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에이리는 전화를 받았다.
강민의 전화번호여서 반가웠다.
“강민?”
-유감이지만 강민은 아냐.
하지만 돌아온 것은 여자의 목소리.
“너는!”
에이리는 상대가 누구인지 눈치채고 얼굴을 굳혔다.
-나 두고 먼저 가서 보냈던 시간은 즐거웠어?
“그걸 말이라고 해. 아주 행복했지.”
숙적이 결국 여기 온 데 긴장감을 느끼며, 여유를 가장해 에이리는 말했다. 세나는 수화기 너머에서 마주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다면 안 됐는걸! 내가 이렇게 왔으니!
“별로 놀랍진 않아. 올 건 뻔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다른 녀석들이 잘도 너를 보내줬네?”
사실 세나가 여기 오려면 오래 걸릴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안 들켰을 때면 몰라도 에이리가 떠난 다음에는 세나도 떠나려 한다는 게 알려져 있을 텐데, 주변에서 그걸 두고 볼 리가!
-그래. 내가 너랑 달리 머리가 좋아서 다양한 업무에 치이며 살긴 했지.
세나의 답에 에이리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자주 생각하지만 넌 재수 없어.”
세나는 잘난 척을 많이 한다. 짜증나는 건 정말 똑똑하기 때문에 그것에 반박할 수 없다는 점.
그래서 세나는 친구가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특히 많이 먹어도 살 안 찌는 것과 가슴이 큰 것!
에이리의 존재 자체가 세나의 입장에선 스트레스다.
-그리고 니 말처럼 일에 치여서 옴짝달싹도 못했지만 어떻게든 정리하고 여기 오는데 성공했지!
“축하한다.”
심드렁하게 축하.
-고마워.
물론 세나도 심드렁하게 받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돌아와선 개운하게 말했다.
-사실 업무에서 도망친 것만 해도 여기 온 보람은 있는 거 같아.
“음, 이해는 해.”
에이리만 해도 업무에 치여 죽겠다 싶을 정도였다.
열 배는 더 일을 했다 싶은 세나의 경우는 오죽할까.
“그래서 무슨 일이야?”
-여기 왔으니까 너한테 연락을 해야지.
“그것뿐이야?”
숙적이다.
그런 낯간지러운 이유로 굳이 연락하진 않는다.
-그리고 강민이 뭔가 화려하게 하고 있던 모양이던데.
“영웅놀이 중이지.”
-오늘도 그것 때문에 움직였어.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나저나 네가 왔으니 이번 일도 정리되겠군.”
-실은 강민이 나간 것도 그 때문이지.
“그건 잘됐어.”
이지연이 처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제 감옥에 갇힌 듯이 밖에 나오지도 못한 생활을 정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너 혜경이란 여자한테 재밌는 얘기를 한 모양이던데.
“너도 만났어? 괜찮지 않아?”
-뭐 그래. 좋은 사람인 거 같았어.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본인이 별로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의미는 없지. 여긴 우리가 살던 곳관 많이 틀린 모양이던데. 아주 질색을 하더라고.”
-응. 당황해하던걸. 좀 재밌었어.
세나의 말에서는 웃음기가 느껴졌다.
“아아, 잘 나갔으면 미리 편을 짜서 너를 견제하려 했었는데.”
-흥, 쓸데없는 짓을. 넌 애당초 그런 덴 재주도 없잖아.
“사실이긴 한데 직접 그 애길 들으니 화가 나는군.”
에이리는 짜증 난단 표정으로 복수할 만한 말이 없는가 잠시 생각했다. 곧 좋은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아, 맞다. 요리는 하지 마.”
-요, 요리는…… 이전 같은 일은 안 해!
정곡!
수화기 저편에서 세나가 쩔쩔매는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 눈에 선했다.
여유롭게 웃는 얼굴로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은 사람의 만수무강을 위해 그게 최선이지.”
-으으…….
지은 죄가 있느니만큼 에이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리고 이어, 에이리는 말했다.
“그리고, 다시 봐서 반가워.”
-새삼스럽게 뭘.
세나의 답도 곧 돌아왔다.
티격태격 싸우지만 결국 둘은 서로에게 소중한 동료였다.
*
밤.
휘이잉!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곳은 선도그룹의 본사 건물 꼭대기였다.
선도그룹의 본사 건물은 총 층수가 100층이 넘는다. 높이는 300m를 넘어 한국에서 가장 큰 건물 10개 중 하나로 꼽혔다.
아래로 깔린 건물들은 장난감처럼 작았다.
주변의 다른 거대한 기업 본사 건물들 정도만이 비교할 수 있는 크기였다.
지금 강민은 그런 거대한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상태였다.
“높네.”
가마득한 아래 도로의 모습이 보였다.
그야말로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
하지만 강민은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실 강민은 안정 장치 없이 이 높이에서 그냥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겨우 내려다보는 정도로 두려울 리가.
“87층이라.”
강민은 먼저 자신의 목표 층을 확인했다.
거기 이남식이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강민은 아무 안전장치 없이 건물 벽을 타기 시작했다. 선도 그룹의 본사 건물은 유리로 된 건물이다. 손으로 잡을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하지만 강민은 마치 거미가 벽을 타듯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
강민은 그런 능숙한 벽타기 솜씨로 금세 87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 창틀을 잡고 매달린 채 장갑을 벗고 손톱으로 창문을 찍 그었다.
“어라?”
잘 긁히지 않았다.
고층건물의 유리는 깨지면 위험하기 때문에 매우 튼튼한 유리로 만들어 두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민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이럴 때를 대비해 들고 온 칼을 꺼냈다.
그리고 이미 그은 선 위에다 날을 대고 눌렀다.
푹.
두부를 꿰뚫는 것처럼 유리가 관통되고 이후 강민은 손쉽게 유리를 잘랐다.
휘이잉!
한데 들어가자마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기압차로 인해 구멍을 통해 큰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강민은 얼른 준비해 온 비닐봉지와 테이프로 구멍을 막았다. 소리가 사라졌다.
빌딩 내부는 조용해 졌다.
“…….”
이 층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이쯤 되는 건물이면 센서를 통해 관리 감독을 다 하기 마련이다. 그걸 피해서 이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건 어쩔 수 없지.’
강민은 혀를 차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호성을 통해 얻은 건물 지도가 있어서 회장실 위치는 다 외우고 있었다. 강민은 재빨리 달렸다.
삐!
삐!
여기저기서 요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강민이 달리는 걸 센서가 포착한 것이다.
경비실의 대원들이 크게 놀랐고, 그들은 서둘러 사람을 보내는 한편 경찰에 연락을 했다. 그러는 동안 강민은 이미 이남식의 방 문 앞.
쾅!
구질구질하게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이왕 들킨 거 화끈하게 주먹을 휘둘러 문을 열었다. 나무로 된 문이 허무하게 박살나며 안이 드러났다.
최고급 탁자부터 시작해 돈을 덕지덕지 바른 듯한 물건들이 아주 많았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이남식이 사용하던 것일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강민은 얼른 이남식이 사용하던 물건일 법한 것들을 선별했다.
펜과 수첩 같은 것들을 가장 먼저 챙겼다. 이후 그는 각종 도구로 보이는 것을 손에 넣었다.
그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수 분.
하지만 그사이 이미 비어 있던 87층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기다!”
“놓치지 마!”
우르르 몰려오는 듯한 발소리에 코웃음 치고 챙길 것을 다 챙긴 강민은 서둘러 방을 떠났다. 그리고 복도를 어느 정도 지나갔을 때 한 무리 경비병과 조우했다.
“악!”
“으악!”
장갑맨을 쫓아 달려오곤 있었지만, 그의 힘에 대해서는 전 국민이 다 안다.
정면에서 상대해야 한다면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다. 강민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경비병들 사이로 파고 들어가 연달아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퍽퍽!
고기 치는 소리가 나더니 경비병들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털썩 소리가 나며 모두 바닥에 쓰러져선 일어나지 않았다.
“푹 쉬라고.”
가볍게 한 마디 던지고 강민은 들어 왔던 곳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이후로도 두 번 정도 경비병들과 충돌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강민의 주먹에 얻어맞고 쓰러졌으니까.
시간 벌이조차 되지 않았다.
곧 강민은 자신이 뚫었던 구멍 앞에 도착했고 그는 거기로 몸을 던졌다.
“억!”
“말도 안 돼!”
“죽을 생각인가!”
“잡아!”
그 자리에 있던 경비병들은 저마다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그들 중 몇 명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앗!”
“괴물!”
이어 그들은 저마다 경악해 외쳤다.
장갑맨이 유리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철틀의 얼마 되지 않은 틈을 붙잡아 타고서는 빌딩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미끄러져’ 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수백 미터 아래로 금세 강민의 모습은 사라졌다.
***
강민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야?”
“그래. 괜찮지?”
강민의 옆에서 세나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방은 혜경과 함께 세나가 고른 한국에서의 거처였다. 사실 세나는 강민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싶었지만 역시 그건 무리였다.
“비쌀 것 같은데.”
강민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평수는 50이 넘었고, 층수도 높아서 전망이 아주 좋았다. 서울 노른자위는 아니지만 이 정도 되면 비쌀 수밖에 없다.
“몰라. 월세 250 정도라는데!”
“헉!”
세나의 답에 경악했다.
250!
어지간한 한국 성인 남성의 한 달 벌이에 준하는 거금!
아주 비싼 집이었다.
세나는 여유롭게 말했다.
“문제없지 않아?”
“물론 내주는 거야 문제없지만…….”
강민은 한 달 이자만 천만 원 가까이 얻고 있다.
이런 집이라고 해도 물론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지구에 돌아와서 검소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갑자기 과소비를 하려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휴가 와서 스트레스 받으면 온 보람이 없지. 그리고 이 정도면 아껴 쓰는 거지!”
세나는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니가 원래 살던 데와 비교하면 그야 그렇지만…….”
세나는 대현자고 권력자다.
그녀의 살던 집은 대저택!
부리던 인간의 숫자는 수백!
어떤 사치스러운 생활도 물론 원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세나는 많이 참고 있는 것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