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침 조회시간이 끝나고 성적이 발표됐다.
그리고 선생님으로부터 이번 중간고사의 성적표가 배부됐다. 울적한 얼굴을 하거나 기쁜 표정을 하거나 모든 학생들이 각자의 성적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으하하!”
“후후후!”
“하하하!”
재철 일당이 교실을 포효로 떨쳐 울렸다.
강민이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기쁜 모양이군.”
“그럼! 성적이 올랐으니까!”
“그것도 십 등, 이십 등, 그런 시시한 숫자가 아니야!”
“세 자리 단위라고!”
한 문장씩 연달아 말한 그들은 허리에 손을 대고서 앙천대소했다.
“하하하!”
“후후후!”
“낄낄낄!”
마지막 하나는 앙천대소는 아니었다.
강민은 혀를 찼다.
“그만큼 니들 성적이 나빴다는 소리야. 기뻐할 수 있냐.”
확실히 수백 등씩 등수가 오른 것은 대단하지만, 그건 바꿔 말하면 방학 동안 공부한 것만으로 변해버릴 정도로 이전 성적이 막장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도 기쁜 건 기쁜 거지.”
“응.”
강민의 지적에 멋쩍은 표정이 됐지만 셋 모두 그래도 기쁜 기색을 지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강민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한마디 더하자면, 앞으로 성적은 절대 떨어지면 안 되고, 쭉 올라가기만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
모두 표정이 변했다. 기분 좋은 단점에 취해 있다가 자명종 소리에 이끌려 억지로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 같은 기분이라 할까?
“헉!”
“으으…… 적당히 칠걸 그랬나…….”
“다음번에 이번 이상이라니…….”
모두 쩔쩔맸다. 다들 오늘 이상으로 좋은 성적을 받아본 역사가 없기 때문에 이걸 넘어서야만 한다는 것이 심각한 스트레스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때 뒷문을 넘어서 또 하나의 강민단원인 강석이 왔다. 강민이 그를 보고 맞았다.
“아, 강석 왔냐.”
“응. 성적은 다들 어때?”
성적 발표날이다. 당연히 첫 화제는 역시 성적에 대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강석은 쩔쩔매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 여기 바보 트리오는 다들 수백 등씩 올랐단다.”
“다행이네. 너는?”
자기가 가르쳤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재철 일당의 성적 향상 소식을 받아들이고 강민에게 물었다.
“생각했던 대로 적당히 올랐어. 강석 넌 역시 일 등?”
“헤헤헤.”
멋쩍게 웃었다. 역시 일 등이란 소리였다.
“부럽다.”
“부러우면 공부해.”
우울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재철에게 강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요즘 그는 강민단원이 되고 나서 과거 셔틀 생활 당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개를 보이고 있었다.
강석에 이어 호성도 왔다.
“다 모여있네.”
“너도 자랑하러 왔냐.”
재철이 호성을 보고 투덜거렸다. 호성의 성적도 매우 뛰어나니 성적 발표를 하면 재철 일당에게는 자랑하는 꼴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강석도 있는데 자랑은 무슨.”
호성은 강석을 보며 전혀 그런 뜻이 없다는 듯이 말했고, 강석이 멋쩍게 말했다.
“뭐, 호성 너도 그 정도면 대단하지.”
“하하! 그런가?”
둘은 함께 웃었다. 서로서로 대단하다고 추켜세워주는 꼴이 짜증나서 재철 일당은 셋을 노려봤다.
“으으…….”
“우등생만 인정받는 더러운 세상!”
잠시 강석과 셋을 놀리며 놀던 호성은 화제를 바꿔서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 오늘 어쩔 거야? 곧장 기지에 갈 거야? 여유 좀 있으면 놀다 가자. 시험공부 한다고 요즘 빡빡했잖아.”
“뭐, 괜찮겠지.”
강민이 잠시 생각하다가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환호했다. 확실히 요즘 시험공부 때문에 꽤 여러 날을 힘들게 보냈으니까.
“그럼 학교 마치고 곧장 가자.”
“응.”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은 그 모습에 강민단이 꽤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았구나, 라는 실감이 들어서 작게 웃었다.
*
누가 셀까?
인류 역사가 시작되고 남자들은 이 질문에서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라면 어릴 때는 철인 28호와 다간의 대결부터 시작해서, 요즘은 겟타 엠퍼러 대 그렌라간의 대결로 이어졌고, 군대 다녀와서는 일본군과 한국군의 대결까지 끊어지지 않는 무한한 떡밥!
다른 나라라고 다를까!
서양에서라면 이미 슈퍼맨과 초사이언 중 누가 더 강할까 하는 것은 이 분야의 고전적인 싸움이 되었다.
밀덕들 사이에서라면 AK47 대 M16은 게시판 하나를 끝장내 버릴 수 있는 떡밥이다.
이건 시간도 가리지 않는다. 사자와 호랑이, 사자와 곰의 대결 같은 경우는 먼 옛날부터 관심거리였을 정도니까.
이렇게나 누가 센가 하는 문제에 관심 있는 것이 남자들인 만큼 인간들끼리의 대결에도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삼국지가 그렇게 인기 있는 것이 여포가 세니 장비가 세니 하는 문제에 답해주는 일기토 덕분이란 말이 다 있을까.
그러나 세상에 무술은 많고 무술에 수반된 규칙 역시 많아서 강자들끼리의 대결 역시 규칙과 상황에 따라 너무도 유불리가 다르다.
권투선수에게 레슬링 규칙으로 싸우라 하면 무하마드 알리라고 해도 아마추어 선수를 이길 리가 없지 않은가!
때문에 누가 센가 하는 문제는 현대에 와서도 속 시원하게 풀린 적 없이 무수한 남자들의 투쟁심과 호기심에 불만 붙이고 있었다.
그런 호기심과 투쟁심에 답해주려는 시도가 없을 리 없다.
그건 장사가 되니까!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종격투기!
여러 협회가 있고, 그들 협회의 주도하에 소속된 선수들이 최소한의 규칙만을 가지고 맨손으로 싸운다!
어떤 무술의 사용자라도 상관없다!
링 위에서는 오직 실력이 승부를 판가름할 뿐!
각자의 스타일에 맞춰 각자의 싸움을 하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적지 않은 인기를 끌었고, 힘 좀 쓴다 하는 이들을 무수히 끌어들이며 오늘도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
한국 WFF 사무실에서는 대표인 이종찬이 의자에 앉아 결산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우울했고, 한동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보고서를 옆으로 홱 내던졌다.
“젠장. 또 표 판매량이 줄었어!”
지난달에 비해 10%가 줄었다.
한 달 만에 줄어든 것 치고는 정말 뼈아픈 손실이다.
옆에서 잡무를 보고 있던 실장 유만이 종찬을 보고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이달은 대단한 이벤트도 없고 고만고만한 싸움이니까요.”
“지난번 잭 곤하고 빌리 챠트의 싸움도 마찬가지였어. 둘 다 알아주는 주먹들인데.”
유만이 한 말에 종찬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빌리 챠트와 잭 곤은 둘 모두 협회 랭킹 50위 안쪽의 선수로 호쾌한 경기 스타일과 시합 이외의 재미있는 쇼맨십으로 팬층이 두꺼운 스타 플레이어다.
하지만 지난달 그들의 한국 초청 대결은 기대보다 못한 결과를 내놓았다.
한국에서 WFF의 인지도와 시장을 확대시키기 위해 일부러 불러들여 성사시킨 대결인 걸 생각하면 실패였다.
시장이 활성화된 국가에서 시합을 했다면 족히 다섯 배는 표를 팔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계권 같은 것으로 어느 정도 충당은 했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유만이 말했다.
“한국은 애국주의 마케팅이 중요한 탓이 아닐까요. 한국 출신의 좋은 선수가 없으면 관심을 유지시키기 힘들죠.”
사실 한국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할 때는 월드컵 때뿐이다.
축구만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떤 스포츠이든 그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은 그 스포츠가 국가 대항전일 경우 정도다.
딱 하나 야구만 국가를 대표하는 승부가 아니라도 장사가 된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선수 발굴에 힘쓰고 있긴 한데…….”
종찬은 유만의 말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이며 울적한 표정이 됐다.
애국주의 마케팅이 가능하려면 역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협회에 소속된 한국인 선수들 가운데는 그럴 만한 인재가 없다.
유만도 종찬의 고민을 안다.
“전에 하나 밀어줬던 녀석은 아예 그만뒀고, 지금은 쓸 만한 녀석이 없다 그거죠.”
하나 괜찮다 싶은 선수를 발굴했던 적이 있다. 특히 신체조건이 아주 좋아서 장기 흥행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때가 협회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그 녀석이 화제가 되면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시작부터 협회는 막대한 중계권료는 물론 표 판매도 가능했다.
하지만 몇 번 싸워 전적을 쌓은 다음에는 금세 퇴물이 되고 말았다.
싸움은 박력이 없고, 그렇다고 전적이 좋은 것도 아니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졌고, 그 선수에 대한 주목이 사라지면서 협회 자체에 대한 주목도도 죽고 말았다.
이후는 근근이 마니아층을 기반으로 꾸려오는 형편이었다.
“그래. 밀어주고 싶어도 전적을 올릴 수 있는 녀석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폐물 선수랑 시합 배정해서 이기게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력갱생이 가능한 놈이 있어야 밀어주기도 할 거 아냐. 젠장.”
지난번 밀어주던 놈이 속 빈 강정이라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기억이 종찬은 너무 뼈아팠다.
“동양인은 체급에서 부족하니 아무래도 좋은 선수가 나오기 힘들 수밖에 없죠.”
사실 싸움에서는 체급이 깡패다.
어쩔 수가 없다!
만화나 영화에서는 쥐톨만 한 주인공이 거인을 상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재빠르게 상대해 이기는 모습이 나오지만, 그건 영. 화. 니. 까. 가능한 것이다.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선수들의 세계에서 체급이란 정말 큰 이점이 되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넘어서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동양인 중 좋은 선수가 잘 나오기 힘든 것은 별수 없다. 선천적으로 좋은 체격을 가진 사람이 드무니까.
같은 체중이라 할지라도 근육질 가득한 흑형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에이!”
종찬이 답답한지 짜증을 부렸다.
유만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좋은 한국인 선수가 없는 것만이 이유는 아닐 겁니다.”
“그럼?”
“진짜가 나타났다는 점도 크지 않을까요?”
종찬이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진짜라는 말이 심기에 크게 거슬린 것이다.
“진짜라니? 우리야말로 진짜지! 여기서 더 나가면 그게 로마시절 콜로세움 검투사지 스포츠가 되냐.”
현재 WFF는 낭심이나 눈이나 안면을 비롯한 치명적인 장소에 대한 공격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면적인 공격방식을 허용하고 있다.
실전에 가장 가깝게!
그게 이종격투기의 모토이기도 하다.
실제 종찬이 화를 내는 것처럼 여기서 더 나가면 그건 더 이상 스포츠가 아니게 된다. 정말 피 튀기는 쌈박질이 된다. 그런 건 스포츠 산업으로서 성립할 수가 없다.
유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요. 누가 더 세냐는 의문에 답해주는 황당한 존재가 나타났다는 거죠.”
“아…… 장갑맨?”
종찬도 지금 유만이 한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싫더라도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장갑맨은 요즘 대단한 화젯거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어마어마하던데요.”
종찬은 코웃음을 쳤다.
“아마추어 상대로 싸우는 게 뭐가 잘나서. 우리 협회 소속 선수 중에도 그 정도는 할 녀석들 널렸다! CCTV같이 희미한 영상으로 여럿 상대하는 걸 보니 대단해 보이는 것뿐이야.”
유만은 고소를 지었다.
장갑맨의 강함이 과장되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그게 인간의 강함을 초월해 있는 수준이란 게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심지어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그 점에서 동의했다.
유만은 달래듯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든 보이는 모습만큼은 어마어마하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종찬은 그건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영상의 조악한 품질에도 불구하고, 장갑맨이 활약하는 모습에는 숨막히게 하는 박력이 있었다. 그만큼 잘 싸웠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사람 인기가 어마어마하거든요. 진짜 이야기 속 영웅이 나타난 거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종찬이 유만을 바라보며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냐는 듯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