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하아.”
이지연은 도서관 옆의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국은 독서율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라 평상시에는 한산했지만, 지금은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느긋하다…….”
내일도 시험이 있는 고등학생 소녀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이지연은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여유로웠다.
이지연은 현재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상태였다. 대신 강민에게 생활비를 비롯한 필요한 돈을 도움받고서 정해진 루트를 정해진 시간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적을 끌어내기 위해.
그런데 악당을 끌어내기 위해서라곤 해도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이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몇 년 만인지 모른다.
돈 걱정도 없었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다.
꿈만 같았다.
앞으로도 줄곧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지연은 곧 현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끝나면 돌아가야 할 텐데…….’
편의점 사장님에게는 사정이 있어 한동안 쉬어야 한다고 끝나면 돌아올 테니까 꼭 다시 고용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지연의 사정이 어떤지도 알고 그녀의 성실함도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편의점 사장은 쉽게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모르는 법이다. 이쪽 사정에만 다 맞춰서 잘 돌아갈 거라 확신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런 면에서 걱정이 아주 없을 수는 없었다.
‘빨리 잡아야 할 텐데.’
일단은 그게 바로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였다.
그래야 얼른 편의점에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이런 느긋한 시간을 좀 더 즐기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의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한숨 돌린 이지연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기왕에 이런 곳으로 왔으니 역시 시험 공부를 해둘 생각이었다.
***
조사는 끝마쳤다.
돈은 꽤 많이 들었다.
아까웠지만 직접 나서서 조사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여자애의 신고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외였던 것은 여자애의 반응이다.
집으로 나오는 것도 두려워하고서 덜덜 떨며 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학교를 꾸준히 나오고, 심지어 밖으로 부지런히 나돌아다니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 두려워서 집에 붙어 있지 않은 쪽을 택한 것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집 근처에서 그런 일이 생겼으니까.
하지만 혹시 함정 수사 같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한 조사 역시 철저하게 했다.
다행히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다. 일단 경찰이 움직이지 않았다. 경찰이 움직이지 않았자면 그 소녀는 지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사설 경호원 같은 걸 사용하기에 그 소녀는 아주 가난하다. 너무 가난해서 대체 이해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왜 이런 비싼 돈을 들여서 그 아이를 죽이려는 자가 있는지 의아했다.
‘나야 돈이나 벌면 그만이지만.’
왕수천은 히죽 웃었다.
그는 주변을 살폈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이었다.
밤이 되면 소녀는 항상 이곳으로 걷는다. 소녀가 살던 곳과 같이 궁핍해 보이는 곳은 아니지만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급 주택가인 걸로 보이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이곳으로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여기란 말이지.’
부자 나리들은 안전에 관심이 많은 만큼 감시 카메라 같은 것도 있을 테고, 그걸 두려워하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왕수춘은 혀를 찼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어차피 목표는 강도가 아니라 살인이다. 일을 저지르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한국인이 아니다. 그는 외국인. 얼굴도 지문도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경찰들이 쉽게 수사망을 좁혀 체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흥! 무능한 것들.’
왕수천은 한국 경찰들을 무능하다고 판단했다.
주민등록증과 지문이라는 아주 편리한 도구를 가지고서 수사를 하니까 한국의 치안이 뛰어나다고 자랑해대는 모양인데, 그런 도깨비 방망이 같은 걸 가지고 그 정도도 못하면 창피해할 일이다.
그리고 많은 외국인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한국에서 그건 점점 더 허점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왕수천은 한국 경찰에 대해 염려하지 않았다.
걱정해야 한다면 지난번에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그 기이한 힘!
하지만 그것도 조사를 통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같은 학교 학생들을 돈으로 회유해 돌멩이를 던지거나 가볍게 몸이 충돌되는 정도로 그 힘이 작동하는지를 알아봤다.
지난번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면 지난번 같은 힘을 이번엔 사용할 수 없거나 아니면 그 정도 충격으로는 발동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럼 처리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번에도 검을 휘둘러보고, 안 되면 칼이 아니라 접근해서 목을 졸라버리면 된다.
빠르게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으니 문제없이 여자애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칼로 베는 걸 못하는 건 아쉽지만 말이야.’
골목의 어둠에 앉은 왕수천의 눈동자가 악의에 번뜩였다.
***
도서실에서 공부를 끝마친 이지혜는 강민이 정한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멀리 돌아가는 길이지만 아르바이트도 없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도 좋아 이렇게 길게 돌아가는 길이 최근에 지연은 마음에 들게 됐다.
그리고 한 골목에 들어갔다.
골목 양옆으로는 높은 담장을 가진 큰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부럽다.’
지연도 저런 곳에 살고 싶었다.
아니 저 정도는 안 되어도 오늘 이렇게 지내는 것만큼은 하고 싶었다.
‘하아아아…….’
그런 생각을 하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나마도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이라도 생기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리 없는 꿈이다.
그나마 이지연은 로또도 하지 않는다. 헛된 희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개를 흔들며 골목을 걸었다.
그때였다. 건물 사이의 좁은 어둠에서 불쑥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히익!”
이지연은 비명을 질렀다. 지금 등장한 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이때까지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 거리를 돌아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반응하는 건 역시 별개였다.
무서웠다.
눈물이 나올 만큼!
살인자가 악의에 눈동자를 번뜩거리며 이지혜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벌벌 떠는 이지연을 보며 즐거운 듯이 웃더니 달려들었다.
“훗!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꺄악!”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자를 보고 이지연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실드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팍!
공기가 갈리는 소리.
“읏!”
살인자의 당황하는 소리.
지연은 기쁘게 눈을 떴다. 그리고 놀란 눈동자가 됐다.
장갑맨이 나타나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키가 아주 훤칠하게 큰, 여자로 보이는 외국인이었다.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하고 있어서 자세한 용모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연을 향해 칼을 휘두르던 남자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향해 비웃듯이 말했다.
“그래. 이번엔 놓치지 말아야지.”
“이년이!”
그는 거칠게 외치며 다른 손을 움직였다. 거센 바람 소리가 나며 그의 잡히지 않은 손이 여자를 향해 날아갔다.
여자는 그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관절을 꺾으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몸을 유연하게 돌려 꺾이는 걸 막더니 역으로 여자를 내던지려 했다.
“오?”
여자는 감탄한 듯한 목소리를 냈다.
뛰어난 살인자의 움직임에 지연 역시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그래 봤자!”
여자는 호쾌하게 외치더니 강하게 몸을 뒤로 당겨 던져지는 것을 막고는 살인자의 품으로 파고들어 가슴에 팔꿈치를 먹였다.
뻐억!
요란한 소리가 났다.
완벽하게 공격이 들어간 것이다. 살인자의 몸이 붕 떴고 그는 고통에 혀를 빼물었다.
“켁!”
왕수천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완전히 바닥에 떨어진 것을 보고 에이리는 선글라스 안쪽에서 살짝 표정을 찡그렸다. 제법 뛰어난 움직임이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암살자였던 모양이다. 마나가 없는 세계에 사는 자의 움직임 치곤 놀라울 정도였다.
어쨌든 이미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자는 걱정거리가 아니다. 에이리는 몸을 돌려 아직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연을 봤다.
“괜찮니?”
“괘, 괜찮아요.”
이지연은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리는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고맙습니다…….”
“천만에.”
이지연은 에이리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그녀는 흘깃흘깃 에이리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누구신지…….”
“장갑맨, 알지?”
“아!”
이지연의 눈이 커졌다.
본인이 아니었을 뿐 장갑맨과 연관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이런 일에 괜히 개입할 사람이 이렇게 우연히 나타날 리는 없다.
더구나 살인자를 때려눕힐 때 보여준 놀라운 실력 하며!
장갑맨이라 말하자 알아듣는 눈치이자 에이리는 웃었다.
“맞아. 그 오지랖 넓은 녀석이 보냈지.”
“감사합니다!”
“아냐. 귀여운 여동생 지키는 것 같아서 나도 즐거웠으니까.”
고개를 저어 말하면서 에이리는 바닥에 꿈틀거리는 왕수천을 한 손을 잡은 다음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마치 가벼운 스티로폼을 옮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지연은 장갑맨의 친구답게 놀랍게 힘이 센 모양이라고 감탄했다.
에이리는 지연을 향해 턱짓하며 권했다.
“자, 그럼 가 봐. 나중에 연락할게.”
“네.”
이지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러면 나도 어서 움직여야 하겠군.”
가볍게 중얼거리고 에이리는 약속한 장소로 움직였다. 가볍게 땅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린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새 같아서 도저히 인간의 동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
강민단에서 강민단원들은 거실에 다 같이 모여 공부하고 있었다.
“으으으…….”
“끙.”
“어렵다…….”
재철 일당이 고통을 호소했다.
공부하는 게 이젠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괴로웠다.
하지만 괴로운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두 사람, 호성과 강석 역시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이게 뭐가 어려워!”
“다시 설명해 줄게.”
전교 최상위에서 노는 학생과 전교 최하위에서 노는 학생은 비록 학년이 같더라도 같은 학년으로 취급할 수 없다.
그만큼 수준차가 격심한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가르치는 게 가능한 수준이니 정말 많은 발전을 했다 말할 수 있었다.
“으하함.”
그때 강민단의 여러 방 중 하나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같이 공부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방에 들어가 혼자 공부하고 있었다. 거실이 넓다곤 해도 다섯이나 모여 공부하는데, 필요도 없이 끼어봐야 혼란스럽기만 하고 말이다.
끙끙대는 단원들을 보고 물었다.
“잘 돼 가냐?”
“보면 뻔한 거 아냐?”
호성이 퉁명스레 말했다.
고생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기야.”
고개를 끄덕이며 강민은 소파에 앉았다.
그때 강민의 주머니에서 음악 소리가 났다. 연락이 온 것이다.
강민은 폰을 꺼내 확인했다. 느긋하던 그의 표정이 일시에 변했다.
에이리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확보 완료.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