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사실 그쪽이 진짜지. 모델 일 같은 건 재밌긴 한데 내가 좋아하는 일은 아냐. 좀 지루한 편이고 긴장감이 부족하니까. 멋지게 찍히면 기분이 좋긴 하지만.”
“마음에 들었나 봐?”
에이리의 표정에 만족감이 드러나 있기에 강민이 물어봤다.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첫 일은 괜찮았어. 어느 부인이 해외여행 가는데 경호 의뢰에 같이 따라가게 되었거든. 이탈리아던가. 그래서 밀착 경호하고 얼마 전 돌아왔어. 좋은 사람이어서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별일 없이 무사히 끝냈지. 중간에 소매치기 서너 놈 잡은 게 다야. 대우도 좋아. 항상 일하는 건 아니고, 필요할 때만 연락받는 거야. 모델일과 병행하기도 무리 없지.”
에이리는 지난번 면접을 통해 자신의 어마어마한 실력을 증명했다. 그 덕분에 몇 가지 특권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에이리가 자신의 실력을 면접담당자가 알아봤다는 것을 눈치채고 통 크게 나가 본 것이다.
그는 잠시 갈등하면서도 결국 받아들였다.
다만 제한이 있었다. 회사 측에서 특급으로 분류하는 중요한 일의 경우에는 그런 권리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정도는 에이리도 양보해야 한다고 해서 계약은 성사되었다.
그리고 곧장 일을 받아 이탈리아까지 갔다 온 참이었다.
평판은 무척 좋았다.
사실 여자 경호원이란 미덥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에이리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민이 투덜거렸다.
“나보다 네가 더 지구를 많이 알겠는데? 나는 아직 한국을 떠나 본 적이 없는데.”
“후훗! 부러우면 너도 이 일 하지?”
강민의 실력이라면 물론 당장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장갑맨 일만으로도 바빠서 무리야.”
“그래? 아! 그리고 메시지 받았어. 웬 노래 교실 시작했다면서?”
에이리가 물었다.
얼마 전 문자로 강민과 에이리가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한 이야기였다. 강민은 난색을 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봤잖아. 그 묘한 아저씨.”
“그 사람?”
“떨쳐내느라고. 마침내 친구가 가수하고 있단 말야. 걔 목소리를 향상시켜 준다고 했지.”
“가능하겠어?”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고…… 몇 군데 강화하도록 훈련시켜주면 되겠지. 따지고 보면 내가 노래야 뭘 알겠어. 그냥 몸을 튼튼하게 해 줘서 노래가 부가적으로 좋아지는 거지.”
강민은 노래도 모르고 노래에 대한 안목도 없고 목소리를 단련시키는 방법도 모른다. 강민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수란의 육체적인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강민 자신의 목소리가 그런 강인한 육체에서 나온 것이니 목소리에 관계되는 각 부위와 기관의 능력을 향상시키면 자연히 좋은 목소리가 될 것이란 게 강민의 생각이었다.
“하긴. 아, 그런데 혜경 씨하고는 계속 잘 지내?”
“과외 계속 받으며 잘 지내고 있지. 그런데 꽤 친한 모양이네?”
강민은 혜경에 대해 에이리가 관심을 가지는 데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지난번 신세진 것도 있고, 가끔 연락도 하니까. 좋은 사람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좋은 사람이지. 장래 선배가 될지도 모르고.”
혜경이 좋은 사람이란 건 확실했다. 좀 순진하다고 할까 사람을 잘 믿는다고 할까, 그런 구석이 있어서 걱정하게 될 때도 있긴 하지만.
“그 이야기 들었어. 너도 서울대인가에 갈 거라면서?”
“계획한 대로 잘 되어주면 그럴걸.”
강민의 성적은 꾸준히 오르고 있다. 이대로라면 내년 초면 서울대도 문제없을 만한 성적이 된다.
에이리가 웃으면서 제안했다.
“그러면 아예 기회 봐서 강민단에 끌어들이는 건 어때?”
“강민단에?”
“그래. 계속 얼굴 볼 거니까, 아예 이쪽 사람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에이리의 표정에는 기대가 어려 있었다. 혜경이 마음에 든 김에 근처에 놓아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기사단을 운영했기 때문인지 에이리는 사람에 대해 욕심이 있는 편이었다.
“음, 생각해 보지.”
강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선배라든지, 친구라든지하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강민단의 활동이 확대될 걸 생각하면 놓치긴 아까운 인재다.
학벌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활용하기에 따라서 여러모로 도움이 될 만한 인재라는 것은 틀림없었으니까.
‘더해서 미녀고.’
강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 매를 버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대화는 그쯤해서 끝났고 에이리가 먼저 말했다.
“그럼 나가자.”
“응.”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
에이리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뭘 할 거야?”
“식사하고, 영화보고,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대련이나 할까?”
“좋아. 마지막이 가장 기대되는데.”
에이리가 아주 반가운 표정이 됐다. 누가 뭐래도 이 세계에서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은 강민밖에 없다.
강민은 후후후 하고 기쁘게 웃는 에이리를 보고 다소 난색을 표했다.
“좀 봐줘라.”
“오늘 얼마나 나를 잘 대접하는지 보고 결정하지!”
에이리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알아서 모시도록 합죠.”
강민은 과장되게 고개를 숙였다.
*
강민은 차에서 내렸다.
고급차였다!
바로 RK에서 보내온 차. 내린 곳은 물론 RK의 건물 중 하나로 훈련생부터 시작해 활동 중인 가수들까지 각종 트레이닝을 하기 위해 찾아오곤 하는 곳이었다.
규모는 5층으로 각 층마다 용도에 맞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깨끗하고 큰 곳이어서 RK가 돈이 많다고 느끼게 했다.
‘그래봐야 게임회사의 삼분지 일이지만.’
주가총액과 순이익을 따지면 물론 그렇긴 하다. 수출규모를 보면 게임의 십분지 일도 안 되는 중소기업! 그것이 한류음악의 진실!
그러니 강민이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주목도는 높지.’
다들 돈을 좋아한다면서 연일 화제가 되는 건 구멍가게 가요계라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강민은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기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때때로 유명한 가수로 보이는 이들이 보였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자면 항상 나오던 말처럼 아우라가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저들보다 훨씬 아름다운 여자를 몇이나 보아왔고 지금도 보고 있는 덕분 같았다.
그리고 강민은 약속 장소인 지하 방음실에 도착했다.
그곳의 방음실은 여럿 있었는데, 일대일 트레이닝이 가능한 곳 중 작은 곳이 오늘 강민이 방문할 곳이었다.
강민이 문을 열고 그곳으로 들어가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수란이 의자에서 일어나 강민 쪽을 바라봤다.
“안녕.”
“응. 안녕.”
두 사람은 멋쩍게 인사를 나누었다.
강민이 가방을 내리는 것을 보면서 수란이 말했다.
“그런데 깜짝 놀랐어. 네가 보컬 트레이닝을 해 준다고 하니.”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지. 갑자기 너랑 그 끈질긴 사장님하고 같이 와 있잖아.”
강민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수란이 미안한 얼굴로 애교를 부리며 사과했다.
“헤헤, 미안해.”
“쳇. 뭐 너도 조직의 인간이란 건 알고 있으니까 넘어가 줄게.”
한숨을 쉬며 강민은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 수란이 정색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응?”
화내야 될 건 난데 왜 쟤가 정색을 하냐는 표정으로 강민이 수란을 바라봤다. 그러자 수란은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내가 대표님하고 같이 널 만나러 갔던 건 어쩔 수 없어서는 아니었어.”
“그러면 왜?”
강민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같이 와서 설득하려 들지 알았다면 훨씬 쉽게 김경길을 떨쳐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질 못한 건 전적으로 수란 보기에 미안해서였다.
“그야…… 여러 번 말했잖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수란은 쑥스러운 표정이 돼서 말했다.
“아…….”
강민은 과거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해 냈다.
확실히 수란은 강민이 노래를 부르고 난 뒤 그의 노래 솜씨에 감탄하며 같이 일하게 되면 좋겠다고 이야기 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내 욕심이었던 거 같아. 미안.”
“지나간 일이니 됐어. 덕분에 좋은 용돈벌이도 될 테고.”
사실 용돈벌이 수준은 한참 넘는다.
단 강민은 원래 어마어마한 부자다. 게다가 지금 옆에는 호성도 있고, 통장에는 상당한 저금도 있어서 백만 원 정도로는 큰돈이란 생각도 안 들었다.
그야말로 용돈!
강민의 느긋한 태도에 신기해하며 수란이 물었다.
“정말 자신 있는 거야?”
“안 그러면 이런 걸 해?”
강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수란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나는 네가 그냥 받아들이면 자존심이 상하니까 핑계를 만들려는 것 같아서…….”
“아니, 그게 더 자존심 상한다.”
강민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호호, 미안. 그런데 이게 핑계가 아니란 건 정말 보컬 트레이닝을 할 거란 말야?”
“보컬 트레이닝이 뭔진 솔직히 말해 몰라.”
강민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데?”
수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네 목소리를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걸로 만들어 줄 거란 건 틀림없어.”
“어떻게?”
보컬 트레이닝이 바로 그걸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면 보컬 트레이닝인데 강민은 보컬 트레이닝을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목소리는 좋게 만들어 준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강민은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만만했다.
“그건 뭐 내가 하라는 대로 따라오면 돼.”
“응.”
별로 기대는 안 했지만 수란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손을 줘봐.”
“으응.”
수란은 손을 내밀었다. 강민이 그 손을 잡았다. 손을 맞잡았다는 데서 느껴지는 감촉과 온기에 수란은 살짝 부끄러워졌다.
“흠.”
하지만 강민은 진지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보일 뿐, 손의 감촉 같은 것은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동안 수란의 손을 가만히 잡고 있던 강민이 손을 떼어냈다.
“뭘 했던 거야?”
수란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별거 아냐.”
강민은 웃으며 얼버무렸다.
지금 강민이 한 것은 수란의 맥을 짚어 그녀의 몸속을 흐르는 마나의 흐름을 점검한 것이다.
그가 하려는 작업에는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나의 흐름이 미묘하게 틀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나에 대한 적응도라든가, 재질을 알아보는 것도 목적에 있었다.
그런 면에서 수란은 나쁘지 않은 재질에 깨끗한 맥을 가지고 있었다. 가르치는 데는 꽤 좋은 조건이었다.
“이제 앉아봐.”
수란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강민이 이어 지시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 봐.”
“후- 하-.”
깊게 숨을 내쉬었다. 보컬 트레이닝이라기보다 명상훈련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강민은 수란의 등 뒤로 갔다.
“좋아.”
그리고 양손을 그녀의 등에 대었다.
“잠시 그대로 있어.”
수란은 그 자세를 유지한 채 호흡을 지속했다.
강민은 양손을 그대로 그녀의 등 뒤에 댄 채 심호흡을 시작했고, 곧 수란과 그의 호흡이 일치했다.
이어 수란이 숨을 내쉴 때 강민은 양손을 내밀며 그녀의 등을 텅, 하고 짜릿하게 때렸다.
“앗!”
수란은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