강민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어느 나라나 자국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에 빠져 타국을 깔보고 비웃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일본은 좀 특이하다.
일본이 특이한 건 일본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한국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심과 경멸이 자국에 대한 자부심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일본을 싫어하는 이들은 아주 많았지만, 그거야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과거가 있어서 당연한 일이었다.
호성은 웃으며 이야기를 더 했다.
“그래서 그 꼴을 모아다가 번역해서 세계 각지의 사이트에 올렸거든.”
“잘했어. 반응은?”
강민이 기대하며 물었다.
호성은 스마트폰을 꺼내 어느 사이트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덕분에 신문에도 났지.”
미국 신문인데 일본인들의 추한 모습이라고 번역된 게시글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근처에서 듣던 재철이 부리나케 달려와 또 다른 것을 소개했다.
“여기 스크랩도 해뒀다고.”
기사가 스크랩된 파일이었다.
“보자.”
강민이 스크랩된 기사를 하나하나 살폈다.
모든 기사가 장갑맨을 날조라 주장하는 일본의 혐한에 대한 조롱과 비판으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세계에서 미움받고 있는 일본이었다.
“으하하하! 꼴좋다. 혐한 새끼들.”
“일본 국격이 덕분에 많이 높아졌지.”
호성과 강석, 그리고 재철 일당은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하긴 강민단원으로서 강민의 명예를 지키고 혐한들을 엿먹였으니 뿌듯한 게 당연했다. 강민은 소파에 앉으며 낄낄댔다.
“이런 짓 좀 많이 해 줬으면 좋겠다. 위안부 비 같은 걸 세울 때 발광하면 세계인들이 다 같이 병신 취급하고 무시할 거 아니겠어?”
“그건 그래.”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그랬지만 일본의 역사 인식은 요즘 들어 한층 더 추악해지고 있었다. 사람들 중에는 방사능의 효과라는 믿을만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래 그랬지만 요즘 한층 더 사람 같지 않은 새끼들이라니까.”
“원숭이가 세슘 원숭이로 진화하고 있으니 말 다했지, 뭐!”
강민단원들을 수군대며 열심히 떠들었다.
후쿠시마에서 터진 원자력 발전소는 여전히 방사능을 뿜어내고 있었고, ‘후쿠시마산 음식을 먹어서 응원하자.’ 같은 병신맛 크리티컬이 작렬하는 정책을 통해 일본 정부는 열도 전역을 방사능에 오염시키고 있다.
일본인 전부가 피폭당하고 있다는 악의 서린 말은 농담이 아니다.
“자자, 열도 흉은 그만보고.”
“그럼 이제 어쩔 거야?”
호성이 강민에게 응해 화제를 바꾸었다.
재철도 동참했다.
“아직 방학은 좀 남았는데.”
강민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피곤하니까, 이 한 달은 좀 속 시원히 놀자!”
다들 기뻐했다.
혹시 강민이 또 남은 한 달간 전국 봉사활동 순회라도 가자고 하면 어쩌나 싶어 살짝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오!”
“계획을 짜야겠군!”
“다른 강민단원들에게도 다 연락을 해 두지!”
“그래! 스케줄 조정을 해야 하고!”
그들은 강민의 마음이 변할세라 서둘러 움직였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단원들을 보면서 강민은 피식 웃었다.
***
쏴아아아!
시원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넓은 해변이 펼쳐진 곳이었다. 그리고 그 해변에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바글바글거리고 있었다.
온 해변이 비치파라솔의 붉은색과 파란색, 그리고 살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뒤돌아보면 높고 화려한 건물들이 즐비!
대한민국에 이런 해변이 있는 곳은 한곳 뿐이다.
바로 해운대.
그리고 그 해변에 새로운 일당들이 도착했다.
바로 강민단!
“여기가 해운대!”
그들은 벌써 수영복 차림으로 호기롭게 외쳤다.
“부산의 강남!”
특히 부동산 값 폭등이라는 면에서 강남과 닮았다.
“파도!”
“아리따운 여성들!”
실제로 헐벗은 젊은 아가씨들이 아주 많이 보였다.
그들은 다 함께 명랑하게 파라솔 중 한곳으로 갔다.
해운대 파라솔은 번호표를 뽑아 비용을 지불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단원들도 먼저 간 단원들을 따라 빌린 파라솔로 가 가지고 온 물건들을 풀었다.
곧 물건 정리가 끝났고 재철 일당을 비롯해 남자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강민은 가지 않았다. 파라솔 근처에 의자를 빌려와 거기에 앉아 그냥 쉬고 있었다.
“신이 났군.”
“놀러왔으니 신이 나야 본전이지.”
그의 옆에는 마찬가지로 의자를 가져와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세나였다.
수영복을 입은 그녀의 몸매와 아름다움은 압도적!
지나가는 남자들은 그녀의 몸매에 혹해 힐끗 쳐다보고 지나갔다. 남자 친구와 같이 온 여자들은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녀들 또한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같은 여자로서 질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멋진 몸매였기 때문이다.
“그런가.”
강민은 그리 말하며 주변을 한 번 쭉 훑었다.
“아, 그런데 사람이 정말 많다.”
마찬가지로 주변을 쭉 훑어보며 세나가 말했다.
“그렇긴 해. 해일이 와서 다 쓸어가 버렸으면 좋겠네.”
“무슨 그런 끔찍한 생각을.”
세나가 쌍심지를 치켜떴다!
“나는 한 달이나 놔두고 에이리하고 다 다녔잖아!”
강민은 그녀의 기세에 압도당해 아무말도 못했다.
“그러니 여기서는 오붓하게 독점하고 시간을 보내려는데 이렇게 드글드글해서야! 쳇!”
에이리는 해운대에 오지 않았다.
오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미국 건으로 강민을 독점해서 세나의 눈치 때문에 오기 힘든 것도 있었고, 한 달이나 노느라 일이 밀려서 경비회사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던 것도 이유였다.
“어흠. 그런데 너는 한 달 동안 뭐 했어?”
강민은 얼른 화제를 바꿨다.
“그냥 주식 놀이나 하면서 이곳의 학문을 좀 공부했지. 재밌는 게 많던데.”
“그랬겠지.”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그만큼 많은 학문이 발달해 있다.
세나가 있던 곳은 마법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문이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대현자로서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특히 재밌는 건 경제학이었어. 이건 돌아가서도 써먹을 수 있겠던데.”
강민이 눈을 번쩍였다.
“뭐? 그렇다면 나도 가서 민주주의의 전사가 되어…….”
강민은 현대의 지식을 이세계에 적용시켜본 것이 별로 없었다.
민주주의에 관련해서 지식인들 사이에 다소 반향이 일었던 게 전부.
그는 그걸 참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나가 말렸다.
“아 거, 쓸데없는 욕심 부리긴. 이건 경제적 이익에 관련된 거라서 쉽게 적용 되지만 너는 정치체제라서 안 돼. 기존 세력이 어마어마하게 반발한다고.”
강민은 투덜댔다.
“젠장. 너도 민주주의가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더 훌륭한 체계이긴 해. 그렇지만 필요조건이 너무 많아. 그래도 내가 성공하면 뒤따라서 도입 가능할지도 모르지.”
민주주의가 우월한 정치 체계라는 건 사실이다.
세나는 이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우월한 정치체계는 현재 그녀의 세계에서 힘을 가진 자들의 이익에 철저하게 반한다. 그들이 그런 걸 두고 볼 리가 없다.
힘을 모아 일치단결해서 발악할 테고, 어쩌면 그건 마왕과 싸우는 것보다 피곤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