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다큐멘터리의 영상이 너무 놀라웠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꾸준히 등장하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에이리가 말했다.
“뭐 그래도 상관없지 않나요?”
종찬과 유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WWF는 쇼맨십 장사를 많이 한다. 그래서 만일 이 영상이 조작이란 이야기가 널리 퍼져도 그다지 타격은 없다.
“저희는 상관없지만…….”
이어서 두 사람이 바라본 것은 제임스!
제임스는 곤혹스럽게 말했다.
“내셔널 측에서는 이걸로 혹시라도 사기꾼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죠.”
“그럴 만도 하지. 학술 단체라며?”
“정확히는 학술 지원도 하는 단체지요. 어느 쪽이든 사기꾼 소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입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영상 산업은 다큐멘터리 같은 게 주류다.
‘미스버스터’ 같은 흥미진진한 프로그램도 엔터테이너화한 다큐멘터리 같은 것으로, 그 본질은 과학적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 다큐멘터리라니!
물론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다큐 형식으로 신기한 주제를 다루는 것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라도 미리 못박고 시작한 것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조작이라니!
내셔널 측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강민이 미간을 좁혔다.
“다른 사업도 있고 하니…… 필요하긴 한데…….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유만이 문득 말했다.
“장갑맨이 직접 나서서 진짜라고 밝히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좀 곤란한데요.”
강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곁에서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하게 논란이 종결될 방법이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한국에서…….”
“그러면 미국 쪽에서도 모른 척이 힘들어지고 저희 협회는 물론 내셔널 측에서도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한국 속담 중에 늑대를 쫓으려고 호랑이를 들여온다는 게 있죠. 그 꼴이 납니다.”
역시 장갑맨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는 상황을 종결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흐음.”
“그럼 다른 좋은 방법은 없나요?”
에이리가 물었다. 종찬이 기다렸다는 듯 불쑥 말했다.
“마침 프로그램 여럿에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중 하나에 나가서 직접 보여주시면 어떨지…….”
“어떤 프로그램입니까?”
“제이미 윈프라라고……. 토크숍니다.”
제임스가 놀란 표정이 됐다.
강민도 마찬가지였다.
“아, 저도 압니다.”
“유명하죠.”
제이미 윈프라 쇼.
미국 최고의 토크쇼로 유명하다. 할리우드 스타부터 유명 뮤지션, 심지어 정치인까지 초빙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제이미 윈프라 쇼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토크쇼로 입지를 굳힌 지 이미 십 년이 넘었다.
그 방송의 영향력 또한 굉장해서 책이 소개되면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음악이 소개되면 음악이, 정치인이 소개되면 지지율이 오른다고 하는 황금의 프로그램!
자본주의의 온상인 미국에서 누구나가 탐낼만한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에서 초청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놀랐던 강민의 표정이 금세 수그러들었다.
아주 중대하고도 끔찍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저 영어 못하는데.”
윈프라 쇼는 토크쇼!
영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인의 대적, 영어!
십 년의 시간을 뺏고, 수백, 아니 천이 넘는 교육비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모한다. 그러고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이는 백 명에 하나도 안 된다!
끔찍한 비효율의 극치!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망국적 집착!
그것이 영어!
물론 강민은 서울대생인 만큼 영어에 상당히 능하긴 하나……. 그래도 토크쇼에서 자유로이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통역사가 같이 갈 테니 괜찮습니다.”
“토크숀데 그런걸로 되겠습니까?”
유만의 말에 미심쩍다는 태도로 강민이 물었다.
토크쇼는 자연스러운 대화가 중요하다. 그런데 통역사가 끼어들어서야 그런게 가능할 리가 없다.
“보통은 힘들겠지만 지금 장갑맨은 워낙 핫한 아이콘이라서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대화 자체보다도 퍼포먼스 쪽이 더 중요하거든요.”
“하기야…….”
장갑맨에 대한 관심은 그의 육체적인 능력과 그 진위에 있다.
말을 얼마나 잘 하는가에 대한 건 부차적이리라. 물론 그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 같은 건 정말 크나큰 관심거리가 되겠지만 강민이 그걸 이야기할 리는 없으니까.
에이리도 흥미로운 듯이 말했다.
“어때, 해 봐.”
“뭐 그러지. 그것도 홍보가 될 테니까.”
강민도 좋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종찬과 유만도 동의했다.
그들로서도 앞으로도 미국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강민이 잘 해 주고, 또한 지금 넷을 통해 퍼진 오해가 풀리는 것도 중요했다.
*
성대한 박수 소리와 함께 빛이 켜졌다.
동시에 무대가 드러났다.
소파가 편안하게 놓여져 있는 무대였다.
거기 앉아 있는 것은 흑인 여자.
나이는 중년 정도로 보였다. 친절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녀야말로 현재 미국의 TV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토크쇼의 여왕 제이미 윈프라!
어지간한 할리우드 스타를 비웃을 만한 수익을 이 토크쇼를 통해 올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십 년은 거뜬하다고 일컬어지는 스타 중의 스타!
바로 그녀, 제이미 윈프라였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손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우선 설명했다.
“여러분은 인간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녀는 주제를 제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한계를 알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도전했고 스포츠 영웅들이 탄생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우사인 볼트 씨 같은 경우도 그렇지요.”
지금 그녀가 거론한 중에는 여기 직접 출연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인간이 곰과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곰과 싸워 이긴다!
그 이야기에 윈프라는 저도 모르게 흥분한 것 같았다.
“생각해보세요. 곰이에요! 곰!”
놀라워하는 제스처와 함께 설명!
그러한 풍부한 감정이 느껴지는 동작이 그녀의 인기의 비결 중 하나였다.
보는 이가 저절로 동감하게 되는 몸짓의 힘!
“그런 건 옛날이야기나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거죠. 무기를 들지 않은 인간은 곰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었습니다.”
그리고 풍부한 교양 역시 윈프라의 인기의 비결 중 하나.
“그런데 그런 확신을 깨버리는 사람이 최근 나타났지요.”
크게 웃으며 윈프라는 손짓했다.
“소개합니다! 장갑맨!”
와아아아아아!
함성과 박수는 한층 커졌고 무대 세트에 준비되어 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거기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장갑맨과 그를 따르는 통역사 하나였다.
그들은 방청객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 소파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장갑맨.”
“반갑습니다.”
간단한 영어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당신이 장갑맨인가요?”
“하하,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일단 저는 장갑을 끼고 있군요.”
강민은 장갑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고 통역사가 그걸 전달했다.
윈프라는 웃으면서 위트 있게 답했다.
“오, 그렇군요. 메이드 인 차이나. 오, 장갑맨이 아닌 것 같은데요.”
모두들 그녀의 말에 웃었다.
전 세계 제조업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탓에 세계 최강의 짝퉁 대국이기도 한 중국을 비꼬는 말이었다.
강민도 즐거운 듯이 웃으며 답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좋아요. 우리 민감한 질문은 하지 않도록 하죠. 당신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아주 높다는 것은 알고 있나요?”
“저에 대한 관심이요? 아, 그렇군요. 알고 있습니다.”
통역을 통해 들으며 능글맞게 강민은 대답했다.
“네. 당신은 곰과 싸워 이겼죠.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지만, 당신이 당신 동료만큼이나 강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하죠.”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갑맨만큼은 아니지만 양복걸에 대한 관심 역시 뜨겁다.
특히 남자들이 좋아했는데, 그것은 양복을 입었다곤 하나 드러나 보이는 끝내주는 몸매 덕분! 실제 에이리의 몸매는 포토샵 보정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 남자라는 생물들이 헐떡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윈프라는 말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어 합니다. 대체 인간이 어떻게 곰을 이길 수 있냐는 거지요.”
“쉽습니다. 제가 이야기 하는 걸 할 수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든 곰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강민은 가벼운 어조로 말을 시작했고, 통역사는 이를 번역해 그들에게 전달했다.
“먼저 벤치프레스 일 톤을 가볍게 들 수 있을 것, 백 미터 달리기 5초를 끊을 수 있을 것, 새끼손가락으로 턱걸이해서 백 개를 할 수 있을 것, 그리고 주먹으로 철문을 박살 낼 수 있을 것. 참 쉽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두 도전해 보세요!”
와하하하하.
방청객들은 박장대소했다.
하지만 동시에 놀라워했다. 지금 장갑맨이 저런 이야기를 했다면 그는 분명 그걸 할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건 윈프라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