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쩔 거야?”
“기분 나쁘지만 당장은 좀 그냥 두고 봐야죠. 계속 저러면 뭐 한 번 정도는 소원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눈을 번쩍이며 강민은 그리 말했다.
혜경은 정말로 이종격투기 선수 중 한 명과 강민의 싸움이 성사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기대 어린 눈빛을 했다. 하지만 누가 이길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라면 전혀, 정말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강민이 이긴다!
그녀는 강민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괴물인지 눈앞에서 보았으니까.
“그런데 정말 어떻게 그렇게 센 거야?”
“그건 물론 비밀이죠.”
강민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혜경은 아쉬웠지만 언젠가는 이야기 해 주겠지, 하고 마음을 추스렸다.
*
인천공항.
세계 최고의 공항이란 평가라 이걸 가지고 한탕 해 먹으려는 이들도 많아 이런저런 논란이 되는 곳이지만, 그런 논란과는 무관하게 오늘도 무사히 운영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남녀의 시선이 흡입하듯 모이는 곳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에 있는 것은 두 여자였다. 한쪽은 부유하고 약간은 퉁퉁한 중년의 여자였다. 그녀의 옆에 있는 다른 여자야말로 현재 이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을 모이는 이유였다.
늘씬한 키, 멋진 몸매, 조각 같은 용모 등, 정말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으니까. 그런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 활동하기 편한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도리어 매력을 더하는 것 같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녀는 에이리!
경호업무차 고용주와 함께 공항에 와 있었다. 고용주가 되는 부인은 그녀를 보며 기쁜 듯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아휴, 지난번에 고마웠어요.”
“네.”
그녀는 지난번에 에이리에게 경호를 맡겼던 사람이다.
에이리도 상세히는 모르지만, 무척 부유한 집의 안주인으로 몸을 가볍게 해서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여자 혼자서 여행하는 건 위험한 만큼 경비원을 몇몇 대동하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번 에이리의 경호에 무척 만족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해외여행 가는데 회사에 부탁해서 아가씨한테 꼭 좀 경호를 맡겨 달라고 부탁했죠.”
“저도 아주머니와 다시 여행할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
“호호, 사실 남자가 든든하긴 해도 남자니까, 여자로서 같이 행동하긴 어려운 부분이 많잖아요. 그런다고 여자 경호원은 믿음직스럽지가 않고.”
“네. 그렇죠.”
동감이라서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강한 만큼 특별히 경호 같은 걸 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남자들과 여행을 한 경험은 여러 차례 있는데 항상 생각하지만 불편했다.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하거나 화장실 문제나.
단순하게 생각해 봐도 가능한 한 떨어져서 지내선 안 되는 경호임무 중이라면 성별이 다를 경우의 고충은 한층 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에이리 양은 어쩌면 이렇게 듬직한지 몰라. 그런 데다 예쁘기까지 하고.”
“칭찬 감사합니다.”
“호호. 칭찬은 무슨 그냥 사실인데. 이번 여행도 잘 부탁해요.”
“물론이죠.”
이어 부인은 어울리지 않게 몸을 움직여 누군가를 날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지난번처럼 소매치기하려는 놈들은 당장 잡아서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려요. 내가 그걸 보고 얼마나 통쾌했었다고.”
지난 이탈리아 여행 때 부인의 지갑을 훔쳐 가려던 놈들이 있었다. 에이리가 잡아 냅다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야 물론이죠. 하지만 최선은 그런 일이 안 생기는 거겠죠.”
“호호, 그 말도 맞아.”
두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게이트로 향했다. 그런데 에이리의 곁을 한 무리의 남자들이 지나갔다.
에이리의 표정이 흠칫 변했다.
“응?”
그녀는 뒤를 봤다. 막 스친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숫자는 넷 정도. 키가 크고 약간 마른 스타일의 남자 넷이었다.
열심히 감추고 있었지만 에이리에게까지 감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에게는 잘 벼린 칼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강민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강민을 제외하고는 저런 분위기를 뿜는 자들은 이곳에 와서 처음 봤다. 마치 고도의 수련을 거쳐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래요?”
부인이 갑자기 멈춘 에이리를 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에이리는 빙그레 웃으며 그리 말하고는 게이트로 걸었다.
다소 강한 자들이긴 했다.
하지만 그뿐.
에이리는 실제 싸운다면 2초 이내에 저들 모두를 죽일 수 있었다. 이렇게 마나가 옅은 곳에서 저만큼의 실력을 갖춘 자가 나타났다는 것이 약간 놀라웠을 뿐이다.
***
이남식이 앉아 있는 화려한 방의 문을 열고 그의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그런가.”
이남식이 고개를 끄덕였고, 비서의 뒤를 이어 네 사람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들은 공항에서 에이리와 스쳐 지나갔던 잘 벼린 칼 같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먼저 이남식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름은?”
이남식은 먼저 물었다.
“이름은 없습니다. 저희끼리는 이, 얼, 산, 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숫자군?”
흥미롭다는 듯 이남식이 반문했다.
이, 얼, 산, 쓰.
그것은 중국어로, 우리말로 바꾸면 1, 2, 3, 4라는 뜻이다.
“일하는 데는 그거면 충분하니까요.”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볼 수 있겠나.”
개인적인 정보 따윈 가치가 없다는 데 이남식은 동의했다.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이들을 여기로 데려오기 위해 정말 많은 돈이 필요했다.
삼합회.
이들은 아시아를 지배하는 조직폭력배들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힘이라고까지 불리는 자들이었으니까.
흑사룡.
삽합회 내부에서 이들을 칭하는 명칭이다. 흑사룡의 이에게 걸리면 신이라 해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것이 흑사룡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이들을 초빙하기 위해선 단순한 고용료만이 아니라 삽합회에 그만한 친분을 쌓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선도그룹은 중국진출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삼합회와도 나름 끈끈한 연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가 먼저 나섰다. 그는 품에서 칼을 꺼냈다. 군용 나이프였다.
“저는 칼을 씁니다.”
“나이프인가.”
“여기 있는 것들을 부수게 되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게.”
이의 물음에 이남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이가 움직였다.
그는 먼저 시범을 보이듯 현란하게 나이프를 움직였다. 칼끝에 걸린 공기가 예리하게 찢어지는 소리가 연속해서 났다.
이어서 그는 성큼 달리더니 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커졌다. 틀림없이 돌을 베었는데 마치 종이나 무른 두부를 벤 것처럼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칼이 지나간 자리에는 예리하게 베인 흔적이 남아 거기서 돌가루가 흐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벽을 베어버린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장식용으로 놓아둔 강철제의 작은 조각상을 보았고, 그것을 칼로 슥 베었다. 강철 조각상이 허무하리만큼 간단히 절단났다.
이는 이남식을 보면서 어떠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놀랍군.”
진실로 놀라웠다.
인간이 휘두르는 무기로 고기도 아니고 돌과 철을 그렇게 자를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이어 이는 말했다.
“얼은 다리를 씁니다.”
얼은 앞으로 나섰다. 그를 향해 이가 잘린 조각상의 윗부분을 던졌다.
얼의 다리가 움직였다. 쾅 하고 큰 소리가 나며 주변에 폭풍 같은 바람이 불어 가벼운 것들을 날려버렸고, 날아들던 강철제의 덩어리는 발에 얻어맞고 완전히 찌그러져 벽에 깊숙이 처박혔다.
음속을 넘을 정도의 발차기였다.
아찔할 정도의 힘이다.
놀란 비서와 이남식의 시선을 즐기며 이는 산을 소개했다. 산이 앞으로 나서며 윗옷을 벗었다. 그의 가슴과 팔이 드러났다. 다른 부분에 비해 그쪽 근육이 과도하게 발달해 있었다.
“산은 주먹을.”
잘린 강철장식품의 남은 한 조각을 산을 향해 던졌다.
산의 주먹이 움직였다. 얼 때와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났다. 강철덩어리는 원래 형상을 잃었고 폭음과 폭풍이 방 안에 터지더니 뭉개진 장식품은 벽에 처박혔다.
“쓰는…….”
쓰가 나섰다.
이는 쓰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았다. 쓰는 움직였고 근처에 멍청하게 있던 비서를 향해 움직였다. 비서가 즉각 대응했다.
그는 경호가 주된 임무인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무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달려든 쓰는 비서의 전신을 가볍게 콕콕 찔렀다.
“억!”
그걸로 끝.
비서는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은 채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봐야 했다. 이가 그제야 쓰의 능력을 설명했다.
“혈을 짚을 줄 알지요.”
“모두 다 굉장하군. 이런 일을 하는 게 아까울 정도야.”
이남식은 만족하며 말했다.
실제로 그렇다.
이남식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말 어마어마한 돈을 들였지만 이정도 능력이라면 그만한 돈을 버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의문에 즐거운 듯이 이는 말했다.
“장갑맨이란 자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장갑맨은 이미 세계적인 화제다.
“그랬나.”
“그리고 양지에서는 사람을 죽이기 어려우니까요.”
이가 빙그레 웃으면서 한 말에 이남식은 소름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만큼 믿음직했다. 장갑맨이 아무리 강해도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알겠네. 그럼 잘 부탁하지.”
“맡겨 주십시오. 악마가 설령 습격해 온다 해도 지키겠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원하신다면 악마의 심장 역시 뽑아 오겠습니다.”
“기대하겠네.”
이남식은 든든하게 이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지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환한 얼굴로 강민이 안으로 들어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이지연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았고, 강민은 이곳에 오면서 산 과일 바구니를 이지연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런 걸다…….”
이지연은 미안한 듯 그 과일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군요. 안에서 시간 보내기도 힘드실 텐데.”
“아니요. 이것저것 읽을 것도 많고 할 공부도 많아서 도리어 심심할 틈이 없는걸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이지연은 답했다.
“그런가요.”
“아르바이트 한다고 학교 공부 따라가지 못한 게 많았었거든요.”
웃으면서 이지연은 부언했다
실제로 이지연의 학교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으나 좋다고 말할 수도 없었는데 이는 매일매일 하는 아르바이트 때문이었다.
하루 4시간 알바를 한다 해도 실제 소요되는 시간은 보통 6시간에서 7시간이기 마련이다. 나갈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이동 시간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풀타임이 파트타임보다 훨씬 중요하고 효율적이기 마련이지만, 고등학생인 이지연이 풀타임 잡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강민은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이 일을 정리하고 나면 마음 편하게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한숨을 쉬며 울적해 하는 지연을 보며 강민은 이 일이 끝나면 그녀를 역시 여러모로 도와줘야 하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