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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져서 놀러왔다-98화 (98/227)

98화

“그런 거라면 알겠습니다.”

다음 달이면 일정도 괜찮아서 에이리는 이내 승낙했다.

-정말 아쉽군요. 조금만 진지하게 하면 세계적인 모델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건데…….

편집장은 아쉽게 말했다.

“옷 입는 건 좋아해요. 그런 옷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좋다고 여기고요. 하지만 유명해지는 건 별로 원하지 않는 거죠.”

재밌는 옷을 입고 여성적인 매력을 드러내 보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 원래 세계에서 에이리는 아름답다는 평가는 받았지만, 그보다도 강력한 여전사라는 이미지가 훨씬 강했기 때문에 이런 여성스러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러나 그녀는 결국 외국인.

신분이 안정적이지 않다. 강민을 위해서도 자기를 위해서도 이름이 너무 멀리까지 팔릴 만한 건 피해야 했다. 아니, 장갑맨처럼 유명해져도 진짜 정체는 드러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정말 특이하군요.

“가명을 만들고 얼굴을 가린 채 활동하는 거라면 많이 할 생각이 있어요. 그런 건 언제든 소개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전위적인 패션쇼에서라면 그런 조건의 모델을 구하는 일도 드물지 않으니 상관없겠다 생각하며 편집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으며 역시 아깝다 싶었다.

물론 이 일을 하는 건 전적으로 에이리만을 위해서는 아니고 연결해 주면 그만큼 그에게도 돈이 떨어지긴 하지만 말이다.

특히 에이리는 유명세를 싫어하는 만큼 맥심의 편집장 이외 사람들과는 이야기하는 걸 피하는 편이라 그녀를 모델로 내세우고 마음에 든 디자이너는 맥심의 편집장을 통해서만 에이리와 연락 할 수 있었다.

에이리가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전화가 왔다. 강민의 전화여서 에이리는 반갑게 받았다.

“강민?”

-아, 어때?

“할 만해. 신기한 건물이나 음식도 많고.”

즐거운 듯 말하던 그녀는 이내 우스운 듯 피식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한국이 꼭 고향 같은데? 사실 나한테는 한국도 여전히 신기한 곳인데 말야.”

-하하, 일이 마음에 든 모양이야?

“그럼. 내 능력을 살려 일할 수 있는 데다 많은 걸 구경할 수도 있고. 음식도 많이 먹고. 멋진 일 아냐?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하지만, 이런말 하긴 미안하지만, 지구에서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고 해 봐야…….”

에이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능력은 너무 초월적이라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는 말이 사실 의미가 없을 지경이다. 총 정도는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유럽으로 총기 문제에서 자유롭다.

미국이라면 다소 긴장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그렇지. 지구인의 능력 같은 건 너에 비하면 어린애만도 못하니까.

“그렇긴 한데, 그중에서도 제법 쓸 만한 사람은 있는 거 같아.”

-그래?

에이리가 갑자기 칭찬하는 말을 꺼내니 강민도 흥미를 느꼈다.

“응, 공항에서 살짝 스쳤는데 제법 강해 보이는 자들이 몇 있던걸.”

-호오. 흥미로운데.

에이리가 칭찬했을 정도면 정말 보기 힘든 실력을 갖춘 자들이란 말이다. 거의 인류 최강이라 칭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스쳤을 뿐인걸. 너하고 만날 일이 뭐 있겠어.”

-뭐 혹시 모르는 일이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강민도 에이리가 말하는 이들과 조우하리란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한국의 인구만 사천만이 넘는다. 그런데 그들 중 누군가를 우연히 만난다는 건 로또 일 등 당첨 이상의 우연이다.

“그리고 만나 봐야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거라고. 어린아이 괴롭히는 꼴이야. 괜한 관심 가지지 마.”

에이리는 이어 말했다.

에이리 본인도 그렇지만 강민의 입장에도 스쳐 지나갔던 이들의 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워낙 지구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약하니까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정도지.

-쳇.

“무슨 용무로 전화한 거야?”

-결말의 때가 됐다 싶어서.

의미심장하게 강민이 한 말에 에이리의 두 눈이 커졌다. 결말의 때, 그것은 이제 강민이 이남식을 잡기 위해 움직이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뭐? 벌써?”

-영동파 해체의 배후에 내가 있다는 건 조사해 보면 뻔한 거라서 몸을 사릴 줄 알았는데, 선도 파크 준공식 때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군. 그때 승부를 내려고.

에이리는 조심스러운 표정이 되어 말했다.

“흠…… 함정일 수도 있겠는데.”

선도 그룹이 들은 대로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확실히 자기 자신을 미끼로 내밀고 강민을 낚으려 수작을 부리는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강민은 어디까지 여유로웠다.

-생각 안 한 건 아냐. 하지만 군대를 동원한 게 아닌 이상 그런 게 의미가 있겠어?

“하긴, 여기 사람들은 아직 너와 나에 대해 너무 모르지.”

에이리는 그것도 그렇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도 장갑맨의 육체적 능력은 장정 수십을 상대할 수 있다는 정도에서 설왕설래 되고 있다. 그것만 해도 현대인에게는 믿을 수 없는 힘이다.

하지만 강민의 진짜 힘은 그 정도가 아니다.

강철도 진흙처럼 주물럭거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이 그에게는 있다. 그리고 강민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강민을 막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잘될 거야.

“그래. 하지만 내가 도울 수 없다는 건 아쉬운데.”

에이리는 한숨을 쉬었다.

-하하, 내 무용담을 기대하라고.

“기다리지.”

-선물도 좀 사와.

잊지 않고 강민은 부탁했다.

비록 지구의 원주민이라고는 하나 안타깝게도 제반 사정 상 여행은 에이리보다도 강민이 경험이 훨씬 적을 정도니까.

“찾아볼게.”

에이리는 여유롭게 답했다.

*

준공식 날이 되었다.

광대한 부지가 마련되었고, 공사를 위한 자재와 각종 건설 장비들이 그 부지에 들어섰다. 아직 작업이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오늘부터 공사가 시작될 것이다.

투입된 공사자금만 조 단위에 이르는 거대한 사업!

대한민국의 미래 놀이문화를 장악하게 되리라 일컬어지는 거대 테마파크의 탄생이었다. 그런 공사의 전이니만큼 여러 가지 행사가 이루어졌다. 연단에 올라가 공사의 관계자 여럿이 나가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것을 초청받은 이들이 자리에 앉아 들었다.

그들의 반 정도는 선도건설의 직원과 그들 가족이었지만 정치인이나 지역의 행정 관료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주민들도 있었다.

강민은 그들 가운데 몰래 참석해 있었다.

특별한 변장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이라는 사실 자체가 무엇보다 훌륭한 연막탄이 되어줄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지루하군…….’

나름대로 지역 주민의 호응을 얻기 위한 행사이기도 하다고 들었는데 여기 올 때 수건을 하나 얻은 것 외에는 전혀 재밌는 부분이 없었다.

이래서야 주민 호응을 정말 얻으려는지 의문일 정도.

하긴 공사 초기부터 정치권에만 신경 썼을 뿐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도 그냥 명목상일 뿐이지.

어쨌건 당장 집중해야 하는 것은 이남식이지 이런 행사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 준공식을 맞이해 저희 선도 그룹 이남식 회장께서 직접 한 말씀 드리기로 했습니다.”

모두 약간 놀란 얼굴이 되어서 열렬한 박수를 쳐서 그를 환영했다. 반응을 보니 이남식이 오늘 준공식에 참여할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던 눈치였다.

강민은 이런 걸 잘도 알아낸 호성의 정보력에 감탄하며 식장을 떠날 준비를 했다.

시간은 많지 않다.

늦어도 연설을 하는 동안 옷을 다 갈아입고, 장갑맨이 될 준비를 끝마친 다음 이남식을 급습, 납치하는 데 성공해야 했다.

곧 이남식이 연단에 올라왔다. 친절하고 환한 표정을 한 중년의 남자였다. 하지만 강민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의 진정한 정체가 뱀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렇게 친절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으나, 언제든지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는 잔혹한 뱀. 아니다. 도리어 저 친근한 얼굴이야 말로 무기다.

“이 자리에 와 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그는 박수를 받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 건도 그룹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문화를 세계적으로 이끌어 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강민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기획에서 시작되어 저희 그룹은 다방면의 사업을 벌였습니다. 극장, 출판 부문의 사업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그런 여러 사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테마파크 사업이었지요. 현재까지 저희 선도 테마파크는 경남지역의 놀이문화를 주도해 왔고, 이번 테마파크의 완공으로 수도권에서도 같은 위치를 점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강민은 어떤 짓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다들 알고 있는데 착한 척 구는 것이 짜증 난다 여기며 식장을 벗어나 어서 장갑맨이 되어야 하겠다 여겼다.

그러나 눈에 띄어선 곤란하니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중요했다.

‘흠?’

길을 가던 중에 이남진의 주변에 네 사람의 경호원이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을 보는 순간 강민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저거, 상당한데.’

예리한 칼날 같은 기세가 네 사람에게서 느껴졌다. 혹시 에이리가 공항에서 스쳐 지나갔다는 게 저들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 그래 봤자지만.”

강민은 코웃음을 쳤다.

결국 그들은 평범한 지구인.

더 마그누스의 이명을 지닌 강민을 어쩐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

이남식의 축하연설이 끝날 때가 되었다.

“그러면 여러분 모두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박수를 쳤다.

이남식은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연단에서 내려왔다. 경호원들과 함께 비서가 다가왔다. 비사를 향해 이남식이 물었다.

“다음은 어디지?”

“사장단 회의가 있습니다.”

깍듯한 대답을 듣고 이남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주차장을 향해 움직였다. 그들 뒤를 그림자에 숨어 쫓아 움직이는 이가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차 앞에 도착해서, 갑자기 이남식을 경호하고 있던 이가 홱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강민이 그들을 따르고 있던 쪽이었다.

하지만 강민은 이미 없었다. 그는 주변 다른 차의 아래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와.’

강민은 감탄했다.

자신의 기척을 읽어낼 줄이야!

크게 주의하지 않았다곤 해도 아직 어둡지 않은 환경에서 장갑맨 차림을 하고 사람들 뒤를 쫓는 것이다. 혹시 모를 시선을 위해서라도 기척을 철저하게 숨기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하는 건 중요했다.

그 정도만으로도 현재 강민은 의태하는 벌레들보다도 철저하게 몸을 숨기고 있는 수준이다. 눈앞에서 그를 보지 않고서는 그가 있다는 걸 발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런데 발견했으니 놀랄 수밖에.

“음…….”

이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 강민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이남식이 물었다.

“왜 그러나?”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누가 있다는 건가?”

이남식이 찡그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남식은 저명인사고, 현재도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화제가 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때문에 많은 언론이 그를 노리고 있다. 미행당하고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의 답에 이남식은 반문했다.

“그랬던 것 같다고?”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군요.”

이런 일은 거의 없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해서 이는 직접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겨 누가 있는가를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기이한 일이지만, 역시 착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이남식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가.”

이남식은 보고에 안심하고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의 경호원을 비롯해서 비서들도 다들 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다 올라탄 다음 이남식은 기사에게 곧장 명령했다.

“출발해.”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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