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사실 별거 없다. 하루 8시간 훈련에, 삼시 세끼 왕성하게 먹고, 무수한 몬스터 때려잡으려 다니면 된다.
평범한 인간에게 불가능한 점이란 걸 제외하면 완벽한 관리법이다.
하루 세 시간만 자고 공부하면 서울대 갈 수 있다는 것만큼이나!
“뭐 나름대로 고생이 많은 모양이에요.”
“그렇겠지.”
에이리의 몸매를 생각하며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런 몸매를 갖추고 있으면서 유지에 고생하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다.
이어서 강민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아! 혹시 누나 시간 있어요?”
“시간? 왜?”
깜짝 놀란 얼굴로 혜경이 물었다. 얼굴도 붉어졌다.
강민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 그게 이번에 에이리가 집 구한다는데 저는 잘 모르니까 같이 집 구하는데 도와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요. 마침 같은 여자겠다 성인이겠다, 여러모로 잘 아실 것 같아서.”
“그, 그래. 뭐, 도울 수 있지.”
고개를 끄덕여 혜경은 그러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가슴 한 구석이 이상하게 약간 서운했다.
“고마워요.”
“아니야.”
빙그레 웃는 혜경의 얼굴을 보면서 강민은 주머니를 뒤졌다.
“아, 물론 그냥 도와달라는 건 아니에요. 사례비도 드릴 거고…… 그리고 이거.”
강민이 주머니에서 내민 것은 편지 봉투였다.
“뭐니?”
“둘이서 같이 맛있는 거라도 드시라고.”
멋쩍게 웃으며 강민은 말했다. 혜경은 사양하지 않고 그 봉투를 받으면서 놀리듯 말했다.
“후후, 에이리 많이 신경 쓰네.”
“그야 친구니까요.”
강민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그렇구나.”
혜경은 문득 에이리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강민은 문득 벽에 걸어놓은 달력을 보고 신경 쓰이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이제 곧 방학도 끝이군요.”
“그러네.”
“누나는 재밌게 보냈어요?”
아쉽게 혜경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아르바이트하느라 바빴어.”
“흠! 저도 알바는 아니지만 할 일이 많아서 좀 바쁘긴 했죠.”
씨익 웃으면서 강민은 말했다.
정말 그랬다. 한 일이 적지 않았다. 강민단도 만들어서 이끌었고, 장갑맨이란 요상한 별명도 얻어 활약하고. 지연이라는 여자애도 구했고, 또 이세계에서 에이리도 왔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새학기 돼도 열심히 해.”
“누나도 새학기 돼도 잘 부탁해요.”
강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경은 물론이지, 라고 말하며 웃었다. 2학기가 되어서도 강민을 계속 맡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
혜경과 에이리는 서울시의 한 레스토랑에 있었다.
인터넷에서 많은 블로거들이 맛집이라고 추천한 곳이었다.
보통 그런 곳은 사기가 적지 않지만 꾸준히 호평이라 믿을 만하다는 평판을 얻은 곳이어서 오전에 집을 구하고 나서 혜경은 에이리 서울 구경을 시켜 줄 겸 여기로 데리고 왔다.
오는 와중에 적지 않은 남자들이 두 아름다운 미인이 함께 걷는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음은 물론, 실제로 말을 걸어 번호를 따가려 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번호를 얻는 데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레스토랑의 음식은 평판대로 훌륭해서 에이리는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미식 기행만 해도 평생 재밌게 살 수 있는 동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신기한 재료와 조리법이 어찌나 많은지!
뭐 그래도 최강은 역시 MSG였다.
한동안 자잘한 잡담을 하며 두 사람은 밥을 먹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에이리가 혜경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아니야. 이런 걸로 무슨…….”
빙그레 웃으면서 혜경은 고개를 저었다.
“혜경 언니 아니었으면 많이 고생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좋은 곳이 없을까 찾아봤을 텐데…….”
“이 정도면 충분해요. 강민네 집하고도 가깝고, 주변에 돌아다니기도 편하고.”
아쉬워하는 혜경에게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표정을 보여주면서 에이리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혜경이 살짝 우울한 표정이 됐다.
“응, 그래…….”
에이리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겠어요?”
“응? 뭔데?”
“혹시, 민이 좋아해요?”
에이리가 물었다.
“민이?”
혜경은 지금 에이리가 무얼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강민.”
에이리는 더한 한 마디는 에이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강민을 좋아하냐니! 강민은 고등학생인데.
너무 놀라서 혜경은 먹던 게 코로 다 올라올 지경이었다.
“켈록, 켈록.”
켈록거리며 한참 기침을 하던 혜경은 겨우 호흡을 되찾고는 원망 어린 눈으로 에이리를 쳐다봤다.
에이리는 싱글싱글 웃으며 재밌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아, 역시 좋아하는 모양이군요.”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너무 당황한 혜경은 그저 숨이 턱 하니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 아니…….”
당황스럽긴 한데 화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는 게 좋아요.”
일방적인 에이리의 말이 계속됐다. 에이리는 표정을 조금 찌푸렸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꺼내놓았다.
“그 녀석 바람둥이거든요.”
“바람둥이야?”
혜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 보면 그럴 거 같지 않나요?”
“그럴 거 같은 기색은…….”
혜경은 중얼거리다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말하면서 쭉 떠올린 강민의 모습들이 떠오르면서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강민은 훤칠하게 키도 크고, 성격도 좋고, 머리도 좋고, 또 남자답다. 여기까진 좋은데 또 성실한 성격처럼 보이진 않았다.
어느 쪽이냐면 순애파라기 보다는 바람둥이에 가까워 보이긴 했다.
바람둥이가 아니면 괜히 여자들 마음에 불 지르고 모른 척할 나쁜 놈인 거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어진 에이리의 말은 한층 충격적이었다.
“참고로 제가 그 녀석 애인 중 하나지요.”
“애인 중 하나…….”
혜경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별로 놀라진 않았다. 사실 좀 수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으니까.
아무리 친구라도 해도 고등학생이나 되어 여자애를 며칠이나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지내게 한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고선 힘든 일이다.
더구나 평소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너무 친숙하기도 했다.
아쉬움이 마음 한 구석이 이상하게 무거웠고 우울했다.
그런데 놀라움의 파도는 다음 순간 혜경의 머리를 강타했다. 익숙하지 않은 희한한 단어가 있었던 것이다.
“……중 하나?”
그렇다!
에이리는 자신이 그냥 애인이라고 하지 않았다.
애인 중 하나라고 했다!
애인이 더 있다는 말이다.
“그래요.”
별거 아니라는 듯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째서!”
너무 놀라서 혜경이 물었다.
대체 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강민이 나름 멋지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강민과 그냥 단순하게 비교해서 에이리를 대면 에이리가 훨씬 아깝다. 이건 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단순히 애인도 아니고 애인 중 하나라는 굴욕을 에이리가 참고 있다니. 그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건 좀 설명하기 곤란한데요. 그게 당연한 생활을 해 왔다고 할까?”
“마, 말도 안 돼…….”
그게 당연한 생활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에이리는 당황한 혜경의 얼굴을 보면서 얼른 설명을 이었다.
“아, 그것 때문에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해서 강민이 나쁜 놈…….”
나쁜 놈인 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에이리는 참았다.
“……인 건 아니에요. 강민은 저만 사귀고 있는 게 아니지만, 그건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냥 먼저 반한 게 실수였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 게 당연한 상황이기도 했고.”
씁쓸하게 고개를 흔들며 에이리는 그렇게 말했다.
정말 먼저 반한 게 실수였다.
하지만 세계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강민은 너무 멋있었고, 또 능력도 있었기 때문에 곁에서 함께 싸우면서 반하지 않는 게 더 힘든 일이었다.
“여자관계 같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고. 다만 여기서는 무척 안 좋아 보일 수도 있다는 정도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에이리의 설명에도 혜경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래 봬도 서울대에 들어갔고, 학업 성적도 좋은데 남의 설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다니!
하지만 에이리가 갑자기 꺼낸 말이 그만큼 당황스러운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응, 확실히 뭐라 해야 할까 좀 어렵네요. 뭐 확실한 건 거짓말로 애인 속이고 바람피우는 놈들 보다야 훨씬 낫다는 거? 나만 좋아해 주는 것보다는 역시 좀 못하겠지만.”
에이리는 어떻게든 설명을 해 보려는 모양이었지만 혜경은 그냥 역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대놓고 바람피우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데, 그건 달리 말하면 아예 바람피우는 걸 당연시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이 경우는 에이리의 말을 듣기에 정말로 당연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애당초 바람피우는 거라 생각도 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고칠 가능성도 없다는 건데, 그걸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혹시 강민을 좋아한다면 그런 걸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어서죠.”
“으음…….”
에이리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언니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만일 그걸 감수한다면 도와 드리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릴…….”
혜경으로선 당황스러운 말일 뿐이었다. 설령 그녀가 강민에게 호감이 있다 해도 이런 말을 들은 이상 오만정이 다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물론 지금도 세계에는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사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다. 그런 사람이 자식이 백 명도 넘게 있는 게 뉴스 같은 데 나오기도 하니까.
심지어 한국이나 미국 같은 후기 자본주의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결혼이라는 법적인 제도에만 구속되지 않으면 사실 남자가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도, 여자가 여러 남자를 만나는 것도 전혀 문제 될 게 없긴 하다.
주변에서 욕이야 좀 하겠지만.
실제로 모 기업 회장님이라든가, 모 벤처 사장이라든가 하는 능력 있는 남자라는 작자들은 아내 외에도 애인이 따로 있다는 소문 아닌 소문이 심심치 않게 돌아다닌다.
그래도 그렇지!
“후후, 그럴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만일인 거죠. 뭐 이 나라에선 일부일처제가 당연한 거 같으니까요.”
“그런데 강민은 대체 뭐야?”
한숨을 몰아쉬면서 혜경은 물었다. 에이리가 이런 말을 갑자기 하는 걸로 봐선 강민이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건 당연해 보였다.
“지금은 비밀.”
에이리는 혜경에게 윙크를 보내며 말했다.
“지금 언니 놀리는 거지?”
차라리 그렇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게 갑자기 시작된 이 당황스러운 대화를 그럴듯하게 끝맺음하는 가장 그럴듯한 설명일 거 같기도 했다.
“반쯤은요. 그래도 전부 거짓말은 아니에요.”
마지막까지 에이리는 애매한 답으로 혜경의 속을 태웠다.
‘어떻게 될까?’
복잡한 표정을 짓는 혜경을 보면서 에이리는 혜경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기대했다.
에이리가 생각하기에 혜경이 강민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면 한국이란 국가 상황상 포기할 것이다.
만일 그러고도 마음을 접지 못한다면 그땐 정말 도와줄 생각이 에이리에겐 있었다.
이렇게 확실히 아군으로 만들어서 나중에 쳐들어올 진짜 적을 상대하는 것이 에이리의 목적이었다.
아니면 강민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 막게 될 테니, 에이리로선 어느 쪽이든 손해 볼 게 없었다.
에이리의 입가가 미묘한 곡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