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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져서 놀러왔다-91화 (91/227)

91화

“쿨럭, 쿨럭.”

기침 소리가 요란했다.

조용히 방 안에서 책을 보며 부족한 공부를 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지연은 그 순간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에게로 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언제나 그러하듯 수척한 모습이었다. 지금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좋지 않다는 징후였다.

어쩌지!

지연은 다급하게 휴대폰을 찾았다. 강민이 마련해 준 스마트폰이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이니만큼 무슨 일이든 생기면 폰으로 연락을 하라고 했다.

-아 지연 양. 무슨 일인가요.

“저, 저기 저희 어머니가…….”

-편찮으신 모양이군요. 곧장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삑.

통화가 끊어지며 짤막하게 나는 소리가 어쩐지 서늘했다. 지연은 얼른 어머니를 살피며 안부를 물었다.

“많이 편찮으세요?”

“아니다. 괜찮단다…….”

지연의 어머니는 힘겨운 얼굴에 미소를 베어물고 말했다. 이어서 그녀의 웃던 표정이 슬프게 변했다.

“미안하구나. 나 때문에 네가…….”

“무슨 말이세요. 전혀 그렇지 않은 걸요.”

지연은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그 대답이 위로가 되었던 듯 지연의 어머니는 웃었다. 수척하지만 지연에게 물려준 미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운 용모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지연은 오래도록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을 생각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조용하게 살았던 것 같았다. 아버지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았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리운 품의 감촉이 멀어졌을 때 어머니가 울고 있던 모습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녀는 당시 어머니의 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돌이켜 보건대 그것은 당시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뜻했던 것 같았다.

이후 지연은 아버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집은 쓸쓸하고 조용해졌다.

죽어가는 세월의 내리막길을 걸어가듯.

항상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흐름에 결정적인 가속도를 넣은 것은 아머니가 병에 걸린 것이었다.

치명적인 병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성적이었고, 어쩌면 그것이 치명적인 병세보다도 모녀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삶은 곧 밑 빠진 독처럼 변해버렸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도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부였다.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어 겨우 병원비의 부담이 줄어들고, 푼푼이 지원금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성장하는 소녀와 어머니가 함께 살아가기에 그 지원금은 언제나 그렇듯 빠듯했다. 그래서 지연은 항상 알바를 했다.

돌이켜 보면 지연의 살아온 인생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기억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알바의 기억인 것 같았다.

알바를 하고.

알바를 하고.

알바를 하고.

그러다가 누군가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자신의 삶을 어머니의 수척한 얼굴 앞에서 돌이켜 보자니 지연의 얼굴도 저절로 슬퍼졌다.

‘행복해지고 싶다.’

지연은 정말로 그렇게 되길 원했다.

당장은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위기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생겼다. 꼭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을 거라고 지연은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

***

피로한 얼굴의 남자가 차 안에서 하품을 했다.

“후아함…….”

청년의 이름은 박석남이다.

돌같이 단단한 남자가 되라는 뜻으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석남은 그 이름값을 하듯이 씩씩하고 열심히 살았다.

학교 성적도 좋았다.

무려 전국 최상위!

덕분에 남들이 들어가길 바라 마지않는 의대에 들어가게 됐다.

의느님!

사회적 존경은 모르겠지만 돈을 많이 번다는 의사! 더구나 안정직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게 꿈꾸던 현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공부할 게 많았다!

진짜 끔찍할 정도!

지금 생각해도 토하고 싶을 정도다.

더구나 많은 과목 중 하나만 낙제해도 유급을 당해야 한다.

그런 의대 공부를 하면서 박석남은 확신했다.

의대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사실 부럽다고 의대에 넣어줘 봤자 버틸 수 있는 놈들은 애당초 의대에 올 실력이 있는 놈들밖에 없다고.

만에 하나 요행으로 들어와 봐야 쫓겨날 수밖에 없다.

어쨌건 그런 힘든 공부를 끝마치고 인턴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층 더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인턴 생활의 악몽에 대해 익히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자신이 직접 당하자니 이건 정말 노예가 따로 없는 게 아닌가.

박석남.

돌같이 단단한 남자가 되라는 뜻!

하지만 인턴이 되고 나서 박석남은 자신은 돌 같은 남자가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한데 이건 2년이나 해야 하는 일인데 봉급도 너무 낮아서 그렇게 열심히 병원에서 일하고서도 적자를 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박석남은 인턴 생활 틈틈이 다른 병원에서 일하기도 하면서 용돈 벌이를 해서 버티는 수밖에는 없었다.

오늘 이 차에 탄 것도 바로 그 용돈 벌이를 위해서였다.

차의 뒷좌석에 앉아 졸음과 싸우고 있는 그에게 옆에 앉아 있던 이가 말을 걸었다.

“피곤해요?”

박석남을 이 자리에 부른 소년, 호성이었다.

두 사람은 과거 과외 선생과 학생이라는 관계로 꽤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의 친분이 꾸준히 유지되어 지금도 연락을 때때로 주고받고 있었고, 오늘은 호성이 박석남에게 돈도 괜찮게 벌 수 있는 일이 있다고 꼬셔서 불러낸 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돈에 궁한 박석남은 냉큼 빠져나왔다. 인턴은 노예나 마찬가지라서 언제 불려 들어갈지 모르지만, 일단 친구에게 부탁해서 맡아 달라 해 뒀으니까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이 일 정도 끝내는 데는 문제 없을 것이다.

“말도 마라. 끔찍하다…….”

“역시 의사는 쉽지 않은 모양이군요.”

피로에 지쳐 죽어가는 박석남을 보면서 호성이 말했다.

“사람 목숨 다루는 일이니 편할 수야 없지.”

“오, 의사의 마음가짐!”

호성이 감탄해 바라보며 말했다.

“훗, 존경스럽냐?”

박석남이 자랑스레 웃으며 물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요.”

호성은 고개를 저었다. 박석남의 모습에서 진정 깨달은 것은 공부 잘해 의대까지 가 봐야 별수 없다는 것이었다.

역시 인생이 진정한 승리자는 돈을 가진 자다!

그런 의미에서 호성은 자신이 이미 승리자라는 데 뿌듯함과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박석남은 호성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보다 너도 좀 변한 것 같다?”

“그래요?”

“전엔 시건방진 꼬맹이 같아서 때려주고 싶었는데.”

“기뻐해야 합니까?”

칭찬 같지 않아서 물었다.

하지만 박석남은 당연한 게 아니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이잖아.”

“쳇.”

투덜대는 호성의 모습을 낄낄대며 바라보던 박석남은 호성에게 물었다.

“그런데 대체 뭐길래?”

불려 나오긴 했는데, 사람을 치료하는 일이라는 것, 보수가 좋을 거란 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건 가면 알 거예요. 비밀 수호는 확실히 해 주세요.”

“그러지.”

아쉽게 박석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사정은 결국 도착해서야만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곧 차가 멈췄다.

“아, 도착했네요.”

“얼른 가자.”

두 사람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는 호성네의 개인차량이다. 운전자도 기사! 호성은 기사에게 근처 어딘가에 잠시 주차해 놓고 기다리라 이야기해 놓고는 박석남과 함께 목적지로 이동했다.

물론 그곳은 좁은 골목 사이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호성은 박석남과 함께 문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누르며 작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목소리를 일부러 내는 것은 신분 확인을 위한 암호 같은 것이다. 대단한 효과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낯선 목소리의 방문자는 미리미리 주의하는 게 좋을 테니까.

곧 문에서 전자음 소리가 났다.

삑.

덜컹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조심스러운 표정의 지연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 어서 오세요.”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면서요. 의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호성은 과장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환하게 웃으면서 지연이 기뻐했다. 호성의 등 뒤에서 박석남이 얼굴을 내보이며 우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두 사람을 반기며 지연은 안으로 안내했다.

둘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박석남은 감탄한 어조로 호성의 귓가에 수군댔다.

‘야, 되게 예쁘다.’

‘그렇죠? 저 여자애 굉장히 미인임.’

호성도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연은 정말 미녀다. 요새 강민 덕분에 미인이랑 만날 기회가 늘어서 좀 감동이 덜해진 느낌이 있긴 하지만 이지연은 누가 보더라도 감탄할 만한 용모를 지녔다.

그야말로 절세의 미소녀!

한때 수란을 노리다 좌절한 경험이 있는 호성의 눈으로도 미소녀니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잡담은 금세 끝났다.

환자가 누워있는 방에 도착했다.

“여, 여기요.”

방은 아무것도 없이 썰렁했지만 청결했다. 방의 중앙에 환자가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박석남이 얼른 나섰다.

“그러면 잠시만요…….”

진료를 시작했다.

잠시 이지연의 어머니를 살피던 박석남은 놀란 표정이 됐다.

“어?”

“위, 위험한가요?”

박석남이 놀란 모습을 보이자 당연히 지켜보던 두 사람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석남은 서둘러 손을 휘둘렀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 놀란 것일까?

이야기를 기다리는 두 사람에게 박석남은 고민하는 표정이 되더니 이어 말했다.

“이건 치료가 끝나고 이야기 드릴게요.”

“네…….”

이지연은 불안했지만 일단 박석남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다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석남은 진료를 계속했다.

그가 손을 멈춘 것은 수십 분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다.

“휴.”

“끄, 끝났나요?”

“네. 별일 없습니다. 그냥 약 드시고 편히 쉬고 계시면 편해질 거예요.”

박석남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온 가방에서 약을 몇 가지 꺼내 내밀면서 말했다. 약의 유출은 민감한 문제지만 흔하고 위험하지도 않은 약이라서 그렇게까지 문제될 일은 없었다.

이지연은 고맙게 약을 받으면서 인사했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호성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어서 박석남이 지연에게 물었다.

“하하, 뭐 뭘. 그보다 혹시 어머니 성함이 장예선 아닌가요?”

“장예선이요?”

이지연은 아리송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네.”

“아닌데요. 저희 어머니는 장민희라고 하시는데…….”

이지연은 고개를 흔들며 그렇게 답했다.

“그렇습니까. 음, 그럼 아닌 모양이군요.”

박석남은 석연치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딸이 아니라는 데야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호성이 이제 더는 할 일이 없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 돌아가 볼게요.”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이지연은 고개를 크게 숙이며 감사했다. 호성과 박석남은 함께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언제든 다시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라 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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