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연약한 소녀를 죽이려고 한 놈이다. 상황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청부살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었다.
“호호! 그럼 오케이!”
에이리는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녀는 강민을 바라보면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물었다.
“아, 그런데 알바라고 하니 보수는 있는 거겠지?”
“일당 20만 원 정도씩 어때?”
에이리는 금세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공공사업이니까.’
강민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불경기 때 정부에서 돈을 뿌려 경기를 활성화 시키듯, 강민이 자존심 강한 에이리를 재정적으로 보조하는 것이 이번 호위의 목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사실 에이리의 실력이면 그 정도 금액은 도리어 아주 싼값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돈이 많은 모양이지?”
경호료가 두둑한 데 관심을 가지고 에이리가 물었다.
강민은 물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건 아냐. 도리어 내가 이번에 여러모로 도와주게 됐을 정도니까. 찢어지게 가난한 모양이더라.”
“너무 자선사업 같은데.”
에이리가 살짝 찌푸린 표정이 됐다.
에이리는 강민이 그 소녀를 돕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선행은 도리어 환영이다.
하지만 재정은 무한한 것이 아니고, 어려운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돌려받는 것 없이 돕기만 하면 자칫 더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는데 조금만 돕고 끝나고 말게 된다. 그것이 에이리의 걱정이었다.
“그래도 인연이 닿았으니 말야. 착하기도 하고.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
강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리가 두 눈을 번쩍이며 칼로 찌르듯이 이어 물었다.
“그리고 미인이겠지?”
“그게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면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겠지.”
멋쩍게 웃으며 고백했다.
이지연은 대단히 아름다운 소녀다. 물론 그것이 그녀를 돕는 주된 이유는 아니다. 그래도 돕고 싶다는 마음에 약간의 비료가 된 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역시.”
혀를 차며 에이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굳은 얼굴로 강민이 맹세하듯 말했다.
“너한테 얻어맞을 짓은 안 해.”
“그런 걱정은 안 해. 너도 바보가 아니니까.”
강민은 이어서 에이리의 아름다운 용모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뭐 욕심 부릴 이유가 없기도 하고.”
“기특한 소릴 다 하네.”
강민이 한 말에 에이리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사실이니까.”
“후후! 하는 거 봐서 한둘 정도는 봐줄 수도 있어. 어차피 여기 살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너도 어엿한 로드고.”
기분이 좋아진 듯 에이리는 말했다.
“고맙긴 한데 진짜야. 별로 그럴 생각은 없어. 내가 발정난 개새끼도 아니고.”
“이상하네. 남자는 항상 발정난 개새끼라던데.”
진지하게 찌푸린 표정이 되어 에이리가 말했다.
“상당 부분 사실이지만……. 그래도 신사 역시 얼마든지 있어!”
강민이 나약하게 반발했다.
“뭐, 그렇다고 해 두지.”
“그리고 자선사업이라는 지적 말인데, 꼭 그런 건 아냐. 다 긁어낼 구석은 있어.”
강민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말하자, 에이리는 피식 웃었다.
“아, 그건 나도 잘 알아.”
“착한 사람을 미끼로 악당을 낚아 일확천금을 벌다니. 역시 훌륭한 사업 아냐?”
“그렇긴 해.”
강민의 말에 동감해서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은 이세계에서 여행을 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은 가진 게 없으니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 도와봐야 기대할 수 있는 보수는 뻔하다!
그래도 일을 마치면 항상 막대한 보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악당들을 턴 덕분이었다.
악당들인 만큼 알뜰살뜰하게 모아둔 게 많은 경우가 대부분!
그 원칙은 현대에 와서도 변한 것이 없었다. 강민과 여행 다닐 때 여러 차례 한 일인데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 즐거움이 있었다.
“아예 나도 이쪽으로 나갈까?”
“그건 자제 좀. 장갑맨만으로 충분히 시끄러우니까. 그리고 원래 있던 세계와 달리 우리 주변은 우리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고.”
강민이 에이리를 말렸다.
그런 일을 하게 되면 눈에 띄게 되고 만에 하나 정체가 들키게 되면 초인인 강민이나 에이리야 아무 문제가 없더라도 주변 아는 사람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러니 가능하면 눈에 띄는 건 평온한 일상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더라도 피하는 게 좋다.
“그건 그렇네.”
“뭐, 그래도 이런 일이 생길 거 같으면 언제나 도움을 구할 테니 기대해.”
“기대하도록 하지.”
강민이 한 말에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찰칵찰칵 초침 넘어가는 소리만 교실을 민감하게 채웠다.
교탁에는 선생님이 엄격한 표정으로 서서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책상에 앉아 끙끙대는 표정으로 시험문제를 풀었다.
딩동 댕동.
종이 쳤다. 시험시간이 끝났다.
“넘겨라.”
선생님은 무정하게 말했고, 학생들은 늘상 그러하듯 맨 뒤에서부터 시험지와 답안을 넘겼다.
시험지와 답안을 모두 모은 선생님은 장수를 확인하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내일 시험도 잘 쳐라.”
그리고 나갔다.
반을 가득 메우던 긴장감이 그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학생들은 가방을 메기 시작했고, 서로 간에 모여 시험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민도 그런 풍경에서 별 차이는 없었다. 그는 재철 일행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여어, 잘 쳤냐?”
“그럭저럭.”
“적어도 지난 시험보다야…….”
“그래. 지난번보다는 나을 거 같아.”
우울하면서도 기쁜, 미묘한 표정으로 재철 일당은 말했다.
강민은 낄낄 웃었다.
“지난번보다 못하면 니들이 인간이냐. 정말 인간의 탈을 쓴 뭐 정체를 알 수 없는 신기한 생물이겠지.”
재철 일당도 그건 사실이라 별말을 못 했다.
세 사람의 성적은 매우 좋지 않아서 약간만 공부해도 거기서 대폭 등수를 끌어올리는 것 따윈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방학 동안 강석과 호성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둘 모두 학교에서 최상위권을 다투는 수재들이다.
거기다 더해 결정적으로 강민이 집중력과 학습효과를 올릴 수 있는 호흡법을 약소하게나마 가르쳐 뒀다.
그런데도 성적의 대폭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강민과 재철 일당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주변 학생들은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개학 이후 재철 일당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한층 공포심을 띄었다. 3학년을 때려눕히고 학교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학교에서 셔틀이 사라지긴 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런 건 신경을 쓰지 않고 만화에나 나올 법한 새로운 주먹 전설을 썼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재철 일당을 무섭게 생각했다.
한데 그런 무리들과 강민이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신기할 수밖에!
그리고 뒷문을 통해 다른 반에서 강석이 가방을 메고 안으로 들어왔다.
강민을 찾아서였다. 그는 반갑게 강석을 맞았다.
“아, 강석. 너는 어때?”
“나는 뭐 평소대로였어.”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강석의 평소대로라는 말은 도저히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럼 전교 일 등이란 소리군.”
강석은 평소 전교 1등을 하니까!
“부럽다!”
“그러게!”
강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재주가 이것뿐이니까. 그런 강민 너는?”
“지난번보단 잘 나왔어.”
강민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실제로 그는 지난번 성적을 뛰어넘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꼈다. 특히 수학 부분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
확실히 혜경은 뛰어난 교사였다. 과외를 받은 보람이 있었다.
“추월당하는 걸 걱정해야 하나…….”
강석은 진지하게 걱정하는 듯 말했다.
강민은 피식 웃었다.
“하하! 그 정도는 아니고.”
강민의 지난번 시험 성적은 전교 100등 안쪽이었다. 이번에도 그전보다 성적이 상승했다면 50등 안까지 올라왔을지도 모른다.
최종적으로는 강석에 비견할 수 있는 성적이 되겠지만 지금은 댈 만한 성적이 아니었다.
“자, 그럼 오늘도 다 같이 기지에 모여 시험공부를 하도록 할까.”
“호성은?”
강석이 호성이 보이지 않는 데 의아해하며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식으로 강민이 말했다.
“당연히 그 녀석도 와야지.”
양반이 아니라고 증명하듯 호성도 그때 뒷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다 모였네.”
“그래. 어서 가자.”
“응.”
그들 다섯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학생 틈을 뚫고 복도를 걸으면서 강민은 문득 생각했다.
‘에이리는 잘 하고 있으려나.’
*
“으응?”
에이리는 귀에 새끼손가락을 넣고 긁었다. 갑자기 귀가 간지러워서였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한 고등학교의 근처 인적이 드문 골목.
바로 이지연의 학교였다.
에이리는 강민에게서 일을 의뢰받은 즉시 작업에 착수했고, 벌써 이 주간 이렇게 눈에 띄지 않게 경호를 하는 중이었다.
사실 그녀는 눈에 띄지 않기엔 너무 아름답지만, 그래서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모자도 썼고, 선글라스도 했고, 몸매가 드러나지 않게 폭이 넓은 양복도 입었다. 그러고서도 신체 비율이 압도적이라 눈에 완전히 안 띄긴 어려웠다.
하지만 거기서 더 모습을 눈에 안 띄게 만들려면 도리어 수상한 사람 취급받기 딱 좋을 만큼 기괴한 차림이 되는 만큼 그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받으면서 에이리는 호위 임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이 주간 이렇다 할 일은 없었다.
이지연의 주변은 평화로웠다. 시험날인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위험은 언제 어디에서 닥칠지 모르는 법이지.’
이야기 들은 대로라면 이지연을 노리는 세력은 보통 끈질긴 것이 아니다. 지난번 실패해서 도망간 정도로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성실하게 매일매일 근처에서 호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곧 학교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시험날이라 다들 일찍 마친 것이다.
입구 근처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서 에이리는 이지연을 기다렸다.
곧 이지연이 나왔다.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에 비하면 꽤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강민이 지켜준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덕분이었다.
‘역시 귀여운데.’
에이리는 지연의 얼굴을 보고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동생 삼으면 좋을 거 같은 인상이라 할까.
미인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 처음 봤을 때 지키는 보람이 있겠다 싶어 좋아했다. 기사단에 있는 후배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에이리의 관심 어린 시선과 달리 이지연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리는 용모 자체는 대단히 눈에 띄지만, 자리를 잘 잡을 줄 알고 기척을 조절할 줄 알기 때문이다.
에이리의 앞으로 이지연이 지나갔고, 에이리는 그녀를 쫓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