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강민과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경청할 자세를 갖췄다.
“지금 미국의 형편이 어려운 것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큰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여기저기에서 위기의 조짐을 보이던 미국에서 결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다.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과장된 말이 나올 정도로 그것은 커다란 위기였다.
자칫하면 대공황이 다시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그 충격에서 벌써 일어서긴 어려웠다.
오마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크본드가 터진 후유증을 처리하기 위한 양적 완화만 이조 달러가 넘었습니다. 무책임한 거대은행과 보험사들을 정부 재원으로 살려야 했지요. 그러고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유럽이 언제 터질지 모르겠고, 중국도 성장률이 주춤해서 예전처럼 세계 경제 위기에서 구출해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위기 당시 미국 정부에서는 엄청난 돈을 들여 각 기업을 살렸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강행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대공황이 올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이후로도 부실채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유럽이 그리스 때문에 박살 나고 있었고, 중국 역시 시장 침체로 인해 세계 경제의 성장을 견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미국으로서도 좋지 않은 상황이라 진퇴양난이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들어가야 할 돈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부채는 이미 100%에 달했습니다. 더 이상 무리를 하기 어렵지요. 공화당원들은 재정건정성을 부르짖으며 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격으로 인해 건강의료보험 계획 역시 사실상 파탄 나고 말았습니다.”
공화당은 지난 정권을 잡았던 정당이다.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썼고, 각 기업의 규제도 풀어서 지금 사태를 일으킨 주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자신들의 잘못으로 현 정권을 공격하고 있다.
더러운 공격이지만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미국민들은 오마바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저런.”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도 손을 쓰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지난 정권이 저지른 전쟁 때문입니다.”
“말이 많은 전쟁이었지요.”
오마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러와의 전쟁 자체는 찬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저지른 전쟁은 사실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었던 게 여럿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어마어마한 전쟁 비용이 매년 소모되고 있습니다. 지난 정권 이전만 해도 흑자 재정이던 미국의 재정이 완전히 적자로 돌아서게 된 것도 다름 아닌 전쟁이 계기였던 것이죠.”
“전쟁이 돈을 많이 먹죠.”
“끔찍할 정도입니다.”
오마바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미국이 잘 나가다가 휘청거릴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베트남 전쟁이다.
미국은 당시 전비로 엄청난 돈을 사용했고, 이것이 쌍둥이 적자라는 것이 되어 미국의 강력한 패권에 큰 상처가 되었다.
지금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없는데 이제 중동에서 비슷한 꼴을 겪고 있다.
“하지만 전쟁에서 손을 뗄 수는 없습니다. 그 경우 너무도 많은 이들이 학살극에 휘말리게 될 우려가 있으며, 테러정권이 각 지역을 장악해 정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경우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마약 재배가 활성화되어 남미가 아닌 중동이 새로운 마약의 메카가 되어 전 세계에 마약을 공급하게 될 우려도 있습니다. 추산되는 피해자의 숫자는 적게 잡아 삼천만 명 이상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마바의 말은 농담이 아니다.
과장도 아니다.
정말 저렇게 될 수 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아편 재배가 일상적이다. 다른 작물을 키워서는 생계유지가 안 된다. 미국이 손을 놓으면 테러 단체들이 그걸 돈줄로 사용할 건 뻔하다.
“무섭군요.”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미국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강민은 이것이 오마바의 진정한 목적이란 걸 느끼고 물었다.
“중동 테러 단체의 수장을 몇 명 암살해 주십시오. 그 경우 후계 구도를 둘러싼 자중지란이 일어나 그들은 스스로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저희가 거기서 민주정권을 만드는 것도 쉬워집니다. 현재 현지에서의 반감이 큰 것도 전쟁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커서인데 그 경우 전투를 줄일 수 있으니 현지인과 동화정책을 추진하기도 쉬워집니다.”
“암살이라…….”
강민은 낮게 중얼거렸다.
암살.
어려울 건 없었다.
그는 살인도 무수히 했다.
그러나 아직 지구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지금, 들은 말의 십분지 일만 사실이라 해도 모두 죽어 마땅한 놈들이다. 내적으로 갈등이 됐다.
“물론 그냥 도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일억 달러를 입금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공하게 되면 일억 달러를 더 입금하겠습니다.”
큰돈이었다.
그러나 별로 끌리진 않았다.
어차피 돈은 그를 움직일 수 없다. 그보다는 현재 중동 지역을 장악하는 세력의 흉악함과 그들로 인해 발생할 피해에 더 마음이 갔다.
“당장 답하기는 어렵군요.”
정치적인 문제인 이상 즉답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강민은 일단 신중해지기로 했다.
정말 지금 오마바가 말한 것처럼 중동이 막장인지 더 상세히 조사해보고 결정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았다.
오마바는 간절하게 말했다.
“당신이 뜻하는 바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협박이십니까?”
강민이 불쾌한 듯 묻자 오마바는 쾌활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현재 우리가 그만큼 급하다는 걸 이해해 주시길 원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걸로 도움을 얻게 되면 저희 측에서도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건 그렇다.
강민은 초법적인 일을 할 경우가 많다.
한데 그런 것들은 비록 좋은 일이라 해도 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범죄자가 되고 만다. 미국에서 정부의 도움을 얻어 법의 틀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대단한 도움이 될게 틀림없다.
“좀 생각해 보지요.”
“그리고 또 다른 제안이 있습니다.”
오마바는 이어 말했다.
“무엇인지?”
“미군의 특별 교관으로 와 주지 않겠습니까?”
“교관이 돼서 군인들을 가르치라고요?”
강민이 되묻는 말에 오마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당신 정도의 초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교관이 되어 준다면 최소 연 삼억 달러 이상을…….”
정말로 와 준다면 연봉 삼억 이상도 충분히 내놓을 의향이 있었다.
장갑맨의 절반 수준의 힘만 가지게 되어도 그런 존재의 군사적 가치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F22 한 대가 2억 달러도 안 되는걸 생각하면 F22를 월등히 능가하는 군사적 가치를 가진 초인은 백억 달러도 족히 넘는다.
강민은 당장 거절했다.
“그건 정말로 곤란합니다.”
“그렇습니까…….”
예상했던 대답이라 오마바는 실망하지 않았다.
강민은 이유를 설명했다.
“한 나라가 너무 압도적인 힘을 가지는 건 좋지 않으니까요.”
“한국에도 공개하지 않겠다는 뜻이군요.”
“물론입니다.”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다행입니다.”
오마바는 안도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국이 강해졌으면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 힘은 악용의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전자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군사력의 속성이란 게 그렇다.
힘이 있으면 역시 사용해 보고 싶다.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건 사용하면 뒤통수를 아주 세게 후려 맞을게 뻔해서이다.
그러나 강민의 힘은 그럴 걱정이 없다.
악용 가능성은 백 프로!
그런 힘을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에게 가지도록 해선 안 된다. 독일군이 유태인을 학살했던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것으로 대통령과의 대화는 끝났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마바는 헤어짐의 악수를 강민과 나누며 말했다.
“언제든 마음이 결정되면 백악관으로 메일을 주세요. 미스터 글러브.”
“그러지요.”
손을 뗀 다음에도 오마바는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또 있으신지?”
결심을 한 듯 오마바가 물었다.
“맨 얼굴을 보여줄 수 없습니까?”
“네. 보여줄 수 없습니다.”
강민은 냉혹하게 거절했다.
“역시 그렇군요.”
오마바는 실망한 표정이 됐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당신의 활약을 응원합니다. 미스터 글러브.”
“대통령 역시.”
강민은 마스크 안쪽에서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미국에서 가진 마지막 만남이었다.
*
쾅!
문이 힘차게 열렸다.
강민이 안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내가 돌아왔다!”
안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이들이 벌떡 일어서며 놀란 얼굴을 했다.
“오오!”
“강민이다!”
그들은 모두 강민단원들.
이곳은 강민단의 기지였다.
단원들은 모두 반가운 얼굴로 강민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와, 미국에서 돌아온 거야?”
“후후, 그럼 어디겠냐.”
“선물 사왔어? 선물!”
재철이 재촉했다.
해외여행을 했으면 선물을 내놔라!
훌륭한 빈대 정신!
그러나 그것은 강민단원들 공통의 소망이었다.
“그래! 미국까지 건너갔으면 선물을 사 와야지!”
“선물을 사온 건 아니지만 선물은 있지.”
강민이 그리 말하자 기대 어린 단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뭔데?”
“좋은 거겠지?”
“좋은 거지!”
강민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열고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냈고 자랑스럽게 내밀며 말했다.
“이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