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뭐 사실 잘 풀리면 강민이 지금 가지고 있는 돈조차 푼돈 취급을 하게 되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겠지만.
“어머니는요?”
“약을 꾸준히 드시면서 조금씩 괜찮아지셨어요.”
“다행입니다.”
이어 강민은 지연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어머니하고 독대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말씀 좀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강민이 오늘 이곳에 찾아온 이유였다.
“이야기 해 볼게요.”
“부탁합니다.”
이지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머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곧 이지연이 방에서 빠져나왔다.
“들어오시래요.”
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연의 어머니가 계시는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지연의 어머니가 초췌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킨 채 어렵게 앉아 있었다.
강민은 우선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드리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도와주시는데 인사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지연의 어머니는 지극히 공손하게 강민에게 마주 인사했다. 자기 딸과 동갑쯤 되는 어린 아이에게 이렇게 예의를 차리는 것은 거부감이 들 법도 하건만 그러지 않았다.
강민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편찮으시기도 하니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강민은 편찮은 분을 데리고 오래 이야기 하는 것도 올바른 일은 아니다 싶어 얼른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어머니께선 과거의 스타, 장혜선 씨가 아닙니까?”
“…….”
지연의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답을 얻기엔 충분한 반응이었다.
“역시 맞군요.”
“꺼내 이야기할 만한 과거는 아닙니다.”
한숨을 쉬며 장헤선은 말했다.
지금 그 말에서 그녀가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 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아픔을 들추어낸다는 것 때문에 망설일 만할 때가 아니다.
“아픔이 있으시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때문에 현재 두 분 모두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저 아이를 노리는 놈들이 나타난 이유가…….”
놀란 모습으로 장혜선이 말했고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도그룹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피가 섞인 가족인데 어떻게 그런…….”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 되어 장혜선이 중얼거렸다.
“욕심은 쉽게 사람을 타락시키기 마련이죠.”
그 말을 하고서 강민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민은 장혜선의 놀람이 진정되길 기다리는 것이다.
몇 번 숨을 고른 다음에야 장혜선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머님이 장혜선이고, 이지연 양이 선도그룹의 전 회장 손녀라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믿고 기다려 주세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환하게 웃으며 강민은 말했다. 그 웃음이 믿음직스러웠던 듯이 장혜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딸아이가 죽어야 했을 걸 지금까지 산 것도 학생의 덕분인걸요.”
신뢰를 담은 웃음을 돌리며 장혜선이 말했다.
그녀의 표정을 뒤로하고 강민은 밖으로 나왔다. 그가 떠나려는 기색을 눈치채고 지연은 아쉽게 말했다.
“가시나요?”
“네. 괜한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고개를 얼른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저기, 좀 더 자주 오셔도 괜찮은데.”
“그렇게 하겠습니다.”湖
이지연의 그러는 모습을 귀여운 듯 바라보고 강민은 밖으로 나왔다. 강민이 나간 다음, 이지연은 강민이 나간 문을 아쉽게 바라봤다.
***
대기실로 들어온 뷰티걸의 멤버 하나가 한숨을 길게 쉬며 탁자 위에 상체를 늘어트렸다.
“힘들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다른 멤버들도 저마다 고충을 토로했다.
“응. 쉬고 싶어.”
“피곤해라.”
“졸려.”
지금 뷰티걸은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를 마치고 대기실에 돌아온 참이었다.
방금 그녀들이 올라갔던 무대는 한 공중파 방송의 가요 프로그램이었다. 최근 뷰티걸은 한층 인기를 몰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인기투표에서 1위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저마다 피곤해 한숨을 쉬던 중 한 멤버가 수란을 바라보며 부러운 듯이 말했다.
“그런데 넌 요즘 왜 그렇게 노래를 잘해?”
“잘하는 것 같아?”
쉬고 있던 수란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물었던 멤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부러울 정돈데.”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수란 곁에 있던 멤버가 놀리듯이 말했다.
“요새 니가 노래 부르는 것만 따로 잘라서 올려놓는 팬들도 있는 거 알아?”
“그런 건 전부터 있던 거 아냐?”
수란이 의아하게 물었다.
걸그룹이라고 해도 팬들은 어떤 멤버는 더 좋아하고 어떤 멤버는 덜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콘서트 같은 걸 잘라 촬영해 인터넷에 올려놓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특히 인기가 있는 것은 섹시한 차림이나 춤을 출 때였다. 뷰티걸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니었다.
말했던 멤버가 삐진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비주얼 때문이었고, 요즘 네 경우엔 노래 때문이란 말야.”
최근 뷰티걸에 관련해서 동영상이 올라오는 경우 수란의 노래 실력이 부쩍 늘어 노래 자체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이 확실히 많았다.
이제까지 그런 개인 촬영 영상이나, 방송 방영 분량을 잘라 올려놓는 것들과는 달랐다.
“그, 그래?”
수란은 당황해 답했다. 하지만 살짝 기분이 좋았다.
“질투 나게!”
“그래. 요즘 따로 보컬 트레이닝 받더니 그거 덕분 아냐?”
“그, 그게.”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멤버 중 하나가 말했다.
사실이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강민과 보컬 트레이닝 받는 것은 비밀이다. 알려지면 크게 화제가 될 내용이니 강민이 그게 널리 퍼지는 걸 용납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보컬 트레이닝을 받는다는 자체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시간을 적게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같은 멤버에게 그런 일을 숨기고 활동하긴 어려웠다.
그때 또 다른 멤버가 나섰다.
“얘는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며칠 훈련받았다고 그렇게 좋아져. 정말 그런 거 있으면 세상 가수들이 줄을 서고 받으려 할 거야. 우리 정도는 일 년 전에 예약해도 안 될걸.”
“그것도 그렇네~.”
사실 그게 상식적인 내용이어서 먼저 의혹을 제기했던 멤버가 알아서 납득하고 물러났다.
“하여간 부럽다.”
“응. 가창력이 있으면 시간이 지나도 계속 활동하기 좋잖아.”
“솔로도 되고.”
다른 멤버들이 계속해서 부러움을 토로했다.
걸그룹 멤버 최대의 고민은 그 수명이 짧다는 것이다. 모든 영화가 영원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유독 걸그룹이 그런 것은 판매상품이 사실 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래는 장식이고 진짜 파는 것은 얼굴과 몸매다.
그런 만큼 나이가 들어 몸매가 못해지고, 얼굴이 추해지면 매력도 떨어진다.
사실 어리다는 것 자체도 영계에 대한 한국인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해서 인기를 얻는 중요한 요소라 나이를 먹으면 예쁘더라도 인기가 떨어지는 경우는 허다하다.
하지만 노래를 잘하면 다르다. 노래에 반한 팬은 계속 팬이 되고, 늙더라도 그 매력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한철 연예인 노릇으로 끝나는 걸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승승장구하는 걸그룹이라 해도 이런 고민에서 자유로울수는 없어서, 다들 이 문제에 민감했다. 수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른 말했다.
“무슨 말이야. 우리는 영원히 같이할 거 아냐?”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계집애, 이쁜 소리 하긴.”
다른 멤버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기쁘게 수란의 말을 받아들였다.
***
곧 12월이 된다.
날은 많이 추워졌고, 학교는 기말 시험에 대한 긴장 때문에 낮아진 기온이 더욱 잘 느껴졌다. 점심시간이 되어 급식이 왔고 다들 식사를 마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강민은 재철 일당과 함께 잡담하며 시간을 보냈다.
강민이 있는 반으로 호성이 왔다.
“강민!”▒
“응?”
호성은 강민이 재철 일당과 함께 앉아 있는 책상으로 와 같이 착석하고는 말했다.
“기쁜 소식이야.”
“아, 찾았어?”
단번에 지금 호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지를 눈치채고 강민은 반갑게 물었다. 호성은 기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찾았다고 하기 보단 일정을 알아낸 거지.”
“뭐 그게 그거지. 그래서?”
“이번에 선도그룹에서 커다란 테마파크 만드는 거 알아?”
“……아, 들어본 것 같은데.”
선도그룹에서는 수도권에 테마파크를 하나 만들 예정이 있었다.
이것이 부지 선정 때문에 여러모로 소란이 많았는데 강력한 정치권과의 연줄 덕분에 결국 건설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부지의 원래 용도와 주변 영향을 생각하면 허가가 떨어져선 안 될 땅이었는데 허가가 떨어졌다 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이미 허가가 떨어지고 어마어마한 돈이 움직였다. 그런 비판 따위로는 이미 움직인 돈을 멈출 수 없었다.
호성은 말했다.
“이번 주말에 그 준공식이 열리거든. 참여할 예정이라고 해.”
“호, 그러니까 거기 가면 이남식을 만날 수 있다는 거군?”
눈을 빛내며 강민이 묻자 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좋아. 아주 도움이 되는 정보였어.”
“어떻게 할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재철이 흥미진진한 듯 물었다.
“뭐 그건 두고 보면 알 거야.”
기대하라는 듯 씩 웃고는 강민은 말했다.
그 자리에 있는 강민단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주말을 기대했다. 또 대한민국이 장갑맨 덕분에 다 뒤집어지리라 생각하면 그 일원된 입장으로 역시 즐거웠다.
오죽하면 신문과 연이 없던 재철이 장갑맨 뉴스를 찾느라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뉴스란을 흥미진진하게 뒤질까.
***
에이리는 전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일이 바빠서요.”
-그러지 말고 어떻게 일정을 잡을 수 없겠습니까? 꼭 좀 광고 모델로 채용하고 싶다는 분들이 많은데…….
에이리가 지금 대화 중인 상대는 맥심의 편집장.
한번 모델의 길에 에이리를 끌어들인 이후, 마치 전속 모델인 것처럼 이리저리 신경 써 주며 다양한 일을 의뢰하는 중이었다.
지금도 에이리에게 연락한 이유는 여러 화장품 회사에서 꼭 좀 모델로 쓰고 싶다고 부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이리는 부정적이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얼굴이 너무 팔리는 것은 별로…… 현장 모델이라면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잡지모델은 그다지…….”
-그러면 어쩔 수가 없군요. 그러면 다음 달에 제임스 켈의 전시회가 있는데 거기 나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잡지와 방송에 나가긴 하지만 옷이 중심이라 얼굴 팔릴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제임스 켈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다.
그가 디자인한 옷은 십만 달러도 넘는 가격에 팔리는 일도 흔했다. 그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모델이 된다는 뜻!
대단한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