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래?”
혜경은 어둠속을 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강민이 밤눈이 아주 밝은 모양이라 생각하는 사이 점차 멀리서 소리가 들렸고, 모습이 보였다.
남자 셋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한데 그중 두 사람은 등 뒤에 사람을 하나씩 업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여자였는데 고등학생과 중년의 여자로 보였다. 중년 여자는 몸이 아주 약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단단히 눈을 가리고 있었다.
곧 강민의 곁에 그들이 도착했다.
“수고했어.”
“별거 아냐.”
강민에게 여유롭게 답하는 세 사람은 재철 일당이었다.
오늘도 시키는 대로 구르지만 별 불만이 없는 것은 이번 강민이 하는 일이 장갑맨으로서 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더, 강민에게 수고비로 몇 푼 받기로 한 것도 사기진작에 도움이 됐다.
강민의 목소리를 듣고 여기까지 업혀 온 지연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천만에요. 그보다 너희들, 오면서 조심했지?”
“당연한 거 아냐? 며칠 전부터 CCTV 있는 길목은 쭉 조사했는데. 죄다 피해서 왔지.”
“그리고 여긴 그런 시설도 별로 없어서 걱정할 것도 없었어.”
셋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태도로 말했다.
“나오면서 주변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았지?”
“응. 조심했어.”
“그럼 됐다. 얼른 타.”
“응.”
대화를 끝내고 그들은 모두 서둘러 봉고에 올랐다.
한쪽 곁에 서서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혜경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지금 이야기만으로는 도대체 짐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운전해서 가는 것이 우선. 혜경은 차를 몰기 시작했고 봉고차는 새벽이라 뻥 뚫린 도로를 시원하게 달렸다.
가는 길목에서도 강민은 두 모녀의 얼굴에 씌워둔 눈가리개를 풀지 않았다.
강민은 누운 채 힘든 표정을 짓고 있는 지연의 어머니에게 우선 말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견뎌주세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자기의 안위보다 딸을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요즘 딸이 몇 번이나 살해당할 뻔했다는 것은 아픈 그녀도 알고 있다. 부모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곧 혜경의 봉고가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강민의 집으로부터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들은 우선 서둘러 내렸다.
내리는 도중에 만수가 들고 내리는 모녀의 짐이 상자 하나뿐임을 보고 물었다.
“짐은 그것뿐입니까?”
“네. 별로 가지고 갈 건 없었어요.”
“하기야 가실 곳에도 이미 어지간한 건 다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강민은 재철에게서 강민의 어머니를 받아 업고서 걸었다.
잠시 걷자 어둠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리였다.
“왔구나.”
“응.”
모녀의 대피소로 사용하기로 한 장소는 바로 에이리의 집이었다.
처음에는 강민단의 기지를 쓸까 했는데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곳도 아니고 비상시 접근하기도 어려운 구조라 에이리의 집을 쓰기로 했다.
덕분에 그동안은 강민의 집에서 신세지는 건 물론이고, 여인숙을 전전해야 할 처지가 됐지만 에이리는 도리어 환영했다.
그 핑계로 강민과 만날 시간을 늘릴 수 있게 됐으니까.
“안으로 들어가자.”
“내가 안을게.”
에이리는 만수에게서 지연을 받았다.
“그, 그러세요.”
에이리는 가볍게 지연을 업었다. 두 사람이 각자 한 사람씩을 업은 다음 강민은 친구들에게 지시했다.
“너희들은 여기에 있어. 곧 나올게”
“응.”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그들은 에이리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집안에 강민과 에이리는 마스크를 써서 모습을 우선 숨겼다.
여기까지 온 이상 계속 숨기긴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일이 정리되기 전까진 이대로 나갈 생각이었다.
이후 두 사람의 눈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를 풀었다.
가리개가 풀리자 두 사람은 낯선 듯이 주변을 살폈다.
“앞으로 여기에서 머무르실 겁니다.”
“아, 이곳이…….”
“괜찮지요?”
“네.”
싱긋 웃으며 강민이 하는 말에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넓었고, 가재도구도 많진 않지만 필요한 것은 다 마련되어 있었다.
강민은 이어 그녀에게 미리 마련했던 대포폰을 하나 넘기고는 말했다.
“필요한 게 있다면 그걸로 부탁하세요. 제 쪽에서 다 사다가 전달하겠습니다. 직접 나가는 건 피해주셔야 합니다. 병원 문제도 의사를 섭외해 뒀으니까 문제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알겠어요.”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답답하겠지만 참아주세요. 주말에는 한 번씩은 찾아오겠습니다. 만화책이나 게임기도 마련해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민의 배려에 지연은 정말 고맙다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세요. 곧 정리하겠습니다.”
“네.”
두 사람은 모녀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고 눈동자를 서로 교환했다. 결의가 담긴 눈동자였다.
***
봉고 앞.
이지연는 돌아가기에 앞서 강민과 에이리에게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새벽부터 불려 나와 해괴한 일을 했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강민과 에이리가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고개를 끄덕인 다음 강민이 말했다.
“음! 여기가지 왔으니 혜경 누나에겐 숨기는 것도 좋지 않겠군요. 솔직히 말하죠. 저는 장갑맨입니다.”
“뭐?”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혜경은 강민을 바라봤다.
강민은 가슴을 탕 치며 다시 말했다.
“장갑맨이라고요.”
“아하하하! 뭐야, 그 농담.”
혜경은 깔깔 웃었다.
장갑맨이라면 혜경도 안다. 한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수수께끼의 괴인.
마치 미국 블록버스터 영화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강하고 또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해서 흥미롭긴 하지만 혜경에게 그 이상은 아닌 존재였다.
그런데 강만이 그런 존재라니.
쉽게 믿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다.
“음. 진짠데. 보실래요?”
강민은 그리 말하며 주변에 굴러다니는 쇠 파이프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종이짝처럼 이리저리 휘어 덩어리로 만들었다.
“앗!”
“이제 믿겠어요?”
강민은 휘어 덩어리가 된 쇠파이프를 혜경에게 내밀며 말했다.
혜경은 놀란 눈길로 다가가 쇠파이프를 만졌다. 쇠로 된 게 맞았다.
속임수가 아니었다.
“정말로…… 장갑맨?”
“이쯤 되는 능력도 없이 나 같은 애인을 얻을 수 있겠어요?”
강민의 옆에서 에이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
“많이 놀란 건 알겠는데 이야기를 좀 들어주세요. 차분히 설명할게요.”
강민은 놀란 얼굴로 상황을 좀체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고만 있는 혜경에게 얼른 제안했다.
“조, 좋아. 설명해 봐.”
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강민은 설명을 시작했다.
설명을 끝내는 데는 십수 분 정도가 걸렸다.
강민이 말한 내용은 주로 이지연에 관계된 것으로 어떻게 그녀를 알게 되고 보호하게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강민 자신이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물론 말하지 않았다.
“이해하겠나요?”
“으응. 이해하겠어.”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모든 의혹이 풀린 것은 아니란 표정으로 강민을 바라보면서 매섭게 물었다.
“하지만 하나 빠졌잖아. 넌 대체 뭐야?”
과연 한국 최고 수재들이 모인 서울대 출신다운 통찰력이다. 이야기의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아, 그건 비밀로 해 두죠.”
강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계에 가서 인생역전하고 돌아온 고등학생이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혜경은 투덜거렸다.
“제일 중요한 건 쏙 빼놓고.”
“아니요. 중요한 건 지연 양을 구하고 나쁜 놈들을 박살내는 거지, 제 정체가 아니죠.”
강민은 혜경을 향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혜경은 그 지극히 올바른 말에 억울한 표정이 됐다.
“치사하게. 그런 말 하면 나만 개념 없는 거 같잖아.”
“하하하! 어쨌든 이건 꼭 비밀로 해주세요.”
“응. 그렇게 할게.”
이 사실이 밝혀지면 얼마나 커다란 문제가 될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강민의 주변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도.
그러니 절대 드러나선 안 될 비밀이다.
“그리고 누나를 믿지만, 만에 하나 실수가 생기면 그땐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건 꼭, 명심해 주세요.”
강민은 얼음처럼 냉정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혜경은 공포가 온몸을 휘감는 것과 함께 눈앞에 있는 것이 정말 강민인지 잠깐 혼란스럽다 여겼을 정도였다.
“아, 알겠어…….”
“너무 겁먹게 한 것 같군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다만 굉장히 중요하니까.”
“응, 알았어.”
협박하듯이 군것이 좀 섭섭하고 화도 났지만, 혜경도 강민의 입장을 이해하기 때문에 마음에 담아두지 않기로 했다.
에이리가 강민의 옆에서 갑자기 말했다.
“아참,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강민단에 가입하지 않겠어요?”
“강민단?”
그게 뭐냐는 눈빛으로 혜경이 반문했다.
“말 그대로 강민을 중심으로 해서 모인 사람들의 단체지요. 저까지 합쳐서 인원이 여섯인데. 가족적인 분위기라 좋아요.”
“그런 것도 했어?”
혜경이 신기하단 눈빛으로 강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 어쩌다 보니까요. 동아리 같은 거죠. 저도 누나는 마음에 들었는데, 정말로 생각 있으면 어때요? 뭐, 재밌을 거예요. 비밀결사 같은 거니 비밀은 지켜야 하지만!”
“으음…….”
혜경은 잠시 고민했다.
장갑맨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신문 같은 곳에서 본 바가 있다. 그걸 생각하면 위험할 것 같기도 했지만, 또 장갑맨이 이렇게 강하고 비밀을 철저히 지킨다는 점에서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또 중요한 것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흥미로운 집단인 것 같다는 점이었다.
결국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재밌을 거 같기도 하고. 또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하하하! 장기적으로는 수익도 낼 생각입니다.”
“포부가 크네.”
“집단을 운영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하죠.”
에이리는 자랑스럽게 말하는 강민의 옆에서 나쁜 놈들 때려잡고 삥뜯는 것이 수익원이란 점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