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강민은 잠시 그런 것을 생각하다가 호성에게 말했다.
“고마워. 도움이 됐어.”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군.”
호성은 보람이 있다는 듯이 웃었다.
“큰 도움이 됐지. 왜 노리는지도 알아냈으니 말야. 그런데 재산을 남기기로 했다면서 왜 이지연 측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한 거지?”
전 회장은 죽은 지 다소 시간이 지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얼른 사람을 보내 유산에 대한 사실을 알리고 집행에 들어갔어야 했다. 한데 이지연은 그런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죽은 사람은 힘이 없다는 거 아닐까? 집행을 악을 쓰고 늦췄던 거겠지.”
“역시 그런가. 그러면 이제 이남식을 직접 대면하는 일만 남았군.”
사납게 웃으면서 강민이 말했다.
여러 가지 추악한 짓을 한 만큼 이남식을 만나게 되면 호되게 혼을 내줄 생각이었다.
호성은 강민이 이남식을 만나기만 하면 그의 인생관을 바꾸어 버릴 정도로 심하게 괴롭힐 수 있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꽤 힘들걸. 어디 정주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그건 강민도 걱정하고 있던 점이었다.
“일정은 어떻게 알아낼 수 없겠어?”
강민이 물었다.
“아버지가 가끔 만날 일이 있긴 할 테니까 혹시 일이 없는지 물어볼게.”
“그럼 부탁해.”
강민은 새삼 호성네 집이 대단한 부자긴 부자라는 걸 느꼈다. 사실 호성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지 않았다면 이제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이 여러 가지 있었다.
기본적으로 강민은 능력이 있으니 결국에는 해낼 수 있었겠지만, 시간을 훨씬 더 많이 사용했어야 한다는 건 확실했다.
이야기를 그렇게 정리하고 강민은 호성에게 이곳에 오면서 쭉 생각했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말야, 이런 데서 꼭 만나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던 거야?”
그렇게 긴 이야기도 아닌데 전화나 이메일이면 충분하지 않으냐는 것이 강민의 생각이었는데 굳이 호성이 이렇게 시내까지 나와 따로 만나가도 했다.
호성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신저나 통신은 위험해! 선도 그룹은 통신 회사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니가 사용하는 메신저 프로그램도 선도그룹 산하 회사에서 개발한 거야.”
“음, 그랬나.”
생각해보니 실책이었다.
수백만의 사용자 모두를 감시하진 않을 테니 위험도가 높진 않겠지만 일이 격화되면 무슨 수를 쓸지도 모르는 일인 만큼 그런 면에서 주의를 할애할 필요는 확실히 있었다.
호성은 이어 말했다.
“더구나 한국기업의 사용자 개인정보에 대한 보안 능력과 의지는 세계 최악이라고. 길거리에 주민등록번호가 굴러다니는 판에. 그런 놈들이 뻔히 보고 있을 곳에 이런 이야기 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 안 해?”
천만!
이천만도 우습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개인정보가 마치 쓰레기처럼 취급받고 그런 큰 사건을 터뜨리고서도 정보 관리 소홀에 대해 성의 없는 사과 몇 마디로 넘어간다.
그것이 대한민국 기업들의 소비자에 대한 태도!
그러면서 정부는 주민등록번호는 물론 지문까지 수집하고 싶어 하고, 그걸 또 기업에게 내주지 못해 안달이 난 창녀 같은 꼴을 하고 이에 대한 대책은 전혀 마련할 생각이 없다.
“그건 그런가.”
쓰레기 같은 기업과 정부의 행태가 떠올라 강민은 불쾌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호성은 이어 뿌듯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그리고 또 이런 비밀스러운 분위기 한 번쯤 내 보고 싶었지. 내가 스파이 소설 같은 걸 나름 좋아했었단 말야.”
“그러세요.”
강민은 피식 웃었다.
***
강민은 손뼉을 작게 쳤다.
“됐어. 이만 쉬어.”
“휴. 힘들다.”
강민의 앞에 있던 소녀가 앉은 자세로 명상을 하던 것을 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소녀는 요즘 인기있는 걸그룹의 멤버인 수란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곳은 RK의 보컬 트레이닝실이었다.
“그래도 잘 따라오고 있어.”
강민은 웃으며 격려했다.
실제로 수란은 강민이 지시를 잘 따라오고 있는 편이었다. 실제 보컬 트레이닝에 비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지겹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훈련인데도 싫증 내지 않고 꾸준히 따라오고 있었으니까.
수란은 기분 좋은 듯이 웃었다.
“응. 굉장히 효과가 좋으니까. 요새 멤버들이 날 보고 질투할 정도야. 갑자기 목소리가 너무 좋아졌다면서.”
“그건 별로 안 좋은데.”
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나만 튀면 안 되잖아. 다들 같이 고생한 건데.”
“니가 왕따 당할 위험도 있고.”
하지만 강민은 지금 수란이 말한 이유로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왕따를 당할 수 있다!
강민은 그게 정말 걱정이었다.
어디든 집단이 모이면 차별이 생길 위험이 있다. 그게 심해지면 왕따 같은 게 생긴다. 성공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연예인 그룹이라고 해도 이런 위험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그런 그룹도 있긴 하다고 들었어.”
불과 얼마 전 의지 부족으로 왕따 사건을 일으켜 몰락한 걸그룹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어 수란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우리 멤버들은 착해서 그런 일은 없어.”
“뭐 그렇겠지.”
다른 멤버들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저렇게 굳게 말하는 것을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수란은 이어서 물었다.
“그런데 넌 이런 거 어디서 배운 거야?”
항상 신기하게 여기던 일이었다.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에 불과할 강민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런 신기한 보컬 트레이닝 방법을 익혔단 말인가?
“그야 물론 비밀이지.”
빙그레 웃으며 강민은 말했다. 그건 답해 줄 수 있을 리가 없는 질문이다. 이어서 수란은 조심스럽게 강민에게 말했다.
“치. 아, 사장님이 다른 가수들한테도 꼭 이 트레이닝 받도록 해 주고 싶으신 것 같던데, 어떻게 생각해.”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는데…….”
강민은 난색을 표했다.
“왜?”
“너니까 해 주는 거야. 원래는 백만 원이 아니라 회당 천만 원 받아도 이런 거 하고 싶은 생각 없었는데.”
사실 이제 강민은 돈도 충분히 많은 입장이다. 백만 원, 이백만 원 정도는 껌 값 취급해도 좋을 만큼! 그러니 굳이 주목받기 쉬운 이런 일을 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그냥 약속한 거니 하는 거지!
수란은 ‘너니까 해준다.’ 는 강민의 말에 두근거림을 느끼면서도 아쉽게 말했다.
“그래도……. 목소리 때문에 고생하는 선배들도 얼마나 많은데. 네가 나서서 도와주면…….”
“그런 건 다른 가수들도 다 똑같잖아. 나도 할 일이 있는 데다 이것만 하고 살 게 아닌데 그런 사정을 일일이 봐 줄 수는 없는 일이지.”
이 점에서 강민은 단호했다. 사실 수란만 해도 편법을 사용해서 능력치를 키워주는 꼴이다. 다른 가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불공평한 일.
그러니 수란 외에 별로 친분도 없는 사람들을 도와 그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별로 노력도 하지 않고 미성을 지녀 성공하게 만드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뭐 그래도 너는 확실하게 가다듬어 줄게. 아이돌 출신이지만 제대로 가수이기도 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응.”
아쉬웠지만 지금 강민이 한 말만으로도 수란은 힘이 났다.
***
주말.
강민은 자신의 방에서 혜경과 공부 과외 중이었다.
그녀가 강민단에 가입한 이후로도 기본적인 활동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사실 혜경은 다른 것보다 에이리가 현재 생활에 적응하기 좋도록 친구를 구한다는 의미에서 강민단에 넣은 것이고 향후로도 계속 볼 사람이라는 점에서 강민단에 넣은 것이지 특별히 그 능력을 높이 산 것은 아니니 별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한 시간 정도 공부를 한 다음 두 사람은 쉬는 시간을 가졌다. 강민단의 단원이 된 후, 단에 대한 동지의식이 부쩍부쩍 성장한 혜경은 최근 인터넷에서 장갑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보고 있었으며, 최근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기사를 하나 보았다.
“강민아, 요즘 신문 봤어?”
“물론이죠. 심심할 때 읽기 제일 좋은 것들이기도 하고.”
기사도 기사지만 그 아래 펼쳐진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진짜 볼거리다. 얼굴을 가린 인간들이 어디까지 막장이 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지표 같다고나 할까.
정치·경제·사회 문화.
가리는 것이 없는 막장들의 싸움!
“장갑맨이 또 화제던데.”
“장갑맨은 매일 화제죠!”
강민은 약간 자부심을 담아 말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예상치 못했지만 이제 가면에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장갑맨은 한국 최대의 콘텐츠다. 단순히 인터넷 스타의 영역을 넘어서서 한국의 오타쿠들이 동인지도 만들고, 코스프레도 하고. 또 해외에서도 영향을 받아 장갑맨에 관련된 작품이나 모임 같은 걸 열기도 했다.
강하다는 것만 해도 화젯거리가 되기 충분한데 장갑맨은 영웅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그만큼 화제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
“그렇긴 한데 요새 또 재밌는 기사가 있었거든.”
“뭐죠? 요즘은 별로 뭐한 게 없었는데.”
강민이 고개를 갸웃 움직이며 물었다.
현재 목표는 손도그룹의 총수지만 일정에 대해서는 정보를 얻을 수가 없어 지금은 활동 중지 상태였다. 일단은 호성에게 좋은 소식이 오길 기다리고 그것도 무리라면 어떻게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움직여 볼까 생각하는 정도다.
“그게 네가 뭔갈 해서 소란스러워진 건 아니고 이종격투기 쪽에서 장갑맨에 대해 디스를 걸고 있거든.”
디스는 디스리스펙트의 준말이다.
대상을 깐다는 뜻이다.
“걔들이오?”
강민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그의 반응에서 이미 상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눈치챈 혜경은 물었다.
“알아?”
“얼마 전에 신문 본 게 있긴 하죠. 뭐 최강을 결정하자던가……. 황당한 소릴 하더군요. 그래 봐야 내가 얻는 게 뭐가 있다고. 근데 또 그런단 말이에요?”
“이번에 무슨 대결을 해서 이긴 선수가 장갑맨한테 선언을 했다는데. 누가 최강인지 겨뤄 보자면서.”
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민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애들 놀이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죠.”
“그래도 사람들은 아주 흥미진진해 하던걸. 덕분에 최근에는 표도 많이 팔린대.”
신문에 보니 표 매출이 이전에 비해 30% 이상 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대결이 정말 성사될지는 모르겠지만 장갑맨이란 존재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며 싸워보고자 하는 의지를 내세운 존재들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관심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아니 그 무슨……. 경찰은 그걸 두고 봅니까?”
“단체에서 하는 게 아니라 선수 개개인이 그냥 개인 의사 표현하는 거라서 제지할 이유가 없다는 모양이야. 특별히 범죄를 돕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싸우자는 내용이기도 하고.”
“내 참…….”
강민은 투덜거렸다.
“역시 기분이 좋진 않은가 보지?”
“그야 당연하죠. 내 이름 함부로 써서 돈 벌고 있는 놈들 있다는데 어디 가서 욕해줄 수도 없고…….”
장갑맨이란 별명을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걸 사용해서 자기 재산을 불리는 놈들이 있다니 역시 불쾌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욕하는 사람은 많이 있어. 그런데 선수나 협회 입장에선 그런 건 중요하지 않거든. 어차피 욕하는 사람들은 애당초 이종격투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고, 중요한 건 백 명의 안티보다 한 사람의 팬을 만들 수 있으면 된다는 거지.”
“그럴 듯한데요. 관심이 있든, 안티든 수익성이 제로인 사람들이란 건 동일하니…….”
강민은 감탄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영리하게 선수 개개인의 선언이지 협회 주도는 아니니까. 안티들도 선수들한테 모이지 협회한테는 별소리가 없어.”
“쳇.”
강민은 다시 찌푸린 얼굴이 됐다.
혜경의 말을 듣자니 앞으로도 이런 일이 쭉 이어질 게 틀림없어 보였다. 혜경은 이어서 강민에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같은 말이 있기도 했고……. 이거 아무리 봐도 협회 측에서 조장하는 것 같은데.”
“그래요?”
“응. 내가 알기에 이종격투기도 프로레슬링처럼 약간은 협회 측에서 상황을 만든다고 하니까. 그걸 사용한 게 아닐까.”
순수한 무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이 움직이고 그 자본을 증식시키기 위한 틀 안에 들어간 이상 모든 스포츠는 쇼맨십을 중시한다.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왜 변형됐는데! 재미가 없어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