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방학이라고 해서 대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게 아니다!
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책도 빌려야 하고 사람도 만나야 하고, 동아리 출석도 있고 해서 방학이라고 해도 많은 대학생들에게 역시 학교는 생활 근거지다.
혜경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 그녀는 빌렸던 책들을 반납하고 새 책을 빌린 다음 학교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다.
친구들을 만나 볼까 싶기도 했지만, 곧 다시 볼 얼굴들인데 그럴 필요는 없겠다 싶어 그냥 혼자서 식사를 했다.
학생 식당에는 학기 때만은 못해서 역시 적지 않은 학생들이 복작거리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혜경은 한 식탁에 앉아 정식을 먹었다.
그리 좋은 식사라 할 수는 없지만, 학식다운 싼 가격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가격과 품질이라 할 수 있었다.
식사 중간에 등 뒤에서 갑자기 혜경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아, 너희들.”
놀라며 돌아본 혜경은 곧 얼굴을 폈다. 동기 여학우들이었다.
“오랜만이네.”
생글생글 웃으며 친구들이 말했다. 한 이주 만이다.
“후후, 너희도. 좀 탔네?”
“응. 방학이잖아. 여름이고! 바다에 갔다 왔지!”
혜경이 자신들의 약간은 탄 피부를 보며 부러운 듯 말하자 두 사람은 자랑스러운 듯이 매끈하게 선탠된 피부를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구나. 좋았겠다.”
“응. 좋았어. 너는 안 가?”
혜경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별로. 알바도 많고.”
88만 원 세대의 고난은 서울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서울대라 더 그런지도 모른다.
다른 대학이라면 장학금을 받고도 남을 성적이 여기선 씨알도 안 먹히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등록금이 사학에 비하면 싸다는 정도? 국립이니까.
그래도 대학생활은 등록금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서울 물가는 눈물 나게 비싸고. 그래서 혜경도 방학 동안 알바를 적지 않게 하고 있었다. 강민 과외도 그중 하나다.
“쯧쯧. 청춘 다 지나겠다.”
“요즘 청춘이 어디 있어. 다들 공부하기 바쁜데.”
혜경은 코웃음을 치며 그리 말했다.
그럴듯한 말이긴 하지만 말하면서 자신도 슬퍼지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럴수록 더 짬을 내서 청춘을 구가해야지.”
“하긴 혜경이는 청춘을 말하려면 먼저 남자친구부터 구해야겠지.”
“그것도 그렇네.”
두 친구가 깔깔대며 말했다.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를 갈면서 혜경은 둘을 노려봤다.
“이것들이…….”
“그런데 학교엔 무슨 일이야?”
매서운 눈길에 얼른 화제를 돌리고자 한 여학생이 말했다.
“책 때문에.”
“아, 그랬어? 우린 동아리 때문에 와 있었는데.”
“행사 있어?”
“별건 없었어. 그냥 얼굴 보고 술이나 마시자는 거지.”
“하긴.”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축제는 보통 전반기에 한다. 축제가 끝나고서 곧 방학이니 방학 때는 쉬기도 할 겸 보통 특별히 바쁘게 지내지 않는다. 물론 여름에 중요한 행사가 있는 스쿠버 다이빙 동호회 같은 건 예외지만.
여담으로 서울대 3대 바보 중 서울대 축제에 놀러가는 놈이 꼽힐 정도로 서울대 동아리는 별로 좋은 호응은 못 얻고 있다.
“아참, 이번에 동아리실 갔다가 멋진 걸 봤어.”
“뭔데?”
“여기.”
그리고 한 여학생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져 안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냈다. 그걸 보고 혜경은 곧장 놀란 표정이 됐다.
“아.”
“굉장하지?”
그녀가 내민 것은 맥심 이달 호였다. 표지에는 놀라울 정로도 아름다운 여성이 뇌쇄적인 몸매를 뽐내고 있는 사진이었다.
하지만 혜경이 놀란 표정인 것은 여자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물론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아는 얼굴이라는 것이 경악의 더 중요한 이유였다.
바로 에이리였던 것이다.
처음 봤을 때도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보니 평소의 아름다움이 한결 더 빛을 발해서, 그야말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싶을 정도였다.
혜경의 친구 두 사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처음 봤을 때 정말 여자로서 열등감이 느껴지더라. 이렇게 이기적으로 생긴 것들을 다 사라져 버려야 하는데!”
“그러게 말이야. 이런 거 보고 남자 놈들은 여자보고 165에 50킬로 넘으면 돼지라는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고 다니겠지?”
심지어 170에 45kg 같은 미친 소릴 하는 남자도 있다.
“지들은 화장실 거울 보면서 잘생겼다고 말도 안 되는 자뻑이나 하면서!”
두 사람은 치를 떨며 대한민국 남자들을 깠다.
남자들이 여자들을 까는 만큼, 여자들 역시 남자들에게 쌓인 분노는 많은 법!
두 사람은 특히 외모지상주의에 대해서라면 삼백 페이지짜리 박사 논문도 써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맥심 표지 모델의 아름다움이 경이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사진을 보며 투덜거렸다.
“아, 스트레스. 근데 정말 저런 몸을 어떻게 만드는 거지?”
“그러게 말야.”
“틀림없이 몸에 칼을 댔을 거야!”
“음, 역시 그렇겠지? 그렇지 않으면 저런 몸매는 있을 수 없어!”
부당한 평가를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자기 자신이 너무 억울하니까.
“얼굴도!”
“그렇지!”
“으음.”
혜경은 애매하게 웃으며 친구들을 봤다. 에이리를 직접 보고 또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아무래도 친구들의 질투 어린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이어서 수근거렸다.
“처음 혜경이를 봤을 때 같다고 할까?”
“그러게.”
“뭐, 내가 거기서 왜 나와?”
혜경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흠! 그만큼 너도 예쁘다는 말이지. 뭘 모르는 척 빼.”
“그래. 이 여시야.”
“아니, 나는…….”
혜경은 당황스러웠다.
“아~ 물론 여기 나온 여자에 비하면 좀 꿀리겠지!”
“그렇지만 저기에 꿀린다고 미인이 아니라면 세상 미인 다 죽는다!”
“그런 게 아니라…….”
친구들이 하는 말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모르겠단 심정으로 혜경은 그저 허둥댔다.
혜경의 그런 반응이 귀여웠던지 두 사람은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뭘 또 모르는 척하고 있어. 너 노리는 늑대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게 말야. 어휴, 너 그거 다 연기 아냐? 백치미가 요새 대세라던데!”
“아니, 그런 거 아냐.”
혜경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런 것 치곤 너무 툭툭 걷어차긴 하지.”
“안 어울리게 말야.”
남자라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짙었다. 학교생활만 해도 너무 피곤하니까.
동기나 선배들의 어프로치는 드물지 않았지만…… 일단은 다 끊어뒀다. 괜히 애매한 말로 어장관리 한다는 소리 듣기도 싫어서 딱 잘라서 거절하곤 했다.
남자친구 이야기가 나오니 괜히 강민이 생각났다. 그리고 강민은 저 맥심 표지에 나온 여자애와 무척 친한 사이로 보였다.
괜히 심사한 구석이 뒤틀어지는 것 같았다. 혜경은 복잡한 눈길로 맥심 표지 모델로 나온 에이리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응? 그런데 왜 그래?”
“그래. 좀 정신이 딴 데 간 것처럼.”
친구들의 지적에 혜경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래? 그런데 이 여자 꽤 멋진 말도 한다.”
그러면서 말을 꺼낸 여자가 맥심을 몇 페이진가 넘겼다. 그러자 인터뷰가 나왔다.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되었는가부터 시작해서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지에 대한 고식적인 인터뷰였다.
여학생은 그중 한 부분을 가리키고 말했다.
“그래. 인터뷰 읽어 봤는데 한국에 와서 보고 식민진 줄 알았다는 거야.”
“음! 대한민국 최고 학부의 재학생으로 창피한 일이긴 하다!”
“그렇지. 반성해야 해.”
“하긴 과열이 심하긴 하지.”
혜경은 친구들의 말에 동감해 고개를 끄덕였다.
영어가 필요하고 또한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 국민에게 영어가 필수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리는 없다.
만일 그렇게나 국제경쟁력에서 영어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면 일본이란 국가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한국어는 영어와 문법이 많이 달라서 한국인에게 영어가 얼마나 배우기 어려운 언어인지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미국인에게도 배우기 가장 어려운 말이 바로 한국어다.
“그래도 이거 읽고 남자들이 예쁜데 개념도 있다면서 학학대는 거 보면 좀 싫지.”
“그러게 말야. 괜히 눈만 높이는 거 같고.”
혜경의 친구 두 사람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혜경은 웃는 얼굴로 그에 응대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는 사이라고 밝히는 건 안 되겠지?’
그래서 아는 사이라 말하는 건 꾹 참았다. 일단은 강민에게 나중에 이야기라도 해 보고 밝히던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오늘은 과외 날!
강민은 혜경과 과외 공부를 했다.
과목은 수학. 강민이 가장 자신 없는 과목이라서 방학 동안 여러모로 시간을 많이 투자한 과목이기도 했다.
혜경이 강민과 어깨를 마주한 채 문제를 설명했다.
“……이렇게 되는 거야.”
“아, 그렇군요.”
혜경의 설명에 풀이를 이해한 강민이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혜경은 준비한 문제를 하나 내밀면서 지시했다.
“그럼 이걸 풀어봐.”
“어디.”
강민은 문제를 받아 살폈다. 같은 방식의 풀이법을 약간 응용하면 풀 수 있는 문제였다.
흠흠 콧소리를 내면서 강민은 문제를 푸는 데 열중했다.
수 분이 지나고 강민은 풀이 과정과 답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요.”
혜경은 강민의 답안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풀이 과정도 깨끗하고 답도 정답이었다.
“음. 잘했어.”
“누나 덕분이죠.”
씨익 웃으며 강민이 말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지났다. 혜경은 강민이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학생이라 생각하면서 말했다.
“후후, 그럼 좀 쉴까.”
“그러죠.”
그리고 두 사람은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열중해서 공부했더니 역시 정신적으로 약간 피로했다.
혜경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강민을 만나기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드디어 꺼냈다.
“그런데 이번 달 맥심이란 잡지 혹시 봤어?”
“아~ 에이리가 모델로 나온 거요?”
강민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응, 학교에서 친구가 보여주더라고. 굉장히 예쁜 모델이 나왔다고. 깜짝 놀랐어. 에이리 양이 찍혀 있잖아.”
“헤에, 그냥 모델일 뿐인데 화제가 됐다는 게 더 놀라운데요. 더구나 남성용 잡지라고 들었는데.”
“동아리 남자들한테 화제가 돼서 우연히 보게 된거거든. 스타일이 멋져서 주목받은 모양이야. 그리고 진짜 예쁘잖아.”
혜경이 부러운 듯 말했다.
사실 진짜 부러웠다. 다시 생각해 봐도 맥심에 찍힌 에이리의 모습은 여신이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건 강민도 동감하는 점이었다.
“에이리가 예쁘긴 하죠.”
그러니 과거 강민도 에이리에게 반했었지.
“그래. 음! 몸매 관리 같은 거 어떻게 하는지 몰라.”
“몸매 관리라…….”
강민은 고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