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강민단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강민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에이리가 늘씬한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강민이 돌아온 것을 보고 반색했다.
“아, 어서와. 오늘은 재밌는 일 있었어?”
“유감이지만 없었어.”
재밌는 일이란 게 매일 생길 리가 없다.
더구나 한국은 몬스터도 마왕도 없는 세계다. 사건 사고야 끊이지 않지만 에이리의 기준으로 재밌는 일이 되려면 자극이 부족하다.
“대신 오늘은 선물이 있어.”
간결하게 답하며 강민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선물?”
에이리는 선물이란 말에 귀가 활짝 열리는지 호기심 어린 표정을 했다.
원래 세계에 있을 때도 강민은 선물 같은 것에 무심하기로 유명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둔탱이!
그런데 여기서는 기념일 같은 것도 아닌데 선물이라니!
놀라운 일이었다.
“자.”
강민은 품에서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플라스틱 카드를 받으며 에이리가 물었다.
그 카드에는 얼마 전 찍었던 에이리의 사진과 함께 이름, 그리고 기묘하고 긴 숫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강민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주민등록증이지.”
“아…….”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에이리는 강민을 바라봤다.
기껏 힘들여 구했더니 별로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자 강민은 약간 심술이 났다.
“뭐야, 그 실망하는 얼굴은?”
“그냥. 뭐, 너답다 생각했을 뿐이야.”
실용적이지만 낭만과는 거리가 먼 점이 특히 그렇다.
“흠! 구하기 힘든 거라고. 돈도 많이 들었고.”
에이리의 반응이 냉담해 강민이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호성에게 부탁해 구한 이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이천이 넘게 들었다!
그만큼 에이리의 조건이 까다로운 데다, 관련된 다른 서류의 조작 같은 것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게 비싸?”
기껏 플라스틱 한 장인데 힘들었다니 신기해서 에이리는 물었다.
물론 에이리의 고향에서도 저런 신분증명서를 제대로 위조하려면 아주 비싼 비용이 든다.
하지만 여기서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다닌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수가 많으면 허점도 많을 테니 구하기 어려울 것 같지 않아서였다.
강민은 에이리의 생각을 읽고 코웃음을 쳤다.
“한국의 행정 처리를 무시하지 말라고. 외국에서는 주민등록증 얘기하면 믿지도 않을 정도야. 전 국민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한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 줄 알아?”
전 국민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하고 심지어 지문까지 다 채취하는 나라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한국 외에는 거의 없다. 그 외에는 터키 정도나 될까?
터키는 같은 이름이 너무 많아서 불가피한 면이 있다. 동명이인이 득실득실해서 이름이 이름 노릇을 잘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 정도가 아닌데도 이렇게 철저히 국민을 관리한다.
사실 외국에서 들으면 1984가 따로 있냐고 경악할 사안이다.
유럽에선 지문까지 갈 필요도 없이 주민번호 얘기만 해도 치를 떨고 인권 문제가 시끌벅적하게 튀어나올 게 틀림없다.
그래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서 한국의 치안율이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수준인 건 주민등록을 통해 국민에 대한 정보를 꽉 잡고 있는 덕분이다.
“하기야 신문증명 같은 건 민감한 사안이긴 하지.”
이해한다는 듯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등록증 같은 건 현대니까 겨우 가능한 거기도 하고. 옛날 같으면 관리가 힘들어서라도 못 사용했을걸.”
어마어마한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막대한 인원의 투입으로 국가는 전 국민에 대한 통제권을 겨우 손에 넣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드디어 국가는 모든 국민을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대 국가는 행정이 제일 크고, 또 그 행정을 관리하는 관료들의 관료주의가 가장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국가가 사람들의 출생이나 사망신고 문제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게 불과 수십 년 전 일이다.
그 중요한 주민등록번호가 온갖 사기업에서 헐값에 사들여지고, 심지어 외국에서 마음껏 해킹하고 있음에도 책임지는 놈은 하나도 없는 것이 관료실태라는 건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뭐 그런 이해하기도 힘든 설명은 됐고, 그럼 이제 이것만 있으면 나도 어엿한 한국인으로 행세할 수 있는 거야?”
“아쉽지만 그렇진 않아. 잘 만들어진 것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가짜니까 깊게 조사해 들어가면 쉽게 이상하다는 것이 발견되고 말겠지.”
“그럼?”
“일단 나중에 서류가 올 거야. 네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고 이런 거에 대해 만들어진 자료지. 일단 그 주민등록증에는 에이리 네가 그 사람인 걸로 되어 있으니까 꼭꼭 익혀서 다른 사람이 물으면 거기 맞춰서 답하도록 해.”
“알겠어. 그러면 아무 문제없는 거야?”
“뭐 평범하게 활동하는 건 문제없을 거야. 하지만 유명해 지는 건 피하는 게 좋아.”
“유명해진다, 라……. 모델 활동 말하는 거야?”
“가끔씩 모델 활동하는 정도야 괜찮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너무 화제가 돼서 여기저기서 접촉하고 싶어 한다든가 하는 경우까지 가는 건 곤란하겠지. 어떻게든 너랑 접촉하려고 별별 조사를 다 해댈 거니까. 그럼 주민등록증에 기록된 옛날 주소 같은데도 가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볼 거고 그러면 아무리 철저하게 만든 주민등록증이라 해도 가짜란 게 들통 나지 않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음, 알 만하군.”
에이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경우라면 아무리 이 신분증이 잘 만들어졌다 해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이는 실제 스파이를 운영해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고위층에 침투시키기 위한 스파이는 뒷 준비가 완벽해야 하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현지인을 매수하는 게 더 편하다.
물론 그럴 경우 배신의 위험이 늘 도사린다.
“그래. 그러니까 얼굴 팔리고 유명해지는 건 적당한 선에서만 그쳐 줘.”
“노력할게.”
강민이 자신이 모델 일을 하는 데 아직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에이리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은 화제를 바꿨다.
“흠! 그나저나 네가 살 곳도 슬슬 구해야 할 텐데.”
“그건 나도 생각하고 있었어.”
에이리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의 집은 편하고 또 강민 부모님도 에이리가 지내는 데 눈치를 주거나 하진 않지만, 그래도 결국은 남의 집이다. 염치없이 계속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따로 나가 살 만한 곳을 마련해야 했다.
마침 신분이 마련되었으니 지금이 적기인 것이다.
“음! 주민등록증도 만들었겠다. 이제 문제없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강민은 약간 난색을 표했다.
에이리는 강민이 뭣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집을 구하는 작업 자체를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리라.
에이리는 여기 사람이 아닌 만큼 아는 게 너무 없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길을 잃어 데리러 오라는 연락까지 했을 정도다.
“너는?”
“내가 같이 가고 싶긴 한데, 나는 지금 겉보기에도 고등학생이고, 또 서울 사람이라곤 해도 서울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니 너를 안내해서 집을 구할 적임자는 아니지.”
“그냥 돈만 있으면 되는 건 아닌가 봐?”
강민이 눈을 번쩍 떴다.
“돈만 있으면 돼! 돈이면 안되는 게 어디 있어!”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
하지만 이내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합리적인 가격이어야 하니 고민을 해 봐야 한다는 거지. 관리 문제도 있고. 또, 이왕이면 여기서 가까운 게 좋고.”
“어렵군.”
“평범한 거야. 너나 나나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다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뿐이지.”
“하긴, 그런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던 에이리는 강민이 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시하고 반복적인 서류 업무 같은 건 다 알아서 해 주는 부하가 많이 있었다.
서류업무만이 아니라 청소니, 빨래니 요리니 하는 일상생활도 돌봐주는 사람이 항상 있는 생황을 해 봤다.
“뭐, 그건 적당히 도와줄 만한 사람이 없는지 알아보도록 할게.”
“좋아.”
“그러면 일단 주민등록증 만들었으니까 내일은 은행 가서 통장 만들고, 휴대폰 하나 사자.”
“사주는 거야?”
에이리가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 강민이 코웃음을 쳤다.
“쳇, 말했잖아. 너 하나 먹여 살릴 재주 없겠느냐고.”
“오오, 멋진 말.”
에이리가 감탄해 말하자 강민의 묘정이 애매해졌다.
“아니, 내가 마왕도 때려잡은 사람인데 그깟 말로 멋지다고 하면…….”
세계를 구했는데 휴대폰 사 주는 것 따위에 놀랍다는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사실 용사로서의 자존심이 살짝 상하는 반응이었다.
에이리는 강민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껴안으면서 말했다.
“후후, 그래도 여자는 그런 말에 기쁜 법이야.”
“큼.”
강민은 붉어진 얼굴로 아무 말도 못했다.
원래 여자가 이렇게 나오는 건 반칙이다.
***
에이리는 손안에 쥐어진 사각형의 널빤지 같은 물체를 봤다. 정면의 검은 유리가 빛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게 스마트폰이란 말이지.”
“그래. 그거야말로 현대문명의 총화라 할 만한 거지.”
강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지금 두 사람은 근처의 대리점에서 스마트폰을 사 오는 길이었다.
대리점에서 스마트폰을 사는 건 호구 잡히는 일이란 평가가 많지만, 그래도 귀찮은 절차 생략하고 싶기도 하고 싶고 또 함께 바깥나들이도 할 겸 나와서 샀다.
“흠! 네가 없는 동안 텔레비전을 보면서 느꼈어. 편리한 물건인 것 같다고. 하지만 다루긴 좀 불편한 거 같은데.”
“뭐, 별로 어려울 거 없어. 쓰다 보면 익숙해질 거니까. 평소 던젼에서 길 찾듯이 만 안 하면 스마트폰도 문제없을 거야.”
어깨를 으쓱이며 강민이 말했다.
눈을 좁히고 에이리는 강민을 흘겨봤다.
“그거 나를 까는 거냐?”
“깐다기 보다…… 그냥 약간의 걱정이라고 할까.”
까는 게 맞지만 까는 거라고 답하면 재앙이 들이닥친다.!
그래서 애매한 웃음과 함께 강민은 그런 답을 돌렸다.
“흥, 두고 봐. 확실히 사용하도록 할 테니까!”
부디 그러길 바란다고 강민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응원했다.
스마트폰을 제대로 활용하면 제아무리 길치라도 집을 찾아오는 거야 아무 문제가 없을 테니까.
이어서 강민은 에이리에게 충고했다.
“그리고 이제 네 통장이랑 연결도 되어 있고 하니 함부로 구매는 하지 마.”
강민은 에이리의 통장에 적지 않은 돈을 넣어 뒀다. 앞으로 에이리가 지구에서 살면서 적응할 때까지 필요한 정착금이라고 할까.
“이 세계는 신기한 게 많고, 가지고 싶은 게 여럿 있긴 하지만…… 그러도록 하지.”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츰차츰 안정되면 쇼핑량도 늘리고 하면 되겠지. 돈이 없다기보다 쉽게 물건 사는 데 맛들이면 곤란한 거니까. 너는 고향에서도 별로 물건에 대한 안목은 없었잖아.”
“무슨 소릴! 나만큼 검과 갑옷에 대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 어디 있다고!”
눈을 번쩍 빛내며 에이리는 반박했다.
물론 에이리의 말은 사실이다. 에이리만큼 검과 갑옷에 대해 안목이 뛰어난 사람은 대륙을 다 뒤져도 얼마 없다.
하지만 강민이 지적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그건 제외하고 일상용품은 무지하잖아.”
“그런 건 시종이 다 해주니까.”
헤헤 웃으면서 에이리가 말했다.
“그러니 이제 그 시종이 없으니 돈 사용하는 법도 익혀야지.”
“뭐, 그건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에이리는 스마트폰을 한 번 더 바라보며 기분 좋은 듯이 말했다.
“어쨌건 이걸로 언제든 필요할 땐 네게 연락할 수 있게 된 거군.”
“그렇지. 이런 평화로운 세상에서 그리 연락이 급하게 필요한 일이 자주 있겠느냐마는.”
“모르는 일이지. 사건 사고야 언제 어디든 있는 법이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강민과 에이리가 서로 간에 급히 연락해야 할 정도의 사건 사고란 게 생길 거라곤 상상하기 힘들었다.
현재 한국은 몬스터도 마왕도 없는 평화로운 세계인 것이다.
그렇게 대화를 하며 길을 걷는 사이 두 사람은 집에 도착했다. 강민은 늘상 그러한 손길로 문을 열고 에이리와 함께 집 안에 들어갔다.
“응?”
“오.”
두 사람은 함께 놀란 목소리를 냈다. 집안에 못 보던 사람이 떡 하니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