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검은 세단이 도로를 달렸다.
달리던 세단이 속도를 줄이며 접근한 것은 어느 거대한 호텔이었다.
호텔 측 사람이 차를 보고 인도했고 거기에 따라 세단이 주차를 했다. 차가 멈춘 뒤 거기서 몇 사람이 내렸다.
검은 양복의 덩치 큰 사내 몇몇과 그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중년 남자 하나였다.
중년 남자는 바로 영동파의 보스였다. 그는 함께 온 부하들과 함께 호텔 안에 들어갔다.
호텔 로비에서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자가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는 얼른 보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그의 인사를 받으며 보스가 물었다.
“어르신은?”
“와 계십니다.”
보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어서 가자.”
“네.”
그들은 서둘러 움직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곧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층에는 고급 레스토랑이 운영 중이었다. 영동파 보스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종업원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예약된 자리가 이미 있었기에 그쪽으로 안내 받았다.
그 자리에는 부하에게 이미 들었던 대로 ‘어르신’이 앉아 있었다.
어르신은 보스와 크게 나이 차이는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약간 호리호리했고, 전신에게 엄격한 느낌이 풍겨져 나오는 사업가 타입의 사내였다.
“아, 왔나?”
그는 보스가 온 것을 보고 희미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영동파 보스는 굳은 얼굴로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니, 됐네. 자네가 요즘 힘든 형편이란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힘든 형편이란 그의 실수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영동파 보스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소, 송구합니다.”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가 오늘 여기 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큰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훨씬 더 오랜 기간 경찰에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이번이 두 번째이기 때문에 비록 꼬리 자르기를 했다곤 하나 경찰이 훨씬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것이 오늘 갑자기 모두 해제됐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자네에게 감사의 말을 들을 만한 일은 한 것이 없는데.”
하지만 어르신은 도통 모르겠다는 태도로 말했다.
보스가 실수했다는 표정이 됐다. 비록 그를 위해 힘을 사용하긴 했으되 표면화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 네 그렇지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게.”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고 나서 곧 식사가 전달되어왔다.
“아, 식사가 왔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말하게 다시 시킬 테니.”
“아, 아닙니다.”
식사는 레스토랑의 셰프가 특별히 만든 것이다. 그 맛에 대해서라면 보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르신이 시켰다는 것이다.
그의 앞에서 자기 의견을 지껄이며 이 요리를 물린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식사가 시작됐다. 아주 맛있는 식사였다.
그러나 영동파의 보스는 그 맛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르신이 말했다.
“자네에게 기대를 많이 했네.”
꿀꺽.
영동파의 보스는 침을 삼키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요즘은…… 실망스럽더군.”
“죄, 죄송합니다.”
영동파의 보스는 벌써 온 얼굴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이번에 경찰에게 시달리면서 계속 그 상태가 유지되길 바라고 있기도 했다.
어르신을 움직여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느니 그냥 고생이나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르신은 자상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사람이란 살면서 실수할 때도 있는 법이지.”
그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니네. 실수를 어느 정도 용서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면 실수한 쪽에서도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나.”
“그, 그렇습니다.”
“그래.”
영동파의 보스를 바라보는 어르신의 시선이 예리해졌다.
“그러니, 만일 실수를 용서했는데도 계속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나로서는 쳐낼 수밖에 없는 일이지. 그렇겠지?”
영동파의 보스는 그 말을 들으며 마치 칼날 같다고 했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가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이번에 또 실수를 한다면, 완전히 날려버리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이 외의 답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련되어 있던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맛있게 식사하게. 나는 먼저 일어나도록 하지.”
“네, 살펴 가십시오.”
떠나는 어르신의 등 뒤로 그는 인사를 했다.
***
시험이 끝나고 난 뒤 강민의 생활은 이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과외도 가끔 받으면서 공부를 하고, 강민단원들을 굴리면서 봉사활동도 가고, 또 모여서 공부도 하고, 때로는 다 같이 왁자지껄하게 놀고, 그리고 주말이 되면 에이리와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시시하지만 뿌듯한 청춘 생활!
하지만 그것이 폭풍우 전의 고요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강민은 아직 이지연을 위험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게다가 사건 진행을 살펴보니 경찰은 이번에도 영동파의 보스를 무혐의로 놓아주었다.
후속 사건이 없을 리가 없었다.
***
“여자 경호원?”
강민이 반가운 얼굴로 반문했다.
그는 지금 호성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둘 모두 비닐봉지를 한 봉지씩을 손에 쥐고 있었다.
강민단 기지의 보급을 위해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서 돌아가는 중이었다.
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리가 하나 있대.”
호성이 강민에게서 여자 경호원 자리가 혹시 있을지 알아봐 달라 부탁은 들은 지는 한 달 정도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꽤 친하게 지내고 있는 집의 경호대장에게 이야기 해뒀는데 어제 자리가 하나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 경호하는데?”
강민이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글쎄. 그것까진 안 물어봤지만, 뭐 유명한 사람 아니면 부잣집 부인 아니겠어? 여자가 꼭 필요한 걸 보면 같이 행동해야 하는 시간이 긴 것 같고. 아니면 걱정이 심한 사람이거나.”
“그렇겠지.”
강민도 같은 생각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호성은 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강민에게 내밀었다.
“관심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 봐.”
“아, 고마워.”
강민은 기쁜 얼굴로 그 명함을 받아들었다.
“뭘. 이런 것 가지고. 그런데 이런 건 왜 부탁한 거야?”
“왜라고 생각해?”
웃으면서 강민이 물었다.
맞춰보라는 듯이 장난스레 웃는 강민의 태도에 호성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혹시?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에이리 누나?”
“응.”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성이 입을 딱 벌렸다.
에이리의 모습과 강민의 설명에서 사실 약간의 위화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인터넷으로 사귄 한류팬이라니.
처음에는 그 설명이 들어 먹힐 수 있어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과 평소 에이리의 태도를 보면 곧 그런 게 순 뻥이란 걸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고 나서도 자연스럽게 형성된 관계에 금이 가도록 하는 일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모두들 입 다물고 처음 들었던 설명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마 경호원 자리를 원할 정도로 힘이 셌다니.
“그렇게 셌어?”
“세. 진짜로.”
강민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성은 이제 두 사람은 어떻게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건지 조금 이해가 갔다. 강민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니까.
사실 두 사람 모두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초인 조직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그게 더 그럴듯한 설명인 것 같기도 하고.
“와!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정도면 그냥 괴물 아냐?”
“그렇지.”
강민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리는 진짜 괴물처럼 강하다. 그랜드 마스터. 그녀가 본래 세계에서 얻었던 명칭이다.
한 자루 검만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강자. 설령 용이라 해도 그 검 앞에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현대사회의 전차와 같은 병기라 해도 그녀의 검이 쓸고 지나가면 뎅겅뎅겅 베이고 말 것이다.
물론 마나가 옅어서 본래 세계만큼 강할 수야 없겠지만.
호성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너보다?”
“아…… 일단 지금은.”
자존심이 상해 표정이 팍 일그러졌지만, 사실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호성은 더욱 경악했다.
“말도 안 돼…….”
“그렇지? 그런데 그게 사실이란 말이야.”
얼른 강해져서 에이리를 넘어야 할 텐데!
강민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역시 젊어진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
사설경호업체 에스텐의 인사 담장자인 서길준은 당황스럽다고 할까, 경악했다고 할까, 그런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특별 공채가 있어서 모인 참이었다.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친구가 꼭 좀 부탁한다고 해서 그가 소개한 사람의 면접을 보고 있는 참인데 상상을 초월하는 물건이 와 있는 게 아닌가.
면접의 기회만 주고 떨어뜨려도 좋다고 해서 온 것이긴 하지만 이건 좀 충격이었다.
그들 앞에 나타난 면접자는 여자일 뿐만이 아니라 외국인에 경호원을 하기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에이리였다.
“으흠.”
서길준은 헛기침을 하며 이력서를 살폈다.
생긴건 꼭 외국인인데 귀화를 해서 한국인이었다. 이름은 한국식으로는 에이리였다.
나이는 불과 열아홉.
본인은 무술과 경호의 경험이 있다고 말했지만, 너무 곱상한 용모도 그렇고, 체격도 늘씬하게 크긴 하지만 싸움에 적합하다고 보긴 어려웠다.
모델 선발이나 미인 대회에 나간다면 적합…… 아니,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일 것 같았다.
서길준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에이리를 보며 물었다.
“정말 경험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에이리는 당당하게 말했다.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당당한 게 당연했다.
“이력서를 보면 백지던데…….”
“백지인 게 당연한 나이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경험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술 쪽 말한 거죠.”
서길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경력이 너무 없어요. 하다못해 체육대회 같은 수상 경력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게 중요한가요? 이 자리에서 보여드리면 안 됩니까?”
에이리는 전혀 물러서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서길준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 말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능하다면 문제가 아니긴 하겠습니다만…….”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에이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길준이 그녀에게 물었다.
“사용하는 무술이나 무기가 있습니까?”
사용하는 무술은 홀리 피스트고 검술은 프로미넌스다.
하지만 정식 명칭은 이야기 해봐야 이상한 눈빛이나 받을 테니 대충 말했다.
“맨주먹도 괜찮고, 봉이나 검도 괜찮습니다.”
에이리의 전공은 뭐라 해도 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걸 못하는 건 아니다. 맨손 싸움에도 상당히 능숙했고, 봉 같은 것도 잘 다뤘다.
“그럼 맨주먹으로 우선 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