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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져서 놀러왔다-106화 (106/227)

106화

딩동.

끼익.

초인종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조심스레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 것은 이지연이었다.

“안녕하세요.”

환한 얼굴로 이지연에게 인사한 남자는 재철이다.

그는 이지연의 부탁을 받아 쇼핑을 잔뜩 해서 가지고 온 참이었다. 이지연은 재철이 내미는 비닐봉지를 힘들여 받아 집 안에 넣고는 미안한 듯 말했다.

“항상 죄송합니다.”

“이런 건 뭐 당연한 거지요.”

“저, 커피라도 한 잔 탈 테니 쉬었다 가실래요?”

“아니. 괜찮습니다.”

재철은 사양했다.

모녀만 있는 곳인 데다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닌데 안에 들어가 봐야 어색하기만 할 뿐이다. 재철은 자신의 거절에 미안해하는 지연에게 이어 말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요?”

좁은 곳에 갇혀 지내면 변화를 갈망하게 된다.

이지연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재철을 바라봤다.

“강민이 곧 이번 일을 끝낼 수 있을 거라고 하네요.”

“정말요?”

이지연은 재철이 예상했던 것처럼 크게 기뻐했다.

“저는 잘 모르지만, 강민이 그렇게 말했으니 확실하지 않을까요.”

“아아…….”

“그러면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지연을 뒤로하고 재철은 지연의 집을 떠나왔다. 이후 인도를 걸으면서 재철은 지연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참 이쁘단 말야.’

강민의 곁에는 더한 미녀들이 있긴 하지만 지연 정도만 해도 정말 대단한 미인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길을 가던 도중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거기 학생.”

“네?”

재철은 멈춰 서서 자기를 부른 사람을 봤다.

선량한 인상의 남자였다.

“여기 사나?”

“아니요.”

즉각 솔직히 답했다.

“그래? 그럼 실례했네.”

남자는 아쉬운 얼굴을 하고 멀어지더니 주변의 다른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다가가 말을 붙였다. 재철은 그 자리에 서서 잠시 그를 바라봤다.

“흐음.”

남자를 향한 재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수상한데.”

평범하게 길을 묻는 것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

세나와 혜경은 같이 커피점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같이 세나가 살 집을 찾았다. 그러는 한편 헤경은 세나에게 도시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이것저것 가르쳐 줬다.

혜경은 쉽게 지식을 받아들였고 때때로 날카로운 질문을 해 혜경을 난처하게 했다.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대단한 지성이 느껴진다고 할까.

주문한 커피를 홀짝 마신 다음 세나는 인사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이런 걸로 뭘요.”

이미 강민단의 일원이기도 하니 이 정도는 대단할 것도 없다는 게 혜경의 생각이었다. 사실 강민이 굳이 얼마라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선물 같은 것으로 충분히 사례도 한다.

“강민 선생님이시라면서요?”

“네. 과외를 하고 있어요.”

세나는 과외가 뭔진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이라면 강민을 가르친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일 테니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강민이 좀 바본데.”

강민이 들었다면 ‘세상에 너와 비교해 바보가 아닌 인간이 몇이나 된다고!’라고 분노했을 것이다. 하여간 혜경은 지금 세나의 말이 무척 의외였다.

“네? 굉장히 잘 따라오던데요.”

혜경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강민은 과외생활 하면서 거의 만나기 힘든 뛰어난 학생이라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 그럼 치사한 짓을 하고 있군요.”

세나는 강민이 틀림없이 마법을 사용해서 공부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리 말했다. 물론 이 역시 혜경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말이다.

“치사한 짓?”

“그런 게 있어요.”

세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궁금증만 깊어지는 답이었다.

“그런데 세나 양은 어디 출신인가요?”

“응…… 에이리하고 같은 곳이라고 해 두세요.”

“해 두세요?”

“별로 말하지 싶지 않단 뜻이죠.”

혜경은 미간을 찡그렸다.

처음부터 그렇긴 했지만, 강민을 비롯해서 이 세 사람은 비밀이 너무 많다!

“그, 그렇군요.”

“에이리하고 친하게 지내신다면서요.”

계속 화제가 여기 머무는 것을 피하려고 세나는 얼른 물었다.

혜경은 약간 쑥스럽게 답했다.

“친하다고 할까…… 한국에 와서 아는 사람도 없으니 말동무가 되어 주거나 하는 정도죠.”

“그거면 충분히 친하다고 할 만하죠.”

“그럴까요.”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도 그렇지만 에이리도 또래의 여성들과 마음 편하게 이야기하거나 한 경험은 거의 없다.

동년배들 사이에서 워낙 특별한 존재인 것도 있고, 권력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여자라는 것만으로도 에이리와 세나에게 혜경은 귀중한 대상이다.

“에이리한테 다른 이야기는 들은 게 없나요?”

“네?”

세나는 장난스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강민에 대해서라던가.”

“왜 그런 질문을?”

혜경은 당황하며 반문했다.

“많이 놀라는 것 같아서요.”

“놀란 거야 다른 아이들도…….”

세나는 의미심장하게 혜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 같았거든요.”

‘눈치가 귀신!’

혜경은 놀란 눈동자로 세나를 바라봤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다들 놀라는 와중에 자기 표정을 보고 속마음을 눈치챘단 말인가.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눈치가 빠르단 이야기는 자주 들어요.”

역시 눈치가 귀신이었다.

별로 능숙하지도 않은 거짓말을 해 봐야 소용없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혜경은 솔직히 답했다.

“네. 사실은 그랬어요. 에이리 양한테 강민 군이 여러 여자랑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그걸 전혀 잘못된 거로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거든요.”

“아아. 그랬군요.”

“그런데 세나 양이 나타나선 그게 정말이라고 이야기 해 버리니 대체 뭐가 뭔지…….”

푸념하는 것처럼 혜경은 말했다.

그러면서 세나를 바라봤다. 보통 상식을 가진 한국인이라면 경악해 마지않을 이야기인데 에이리가 그랬던 것처럼 세나도 전혀 꺼리거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 계집애 한 말이 맞아요.”

심지어 긍정하기까지!

“대체 어째서 그런 게 가능하죠?”

못 참고 혜경은 따지는 것처럼 물었다.

세나는 잠시 고소를 짓다가 답했다.

“그건 좀 설명하기 곤란한데…… 하여간 강민은 그게 가능한 위치에 있어요.”

“네? 대단한 부자도 아닌데…….”

장갑맨이긴 하지만.

어쨌건 현대에 여러 여자를 한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보통 외모와 말주변, 아니면 부에서 대단한 우위에 있는 경우다.

최소한 한국은 그렇다.

“그런 것보다 좀 특수한 거죠.”

“그런가요…….”

세나는 이어 말했다.

“근데 여기라고 별로 다를 것 같진 않은데요. 남자가 어디나 다 비슷하지.”

“그래도 대놓고 그러진 못 해요. 특히 결혼은 꼭 한 사람하고만 해야 하고. 대놓고 그런 일을 하면 사람들이 크게 비난하기 마련이죠.”

세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별 의미는 없어 보이는군요. 결혼만 안 하면 여자든 남자든 여러 상대를 동시에 만나는 게 가능하단 거니까.”

“그러면 상대가 화내요.”

혜경은 반발했다.

세나는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는 처음부터 알던 거니 상관없지 않아요?”

“그,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말하는 투를 보면 마치 대단히 특수한 문화권에서 최근 건너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외국인이니 그야 그럴 수도 있지만…… 최소한 강민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어쨌건 에이리가 그런 말을 했던 걸 보면 혜경 양이 많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에요.”

“하하…….”

“저도 오늘 같이 행동해 보니 좋은 분이란 건 알 수 있었어요.”

“좋게 봐 주시니…… 고마워요.”

여자로서 같은 여자에게 칭찬을 듣자니 그것도 좀 쑥스러운 기분이 됐다.

세나는 이어 혜경을 의미심장하게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에이리가 했다는 건 강민에 대해서도 좀 흥미가 있었던 거죠?”

“그, 그건…… 무슨…….”

혜경은 커피를 마시고 있지 않던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영화나 만화에서처럼 놀라 뿜어냈을지도 모르니까!

세나는 웃으면서 계속 추궁했다.

“에이, 쑥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니, 아직 어린애고…….”

붉어진 얼굴로 부정!

“나이 차이는 둘이 세 살밖에 안 난다면서요?”

강민이 고2, 혜경이 대2니까 많이 잡아봐야 3살 정도 차이인 건 사실이다. 다만 실체 차이야 어쨌든 대학생과 고등학생이라면 그 이상의 차이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여러 여자와 사귀는 걸 당연시한다는데…….”

끝까지 아닌 척하지만 세나는 충분히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관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급변하게 되어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거예요. 저하고 에이리가 그거 고친다고 힘이 많이 들었죠. 근데 탓하기만도 힘든 게, 그런 게 흠이 되는 환경은 아니었거든요.”

“대체 어째서…….”

붉어진 얼굴로 혜경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지금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세나는 쉽게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왜 나한테 그런 얘길 하고 있느냐는 것!

“호호, 관심 있다면 나나 에이리 때문에 뺄 필요는 없다고요. 그걸 알려주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관대해요?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랑 놀아나면 막 화가 날 텐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신기해서 물어봤다.

“말했듯 그게 당연한 입장이란 것이 우선 크겠죠. 또 의외로 잘하는 것도 있고.”

“아.”

잘 해주는 부분이 있다는 것에 공감해서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은 자상한 구석이 있다.

어쩌면 지금 지연이라는 소녀를 돕는 것도 그런 자상한 구석 때문인지도 모른다. 능력도 있고, 까칠해 보이면서도 잘 챙겨준다면 많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타입이긴 했다.

“그리고 뭐 괜히 막으려 들다가 누군지도 모를 이상한 여자가 중간에 끼어들게 되거나 하는 것도 피곤하니, 그 전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인정하는 게 훨씬 편하다는 것도 있어요.”

“네에…….”

씨익 웃으면서 어떠냐는 듯 세나가 하는 말에 혜경은 어떤 말을 돌리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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