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강민이 물었다.
“MT에 안 왔던 것도 그 때문에?”
“응.”
상큼하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모르는 사람 많은 데 가는 건 싫거든.”
짜증난다는 시선으로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휙 둘러봤다. 학교 식당에는 많은 학생들이 있었는데 일부분의 학생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아주 많이 집중되어 있었다.
바로 남자들의 시선이!
여자들도 부러움과 시기심이 범벅이 된 상태로 적지 않게 불타오르는 눈빛들을 하고 있긴 했지만, 수적으로 비교할 때 역시 남자들에 비길 수는 없었다.
빨려든다고 할까? 본능의 명령처럼 남자는 세나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가 없을 지경인 것이다. 그런 상황은 강민 일행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기에 금세 동의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이해합니다.”
“저도.”
“모습을 보이자마자 눈길들이 심상치가 않았으니.”
“그거 뭐 지금도 마찬가지지.”
“그렇군.”
저런 시선을 하루 종일, 좁은 공간에서 받으며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해해. 남자가 원래 그런 생물 아니겠어?”
“부정할 길이 없군.”
“그야 그렇지.”
강민과 호성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과 함께 그 말에 동의했다.
남자란 어쩔 수 없이 슬픈 생물이다. 하기야 남자가 호색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일찌감치 멸종됐을 테지만.
“하여간 정말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잘 지내요.”
“그래요.”
강석이 이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에이리 누나만 왕따 시키는 셈이 되는데?”
“걔는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도 그렇죠.”
이어 세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리고 머리도 나쁘니까!”
“나쁜 것 같지는…….”
“네. 총명한 것 같던데.”
강석과 호성이 얼른 에이리를 변호했다. 세나가 눈동자를 사납게 번뜩였다.
“그럼 묻겠는데, 걔가 12년간 여기서 받아야 할 교육을 다 받고서야 칠 수 있는 시험을 일 년 공부하고 쳐서 이 학교에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아?”
“으음…….”
“그건…….”
단순히 영리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이렇게 구체적으로 물어 들어오면 역시 납득할 수밖에 없다. 에이리가 총명해도 그런 건 역시 힘들다.
재철 일당과 같은 돌대가리도 여기 오게 했는데 에이리가 뭐 힘드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단 에이리에게 주어진 시간 자체가 훨씬 적었던 데다가 재철 일당이 돌이라곤 해도 출석은 꼬박꼬박했기 때문에 생략 가능한 부분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에이리는 상대적으로 백지!
그야말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안 되겠지? 하지만 난 가능해. 그러니 에이리는 머리가 나쁜 거지.”
수긍하는 주변의 모양새를 보고 세나는 뻐기듯 말했다. 강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세나를 힐난했다.
“넌 참 말을 싸가지가 넘치게 하더라. 누누이 말하지만 너하고 비교해서 머리가 나쁘지 않다고 말하려면 일억에 하나도 없다니까.”
“하지만 사실이니까.”
전혀 에이리는 강민의 지적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모양새였다. 강민은 한 차례 더 지적했다.
“그게 더욱 문제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게 뭐가 문제야! 여기도 좋은 말이 있더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지니! 아무리 쓰라려도 사실을 외면하면 안 돼!”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이코패스를 생각나게 해.”
강민은 한숨을 쉬며 그리 말했다.
물론 사귄 기간이 긴 만큼 항상 이런 게 아니라 특정한 대상, 특히 에이리에게 이런 대립각을 세운다는 건 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이런 성격인 것은 쭉 그래왔다.
괴팍한 천재의 전형이라고 할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호성이 작은 목소리로 강석에게 말했다.
“나, 재철의 심정을 알겠다.”
“응. 나도 알겠어.”
“다음엔 잘 해 줘야지.”
“그래 너무 놀리지 말자.”
돌대가리를 돌대가리라 놀리며 스스로의 잘남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만 해도 상대에겐 얼마나 스트레스가 될지 세나를 보면서 둘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돌대가리라고 재철 일당을 놀렸던 게 좀 미안할 지경이었다.
***
쓸쓸한 사무실에는 종찬과 유만만 있었다.
서재에 앉아 무료하게 모니터를 보던 그는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별로 효과는 없나.”
“미운털이 박힌 셈이었으니 이렇게 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지요.”
근처 탁자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유만도 우울한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하아.”
“크게 기대는 안 했다지만 역시 실망이군요.”
두 사람이 실망하고 있는 건 물론 지난번 크게 때린 사과문과 제안문에 대한 광고였다. 인터넷에서는 상당한 화제가 되었지만, 그뿐이었고 실질적인 반응은 오지 않았다.
도리어 경찰에게 경고 전화가 왔었다.
장갑맨과 접촉해 그를 도우면 감방 갈 수 있다는 것과, 그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는 것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재깍재깍 넘기라는 것이었다.
“광고료도 싸진 않았고 말이야.”
“어쩔 수 없습니다. 차근차근 회복해 나가야죠.”
“으음. 그렇지.”
종찬도 그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고 만 것 같다. 재건이라고 해도 대체 어쩌면 좋을지. 지금 상황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보다도 훨씬 막막했다.
“잘도 안 떠나는군.”
종차은 문득 유만을 보고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월급도 제대로 못 챙겨주고 있고, 퇴직금도 사실 자신 없다. 그걸 종찬에게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이곳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유만은 멋쩍게 웃었다.
“뭐 마니아 인생이란 게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러니 나도 이런 일을 한 거지.”
종찬은 웃으며 그리 말했다.
마니아.
그렇다.
마니아니까 이런 일을 했다. 돈을 보고 하기에 이건 각박하다. 한국이란 곳의 상태 자체가 그렇다. 사람들은 술이 끼어들지 않는 놀이를 모른다. 해도 천 원에 손을 벌벌 떤다.
문화 후진국!
그래도 그런 척박한 땅이나마 마니아가 생겼고 그들의 노력으로 다양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종찬과 유만도 그런 마니아의 하나였다.
“좋은 이야기군.”
갑자기 이곳에 없던 생경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모두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는 이 사무실의 창문이었다. 그리고 언제 나타난 건지 창문에 걸터앉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엇!”
“당신은!”
종찬과 유만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창가에 앉아 있는 남자는 바로 장갑맨이었으니까.
“장갑맨이지! 나를 찾았던 거 아냐?”
“그, 그렇습니다.”
“정말 와주시다니.”
종찬과 유만은 놀라움과 고마움이 섞인 표정으로 강민을 바라봤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도 잘 파악이 되질 않았다.
강민은 어깨를 으쓱이고 연유를 말했다.
“이쪽 사업으로도 먹고사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한 방에 전부 길거리에 나앉게 만드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정상참작을 해 주려고 온 셈이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선 종찬과 유만은 감격한 표정으로 감사했다.
강민은 손을 내저었다.
“그런 공치사는 됐어. 비싼 광고를 하면서 창피를 각오하고 사과했으니까. 그걸로 봐 주도록 하지.”
“그렇게 봐 주신다면야…….”
강민은 두 사람 근처로 다가가 물었다.
“그래서, 같이 해 보고 싶다는 사업은 뭐지?”
“물론 지상최강의 증명입니다.”
“그런 거야…….”
강민은 마스크 안쪽에서 실망해 웃었다.
지상최강.
그거야 매력적인 단어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게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강민은 지난 소동으로 전 세계에 충분히 보여줬다.
이제 강민의 강함에 대해 길거리에서 가능한 허세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종찬과 유만도 그런 걸 모르고 지상최강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유만이 얼른 나서서 정말로 무얼 노리고 있는 지상최강인지를 설명했다.
“물론 장갑맨이야 말로 육십억 분의 일이라는 사실은 세계가 모두 공감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지구상의 생물은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그 이상의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남자의 꿈이죠.”
“잠깐.”
강민은 떠오르는 바가 있어서 우선 유만의 말을 멈추게 했다.
“네.”
“설마…….”
강민은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둘을 둘러봤다.
유만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신 모양이군요. 네. 동물과 대결하는 걸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과의 대결을 아예 하지 않을 건 아닙니다. 그냥 하면 너무 차이가 나니까 5:1 정도로 해서 장갑맨의 강함을 과시하는 것이죠.”
“하지만 역시 메인은 인간 외에 강력한 동물과의 대결이 되어야 하겠지요.”
“동물이라…….”
대결 대상으로서의 동물.
이제 사실상 인간 가운데 적수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니 대결 대상이 인간 외로 뻗어 나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어쩐지 강민이 크게 호응하지 않는 모습이자 긴장한 표정으로 우만이 물었다.
“곤란하겠습니까?”
“아니 뭐 싸우는 건 상관없어.”
곰이든 호랑이든 상관없다. 도리어 환영이다. 강민의 상대로 평범한 인간은 역시 손맛이 덜하다. 에이리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러하다. 강한 적을 원한다면 인간 이외를 찾는 것이 분명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동물과 괜히 싸운다니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아주 많을걸.”
강민이 말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동물학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
얼마나 강한지 보이기 위해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야생동물을 끌고 와 싸움을 벌인다니. 이겨도 동물학대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괜찮습니다. 그 문제도 생각해 둔 게 있죠!”
“어떻게?”
“한국에서는 거의 그런 경우가 없지만, 땅이 넓고 자연이 풍요로운 곳에서는 인간이 반드시 강자인 것만은 아닙니다. 곰과 같은 맹수에 의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죠.”
북미와 같은 곳의 자연환경은 광대하다.
그만큼 다양한 동물이 산다.
그리고 그 동물들 가운데서는 때로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것들도 있다. 실제로 매년 적지 않은 미국인이 곰의 밥이 되어 죽는 사고가 벌어진다.
특별히 사냥하려다가 당하는 것이 아니다.
늙어 약해진 맹수가 편하게 잡아먹을 수 있는 인간이란 사냥감을 노리는 것이다.
“아하, 그런 동물을 퇴치한다고.?”
“그렇죠. 어차피 인간 맛을 본 동물은 죽여야 합니다. 동물단체라고 해도 이런 것까지 비판할 순 없을 겁니다. 비판이라면 도리어 사람에게 너무 위험한 짓을 시킨다는 것 정도겠지요.”
유만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지금 말한 경우라면 분명 장갑맨에게 위험함 일을 시킨다는 비난은 있을지언정 동물 학대라곤 못할 것이다. 물론 그래도 동물학대라고 들고 일어나는 자들이 있겠지만 그런 건 무시하면 된다. 그런 극단적 동물보호론자들은 인간보다 동물을 중요시 여기는 꼴통들이라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흠…….”
“어떻습니까?”
“재밌을 것 같긴 한데.”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