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아직 강민은 그 협회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사실 미운 놈들이라 거하게 때려줬을 뿐이라 지금에 와서는 별로 관심거리가 될 만한 이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어진 말은 정말 의외의 것이었다.
“너한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어.”
“그건 기특하군.”
놀란 표정으로 강민은 말했다.
“기특하지. 뻔한 거라고 해도 그런 걸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발표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좀 살살할 걸 그랬나?”
아예 철저히 체면을 바닥에다 깨부수는 수준으로 괴롭혔던 걸 생각하고 강민은 다소 미안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지나갔으니 그런 걸 생각해도 소용없지. 그보다 그걸로 끝이 아냐.”
“뭐? 거기서 더 있어?”
강민은 또 놀랐다.
“그래.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연락해 달라는군. 사죄를 하고 싶다고, 그리고 이야기 했던 것처럼 많은 이들을 돕는 데 함께 힘을 합쳐 보는 건 어떻겠냐는데?”
“좋은 일을 하겠다, 라.”
강민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닌 모습이었다. 흥미를 느낀 듯이 에이리가 강민의 답을 재촉했다.
“어떻게 할 거야?”
“원래라면 무시했겠지만…….”
원래는 분명 그렇다.
현재 강민 정도라면 거의 대부분의 단체와 마음대로 교섭해서 그 ‘좋은 일’ 이란 걸 할 수 있다. 누가 뭐라 해도 한국, 아니 세계 최고의 스타가 바로 장갑맨일 지경이니까.
범죄자란 신분이 문제가 된다는 건 일단 넘어가자.
강민은 에이리에게 물었다.
“거기 상황이 어때?”
“뻔한 거 아냐? 풍비박산이지.”
에이리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댓글 같은 걸로 얻은 정보를 보자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으로 쇠락한 것 같았다.
그것이 강민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특별히 나쁜 자들도 아니었고 하니 구해주는 셈 치고 도와줄까 싶기도 하군.”
“이번에 도와주면 비슷한 방식으로 너한테 도움을 원하는 이들이 어마어마하게 생길걸.”
“그렇겠지.”
“그런데도?”
“이번만 특별로 치지 뭐.”
인과응보라곤 해도 종사자들이 다들 길거리에 나앉게 된 판이다. 얄밉긴 해도 나쁜 짓을 하던 것도 아니었으니 반성하고 좋은 일을 하겠다면 못 도와줄 이유는 없었다.
다만 이런 건 한 번 하고 나면 상업적로 변질되기 매우 쉽다는 게 문제지만 그거야 강민이 알아서 커트해 내면 된다.
“흠…… 그러면 나도?”
관심이 있는 듯 에이리가 물었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결국 그 단체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면 결국 싸움에 대한 것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면 또 통쾌하게 싸울 수 있다!
사실 지난번 싸움 정도로는 에이리의 쌓인 스트레스를 통쾌하게 풀기엔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간에 기별도 안 간달까?
“재밌을 만한 이벤트가 생기면 이야기할게.”
“기대하지.”
강민이 에이리의 생각을 읽고 피식 웃으며 한 말에 에이리는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다시 강민단원이 강민단 기지에 모였다!
MT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학교가 시작하려는 시기쯤이었다. 서울대에 들어가는 건 대체로 성공했다지만 과까지 다들 같은 건 아니라 상황보고와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걸 보고하기 위한 성격도 있었다.
“거기 어때?”
먼저 강민이 물은 것은 지연이었다.
“별거 없었어. 미래의 높으신 분들을 모아놓은 곳이긴 하지만 결국은 학생이니까. 그보다 선배들이 추근대서…….”
애매한 표정으로 지연은 못마땅했던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호호, 지연이는 예쁘니까.”
혜경이 알 만하다는 듯 웃었다.
서울대생이라고 해 봐야 남자는 결국 남자! 우월하기 짝이 없는 지연의 용모를 보고 혹하지 않을 남자는 없는 법이다.
그 칭찬에 창피했던 듯이 지연이 손을 내저었다.
“에, 에이 선배만큼은 아니죠.”
“그럼 너희는?”
강민이 시선을 돌리고 재철 일당에게 물었다.
“여자가 많아!”
“여자가 아주 많아!”
“행복한 사 년이 될 것 같던데!”
신이 난 표정으로 셋은 그렇게 외쳤다.
그들이 들어간 과는 국문과.
대표적인 문과이자 돈이 안 되면 쓰레기 취급하는 덕분에 급속도로 찬밥신세가 되고 있는 학과의 대표주자였다.
그 덕에 점수 커트라인이 많이 낮아진 상태였고, 재철 일당은 점수 맞춰 들어간다고 한글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거기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여자가 많다는 과의 특성으로 인해 도리어 만족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뭐 문과는 그렇지.”
문과는 원래 꽃밭이다.
그러나 남자가 거기서 여친을 구하는 데 성공하느냐 하는 건 다 개인역량에 따라 다를 뿐.
“그리는 너희는? 같은 과잖아?”
이어 재철이 물었다.
그가 지금 지적한 셋이란 강민과, 강석, 호성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들 셋은 모두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대기업 들어가기가 한국인의 숙원이 된 이후로 가장 경쟁률이 높은 곳 중 하나가 된 과!
“뭐, 그냥 별다를 거 있겠냐. 이상한 놈부터 제대로 된 사람까지 다 모여있는 평범한 과지. 이 가운데 미래의 높으신 분이 생겨난다는 정도만 빼면 말이야.”
강민이 별것 없단 투로 말했다.
사실 별거 없기도 했고. 하지만 강민이 말했듯이 지금은 별거 아닌 것처럼 그들이 이후 대한민국의 각종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미래의 높으신 분이라.”
“우리도 그중 한 후보인 건가?”
감탄한 어조로 재철일당이 중얼거리는데 강민은 고개를 끄덕여 동조해 줬다.
“뭐 확언은 못하지만 그럴 가능성 정도야 있는 셈이지.”
“헤헤, 어째 으쓱해지는군.”
“고위 관료의 반 이상이 명문대 출신이라니 말야. 좋은 현상이라 보긴 힘들지만.”
학벌은 정말 뚫기 어려운 벽이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한데 보통은 편견이 아니라 실제 좋은 대학 출신이 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문제가 되는 건 실제 실력이 충분한데도 대학 때문에 잘리는 케이슨데, 사실 많진 않다.
“그러고 보니 강석 너는 의대에 안 갔네?”
수구가 문득 물었다.
강석은 이 가운데서도 가장 공부를 잘해서 의예과도 어렵지 않을 정도였다. 본인도 원하고 있었고.
하지만 결정 내린 것은 어째선지 경영학과였다.
강석은 멋쩍게 답했다.
“아, 의대에 갈까 하다가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강민단?”
상민이 웃으며 묻자 강석은 멋쩍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의대공부는 아무래도 빡세니까.”
의대 공부는 힘들다!
그러니 친구들과의 시간을 만들려면 좀 더 여유 있는 과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호성과 강민이 택한 것과 같은 과에 가게 된 것이다.
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하긴.”
“뭐 이쪽이 부와 명예라는 면에서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도 있어.”
웃으면서 강석이 그리 말했다.
호성이 옆에서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쪽은 현재 운용 자금만 백억이 넘고, 수조에 달하는 지원금도 있단 말야!”
“그렇죠.”
지연이 언제든 말만 하라는 듯 든든한 얼굴로 호성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다고 대단한 콩고물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재철이 투덜거렸다.
실제로 운용하는 자금 규모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단한 금전적 이득을 취한 적은 없다. 그래도 재철 일당은 모두 학비가 공짜니 그것만 해도 적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볼 수 있네? 호성과 지연만 봐도 이거 어마어마한 클럽 아냐?”
혜경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지연과 호성은 대한민국 0.1%에 들어가는 권력의 핵심부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다. 강석이 강민을 향해 외쳤다.
“게다가 장갑맨!”
“으음, 작심하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셈이 될 것 같은데?”
“그러게 말야.”
고개를 끄덕이며 혜경이 말했다. 부와 무력의 결합!
그것은 세계의 역사가 증명하는 최강의 조합이다.
아니, 부와 무력만이 아니다. 장갑맨이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여론의 지지도 얻고 있다. 그러니 돈, 무력, 명분의 삼위일체.
맘만 먹으면 정말 폭풍이 될 수 있는 소규모 집단인 셈이다.
뭐 폭풍이야 맘 안 먹어도 되고 있긴 하지만.
“그렇기도 하군요. 그러니 선배.”
흥미로운 듯 그 이야기를 듣던 강민이 혜경을 바라봤다.
“선배라. 네게 그 말 들으니 기분이 묘한데.”
“좀 부탁해도 되겠어요?”
암시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혜경은 금세 강민이 뭘 말하는지 이해하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동아리를 만들어 달라는 거지?”
“그렇죠.”
“좋아.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일단 내가 대장이 되는 걸로 하지.”
“그게 좋죠.”
일단은 그렇게 학교 생활의 기본 구조가 만들어졌다.
각자 학과 생활도 열심히 하지만 강민단 동아리를 만들어서 지금처럼 학교에서도 꾸준히 모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두는 것이다.
혜경은 하지만 이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결국 서울대에서 모여도 두 사람은 빠지는 셈인가…….”
“저는 일이 있으니 별수 없죠.”
“저는 뭐 신분 문제 같은 것도 있고 하니까요.”
지적의 대상이 된 에이리와 세나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기지가 아예 서울대로 옮겨지다시피 하는 큰 변화인데 두 사람은 거기 참여할 수가 없다. 역시 상당히 아쉬울 수밖에.
“유감인데요.”
“아쉬워라.”
“그러게요.”
강민단원들은 모두들 자기 일처럼 울적해졌다.
강민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말했다.
“뭐 대학생이면 시간은 여유 있는 편이니까 자주 만날 거야.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거야.”
“그러길 바라야지.”
“응.”
강민의 말대로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다들 그렇게 되길 기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뭐 학기 중엔 몰라도 방학이라면 확실히 여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
강민은 경악한 표정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학교 식당. 그의 양옆에는 마찬가지로 경악한 표정을 하고 있는 강석과 호성이 있었다.
강민이 더듬거리며 경악의 이유에게 물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응?”
강민에게 뭘 그리 놀라냐는 듯한 시선을 경악의 이유가 돌렸다.
지금 강민, 강석, 호성이 보고 놀라고 있는 대상은 바로 세나! 오늘 느긋하게 강의실로 들어가 보니 갑자기 세나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정말 놀랐어요.”
“그러게.”
“호호, 놀라게 해 주려고 입 다물고 있던 것뿐이야.”
세 사람의 표정을 보고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세나는 답했다. 세나는 단순히 학교에 찾아온 것이 아니다.
오늘 수업이 시작되면서 교수가 출석을 점검 했을 때, 밝은 목소리로 ‘네.’하고 답했다. 그녀는 그러니 진짜 서울대생으로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강민은 그녀가 어느새 검정고시를 다 해결하고 수능까지 쳐서 대학에 들어왔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