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한데 다음 순간 커다란 충격이 밀려오며 호흡이 막혔다. 숨을 쉬기 위해 놀란 얼굴로 수란은 뻐끔거렸다. 이어 몸속에서 무언가 펑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고는 호흡이 회복됐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며 수란은 바닥에 쓰러졌다.
“하악, 하악……. 뭐, 뭐야?”
겨우 몸을 일으키며 수란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강민은 대답하지 않고 수란의 손을 잡고서는 강압적으로 말했다.
“심호흡을 해봐.”
강민이 무척 엄격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란은 감히 거절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지시받은 대로 심호흡을 했다.
수란은 심호흡을 시작했고 금세 뒤집어질 것 같던 속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편해졌어.”
“흠. 나쁘지 않군.”
손을 놓으며 강민은 말했다.
혼자서 뭔가를 시키고 혼자서 이해하는 강민의 행동이 답답해서 수란은 물었다.
“강민아, 이게 대체 뭐야?”
“별거 아냐. 약속을 지키는 거지. 목소리 단련 말야.”
“아…….”
수란이 놀란 표정이 됐다. 이게 전부 목소리에 관련이 있단 말인가?
신기한 체험이었지만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하고 보니 뭔가 효과가 있을 것도 같았다.
“아, 물론 오늘 여기서 한 건 전부 비밀이다.”
“응.”
강민의 지시에 수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강민은 이어 본격적인 지도에 들어갔다.
이제까지 그녀의 몸속에 길을 뚫었으니, 그 길을 통해 힘이 오갈 수 있도록 하면 충분할 테니까.
***
점심식사를 끝낸 다음의 WWF사무실.
종찬과 유만은 각자의 업무에 열중해 있었다. 서류를 정리하고 경기일정을 파악하며 각종 잡무를 보던 유만이 문득 말했다.
“생각을 해 봤습니다.”
“무슨 생각?”
종찬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유만의 얼굴이 팍삭 일그러졌다.
“농담하십니까? 장갑맨 얘기 먼저 꺼낸 게 누군데!”
“아, 그런 일이 있었지.”
며칠 전이었던가? 아니, 몇 주 전이었던가 장갑맨을 어떻게든 활용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유만을 닦달한 적이 있었다. 반은 농담이었는데 유만은 정말로 생각해낸 모양이었다.
종찬은 유만이 성실한 부하라 생각하며 물었다.
“그래서, 생각했다는 게 뭔가?”
“장갑맨을 도발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유만은 말했다.
하지만 종찬으론 퍼뜩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도발해?”
“조금 있으면 챔피언전이 열리잖습니까?”
유만이 답답한 듯 말했다.
“그런데?”
“챔피언전이 끝나면 그 시합이 끝나고 이긴 녀석한테 외치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장갑맨보다 세다!’라고 말입니다.”
레슬링 정도는 아니지만 이종격투기도 어느 정도의 대본이 존재한다.
물론 시합의 승패 자체를 대본에 의해 결정나게 하면 게임의 존재의의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산업이 무너지니까 그런 짓은 못한다.
하지만 싸우기 전에 갈등 관계를 조장하거나 이긴 뒤의 발언을 하거나 하는 건 협회 측에서 어느 정도 조정할 수가 있다.
사람들은 강자 자체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강자의 드라마에 매혹되는 것이다.
“그게 도발이 돼?”
“물론 그걸로 끝내는 건 아니죠. ‘만일 자신이 있으면 다음 시합 때 찾아와서 우리와 대결해라! 기다리고 있겠다!’라고도 하는 거죠.”
유만이 어떠냐는 듯이 말했다.
유만이 한 말은 확실히 종찬의 흥미를 끌었다.
“오, 재밌긴 하겠는데.”
“그렇죠?”
하기만 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대박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종찬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
“그런데 문제가 많아. 장갑맨은 범죄자라고.”
“깡패들 좀 두들겨 팬 것 가지고 범죄자라뇨.”
유만이 무슨 소리냐는 듯 반발했다.
깡패들은 따질 것 없이 사회의 쓰레기!
그것이 유만의 주장이다.
올바른 생각이지만 아무리 깡패라고 해도 온몸의 뼈를 다 부러뜨리고, 고자로 만들고, 고문으로 정신 이상 상태에 몰아넣는 것을 국가가 봐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말하는 게 아니라 경찰이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거란 말이지.”
각종 폭행죄는 물론 여자 고등학생 살인교사에 관련한 중요한 참고인으로 장갑맨은 수배가 떨어진 상태였다.
“아. 그건 문제겠는데요.”
겨우 진정한 듯 유만이 얼굴을 찌푸렸다.
협회에서 그런 이벤트를 하면 자칫 공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꼴이 된다. 범죄좌와 손을 잡는 건가 하는 논란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러니 협회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이벤트를 하긴 역시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 게다가 그게 아니라도 온다는 보장도 없고.”
“안 오는 건 아무 문젯거리도 안 되죠. 적어도 화제는 될 거 아닙니까?”
유만이 생각할 때 이 이벤트는 장갑맨이 오든 안 오든 협회로서는 이득이었다. 큰 주목을 끌 수 있을 테니까.
종찬도 상당히 동감은 했지만, 경찰 외에도 걱정거린 있었다.
“흠! 노이즈 마케팅 소리 듣는 거 아닌가 몰라.”
“사실 노이즈 마케팅이 맞죠.”
유만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먹히긴 하겠지?”
“그럴걸요. 하지만 경찰이 문젠데…….”
“경찰이 문제지…….”
두 사람은 이어 굳은 얼굴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떻게 하면 경찰이라는 방해물을 떨치고 장갑맨을 이용할까 생각했다.
십수 분의 생각이 지나고 유만이 입을 벌렸다.
그는 책상을 탁 치며 몸을 일으켰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어서 말해봐.”
종찬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시나리오를 짜는 거죠.”
“시나리오를 짠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들어보세요.”
의아한 얼굴을 하는 종찬에게 유만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종찬오 곧 오, 하고 감탄한 얼굴이 됐다.
***
이지연은 주변을 힐끗힐끗 살피며 걸었다.
곧 그녀는 공사장에 도착했다.
건설경기가 박살나고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건물이 미분양 상태가 되니 공사 도중 내팽개쳐진 건물도 흔해졌다.
덕분에 이지연은 이렇게 쉽게 장갑맨과 만날 만한 장소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익숙하게 건물 일층의 그늘진 곳으로 들어가니 거기 이미 와 있던 장갑맨이 모습을 보였다.
이지연은 얼른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간 별일은 없으셨는지?”
“네. 경찰이 주변에 많아서 문제는 없었어요. 하지만 점점 사람이 줄어들고 있어서…….”
이지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마도 경찰이 줄어들면서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걱정한 것 같았다. 아마도 이번에 강민에게 메일을 보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렇군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네.”
강민은 이지연이 이어서 말할 것이 어떤 내용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각오를 굳힌 표정을 하고 이지연은 이어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하고 싶어요.”
“숨어 계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렇게 하려고 해요.”
강민은 이지연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짧게 심호흡을 했다.
아마도 이것이 이지연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움직임이 되리라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지연을 보며 이어 말했다.
“알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방학이 가까워지면 알려 드리지요.”
“네. 항상 폐를 끼쳐 죄송해요.”
“하하, 아닙니다. 이왕 시작한 일이니까요.”
강민은 고개를 흔들며 이지연의 마음을 편히 만들어 주려 했다.
그는 이어서 설명했다.
“그리고 제가 화가 나서라도 이 일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괜히 선량하게 노력해서 살아가려는 사람을 죽이려 드는 놈의 얼굴을 보고 벌을 주지 않으면 제가 울화통이 터져 못 살 것 같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강민은 한 손을 꽉 쥐었다.
까득까득 하고 손안에서 소리가 났다. 지금 그의 손아귀에 돌이 있었다면 그 돌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고, 쇳덩이가 있었다면 쇳덩이는 손 모양에 따라 진흙처럼 일그러졌을 것이다.
그만큼 강민의 손아귀 힘은 강력했으며, 이는 강민이 이지연을 노리고 있는 자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저도 누가 이런 짓을 하는지 꼭 알고 싶어요.”
강민처럼 분노를 몸으로 표현할 능력은 부족하지만, 이지연 역시 정체 모를 적에 대해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당사자인 만큼 더 그런 마음은 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겁니다.”
“네.”
강민이 한 말을 듣고 이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안심되고 그의 말대로 다 될 것 같았다.
사실 이지연이 아는 한, 실제로 장갑맨은 한 말을 전부 다 실천했다.
강민은 분노했던 기색을 풀고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 마음 편히 먹고 연락 기다리세요. 항상 몸조심하시고요.”
“이게 있어서 든든해요.”
부끄러운 듯 웃으며 이지연은 목에 걸린 부적을 강민에게 보였다.
실드 마법이 기입되어 있는 부적이었다.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물론이죠.”
뻔한 것 아니냐는 듯 이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준비를 해 봐야겠다 생각하며 강민은 어둠속으로 몸을 숨겼다.
***
문을 열고 수란은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김경길의 사무실이지만 들어가는 수란의 모습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자주 들어가다 보니 익숙해진 것이다.
업무를 보던 김경길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아, 어서 와라.”
“무슨 일이세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수란이 물었다.
김경길이 물었다.
“강민하고 하는 거 끝났지?”
“네. 방금 돌아갔어요.”
수란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김경길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어때, 목이 아프거나 하진 않니?”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김경길의 예상과 달리 수란은 한점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김경길은 의외다 싶어 표정을 잠깐 변화시켰지만 이내 혹시 모른다는 심정으로 수란에게 권했다.
“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담당자한테 보이는 게 어떨까?”
“그건 문제없지만…… 혹시 강민이 가르치는 게 엉터리일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
“사실 그렇지 않니.”
수란이 한 말에 김경길은 쓴웃음을 지었다.
수란 역시 그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저도 그렇게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아니란 거야?”
수란의 우습다는 듯한 어투에서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태가 흘러가고 있다 생각한 김경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전혀 목이 아프거나 하진 않았어요.”
“아예 훈련을 안 한건 아니고?”
목이 정말 아프지 않다면 엉터리이면서 약한 훈련을 했거나 아예 훈련을 안 했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김경길은 생각했다.
수련은 강민과 훈련을 받았을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훈련이라고 하긴 어려워 보이지만…….”
“그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김경길이 물었지만, 수란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강민이 말하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