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강민단의 기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 있었다.
고등학생부터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나이까지, 그리고 그 구성원은 남자가 약간 많지만 여자도 충분히 섞여 있어서 화기애애했다.
물론 모두 강민단원들이다.
수능 시험을 마치고 모두 해방된 기분으로 기지에 모여 있는 참이었다. 탁자 위에는 많은 음식과 음료수가 놓여 있었고 단원들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대장인 강민이 선두를 끊었다.
“일단 다 같이.”
그릭 잔을 들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검은빛 황홀한 콜라!
“위하여!”
“위하여!”
다들 잔을 부딪치며 분위기를 냈다.
“술은 없지만 마음껏 마시라구.”
“이제 수능도 쳤는데 술 마셔도 상관없는 거 아냐?”
콜라를 마시면서 아쉬운 표정으로 재철이 불평했다.
사실 재철은 소주를 좋아했고 경험도 몇 차례나 있는 전통 불량학생 출신이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서 술 대신 콜라라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린 민증 검사하면 술 못 마신다고.”
강민은 고개를 저으며 그리 답했다.
“그렇긴 하지만.”
“뭐 그래도 봐준다지 않던가.”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만수가 말했다. 지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대학 들어간 다음의 이야기지. 수능 친 고등학생들 이야기는 아냐.”
“그래도 뭐 다들 그 정도는 하는데 말야. 너는 경찰에게 수배까지 당했으면서 이런 건 이상하게 지키려 한다?”
재철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에 대한 강민의 입장은 확고했다.
“그건 당연하지! 생각을 해 보라고. 내가 법을 어기고 경찰과 적대한 것은 법보다도 위에 있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단 말야. 그런데 여기 이런 사소한 법을 어긴다면 그건 내가 내 사익을 위해 법을 넘어선 게 되지! 그래선 그냥 제멋대로 구는 것일 뿐이지! 그래서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나는 법을 어기는 일은 피할 생각이야.”
당당한 강민의 외침을 듣고 재철은 할 말이 없었다.
“쳇.”
“멋진 말인데.”
“응 그럴듯해.”
다른 강민단원들은 감탄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익을 위해 법 위에 서지 않는다.
오직 공익을 위할 때만 법의 테두리를 넘겠다!
만화에서나 볼법한 멋진 발언인 게 사실이다.
모두들 감탄하는 한편 강민과 함께한 시간이 긴 에이리와 세나는 피식 웃는 얼굴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대화를 나누었다.
“언제 들어도 허세하곤.”
“뭐 영웅 노릇은 쇼맨십이 많이 필요하니까.”
옛날 강민이 생각나서 즐거운 모습이었다.
과거 같이 여행할 때도 강민은 저런 과장된 언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이 많았다. 주먹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세상에는 아주 많았으니까.
혜경이 이쯤 해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싶어 이야기했다.
“그래서 각자 성적은 어때?”
“뭐 저야.”
“저도!”
“이 정도야 여유롭죠.”
차례대로 강석, 호성, 강민의 순서였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저 세 사람이 좋은 성적을 받는다는 건 거의 확정되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혜경은 진중한 안색으로 한쪽을 바라봤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네 사람을 알아보도록 할까.”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재철 일당과 거기 끼어든 이지연!
성적이 다소 불안하여 서울대라는 목표를 달성할지 어느 정도 위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혜경의 시선을 받자마자 반응을 보였다.
“하하.”
“아하하하.”
“아하하.”
“호호호.”
멋쩍은 웃음이란 반응을!
선생님의 진지한 시선을 받으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듯이 대답하기 곤란해하는 네 사람을 보고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설마?”
“아니 나쁘진 않은데…….”
재철이 서둘러 손을 휘둘렀고, 이어서 다른 이들도 변명처럼 말했다.
“잘 쳤다곤 생각해요.”
“그렇지만 목표가 워낙…….”
“그러니 잘 쳤다 정도로는 자신감을 가지기가 어려운 거죠.”
그럴 만도 하다.
목표는 서울대.
고등학생 때 전교 1등 했던 걸 자랑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는 학교!
성적이 아무리 크게 상승했다곤 해도 목표 자체가 워낙 높으니 그런 걸로 자신감을 가지긴 어려웠다.
혜경이 웃으면서 위로했다.
“지연이는 괜찮아.”
“그런가요.”
혜경의 말에 지연은 눈에 띄게 안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내가 가르쳤으니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네가 잘 쳤다고 생각하면 문제없어.”
혜경이 가르쳐 본 바, 지연이 성적이 나빴던 것은 환경이 받쳐주지 못해서일 뿐이었다. 기초는 튼튼했기 때문에 흡수와 응용은 뛰어났다.
거기다 강민이 사용하는 기묘한 학습법을 같이 배우기도 했으니.
지연이라면 충분히 합격한다!
그것이 혜경의 생각이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저, 저희는?”
두려운 안색으로 재철 일당이 물었다.
“너희는…… 호호.”
혜경은 웃음으로 답을 얼버무렸다.
“뭡니까 그 불길한 웃음은?”
“우리만!”
“이건 차별이야!”
발작하는 세 사람을 향해 혜경은 멋쩍은 웃음을 유지한 채 답했다.
“차별은 아니고 그냥 너희들 실력이 뛰어나긴 해도 약간 아슬아슬하다 싶어서.”
“음 저도 동감이에요.”
“학교생활 12년 가운데 11년을 놀고 1년 바짝 공부해서 서울대 간다는 거니 뭐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지.”
혜경의 말에 같이 셋의 학습을 담당했던 강석과 호성이 동조했다.
“그렇긴 해도…….”
옳은 말이긴 해도 자신감을 가지고 싶었던 재철 일당 세 사람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들을 위로하듯 재철 등 뒤에서 강민이 얼굴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괜찮아. 너희들이 재수할 경우를 대비해서 게획은 다 마련되어 있다.”
셋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그게 제일 싫다고!”
“그래!”
“놀고 싶단 말이다.”
셋은 애원처럼 말했다.
재수도 좋다!
봉사 활동도 좋다!
하지만 일 년간 그것만 하라니. 너무 하지 않는가! 본격 군대가 더 나은 생활을 해야 하는 꼴이니까!
그러나 강민은 요지부동. 여전한 웃음과 함께 세 사람에게 고했다.
“그럼 좋은 결과가 나오길 하늘에 빌도록 해라.”
두려운 얼굴로 강민의 말을 세 사람은 받아들였다.
약간 안 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것도 다 지들이 과거 지었던 죄의 대가. 그러니 점수나 잘 나왔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
WWF의 사무실은 황량했다.
지난 사건의 여파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아직 사무실이 남아 있는 게 용할 지경이다. 문을 닫아야 하지 않나 하고 다들 생각했으니까.
실제 비판만이 아니고 경기를 통해 얻는 수익도 하락 일로를 걸어 지금은 과거의 절반 수준!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 사무실에서 아직 버티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이었다.
사장인 종찬과 종업원인 유만이다.
겨우 버티고는 있다지만 역시 겨우일 뿐인 듯, 둘은 모두 죽을상이었다. 그리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 종찬에게 유만이 말을 꺼냈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
멍한 얼굴로 종찬이 유만을 바라보고 말했다.
유만은 과거에도 있었던 같은 경우를 생각하며 울화통을 참고 말했다.
“장갑맨 때문에 망해간다고 아이디어 내놓으라 한 거 사장님 아닙니까.”
“아…… 그런 게 있었지.”
퍼뜩 생각이 난 듯 종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종찬의 태도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전혀 의욕이 없어 보인다고 할까. 유만이 투덜댔다.
“성의가 없으시군요.”
“그렇게 보이냐…….”
“그 마음, 뭐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잘나가던 사업이 이렇게 몰락해 버렸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지은 죄가 있긴 하다지만 역시 쓰라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종찬은 억지로 기운을 내며 유만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어디 그 아이디어를 들어보도록 할까.”
“일단 솔직하게 인정합시다.”
“뭘?”
“장갑맨이 세다는 거요.”
유만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종찬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이제 와서 그걸 인정하고 안 하고 하는 게 중요하냐?”
“그렇긴 한데 또 협회 측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건 아니잖습니까. 괜히 고집부리면 더 창피만 당하는 꼴이잖습니까. 공식적으로 인정하자고요.”
“인정하면 또 뭐가 달라지는데?”
여전히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종찬은 물었다.
이런 프로격투협회는 폭력조직과 많은 특징을 공유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공통점은 폭력을 중요시 여긴다는 것과 체면을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한 번 얕잡히면 선수든 협회든 도장이든 이 바닥에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러니 종찬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유만 역시 그런 걸 모르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현재 한국 WWF는 이미 얕보이고 말고를 뛰어넘어선 수준으로 비웃음을 샀다! 그러니 체면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게 더 나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커다란 장점이 하나 더 있었다.
“장갑맨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게 무슨 말이야.”
두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로 종찬이 물었다.
장갑맨을 끌어들인다니.
성공한다면 물론 대박이다. 하지만 어떻게? 현재의 관계는 최악이라 말해 부족함이 없을 지경이 아닌가.
유만은 찬찬히 설명했다.
“장갑맨이 화낸 이유가 두 가지 아닙니까. 자기 이름으로 장사하면서 자기 욕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단 것과 철저하게 자기 수익만 노린다는 것.”
“그런데?”
“일단 인정해서 장갑맨이 세다고 하고, 정식으로 사과하는 겁니다. 그리고 장갑맨을 초청해서 시합을 벌이는 겁니다. 대신 그 수익의 얼마 정도는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하는 거죠. 장갑맨이 공익을 위해 활동한다고 공언한 이상 망해가는 협회도 반성했으니 살려주고 그러는 겸 사람들도 돕자고 하면 반응이 꼭 나쁘진 않을 수도 있습니다.”
“흠…….”
종찬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지금 유만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긴 한데…… 장갑맨이 받아들일까?”
“아니면 그만인 거죠.”
유만은 담백하게 말했다.
“아니면 그만이긴 하군.”
종찬은 씁쓸하게 인정했다.
무책임한 말 같지만, 실제 협회는 더 잃을 게 없다 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다. 어차피 안 될 거라면 뭔가 발버둥이라도 쳐 보는 것이 훨씬 나은 게 사실이다.
거기까지 합의를 보았지만 논의해야 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 더 있다. 상품성이 좋긴 한데 초반만 반짝 쓸 수 있는 카드란 점이지. 승패가 분명한 경기는 오래갈 수 없어.”
장갑맨은 강하다.
너무할 정도로!
그리고 그 강함 덕에 초반에는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오래 갈 리가 없다. 뻔한 승부를 누가 볼 것인가.
유만은 그 지적이 나올 것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도 있습니다.”
“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