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강민은 기분좋게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냄새가 아직 거실을 감돌고 있었다.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뭐 시켜 먹었어?”
“이거.”
에이리는 소파에 던져 있는 상가소개 책자를 펼쳐 그중 한 페이지를 강민에게 내밀어 보였다. 거기 나타난 음식은 강민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치킨?”
그러고보니 거실 쓰레기통에 싹 비워진 치킨 곽이 들어가 있었다. 남은 찌꺼기를 보자니 양념반 후라이드 반을 시킨 것으로 보였다.
“이거 어떻게 만드는 거야? 믿을 수가 없던데!”
갑자기 감탄한 표정이 되어선 에이리가 물었다. 대단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엄숙한 얼굴로 강민도 동의했다.
“치킨이 맛있긴 하지.”
이 세계에 맛있는 요리가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무수한 합성조미료로 떡을 치며 만드는 지구의 음식의 자극적인 맛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에이리는 찬사를 이어갔다.
“닭 요리라면 많이 먹었지만 이건 진짜 신기했어. 겉껍질도 바삭하고...! 이건 또 달콤하잖아.”
에이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니 지구 출신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강민은 후후후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이 바로 치킨계의 진리 반반무마니라고 불리는 것이지.”
“반반무마니? 주문이야?”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 비슷한 거긴 해. 후라이드 반, 양념 반 그리고 무를 많이 주세요, 란 뜻이거든.”
“호오.”
“처음 주문한 거 치곤 안목이 높아.”
“후후.”
에이리는 기쁜 표정이 되었다. 그냥 세트라고 나온 것 중에 하나를 시킨 것인데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강민은 이어서 그녀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많이 먹으면 살이 찌지.”
치킨 한 조각의 칼로리는 보통 200!
성인 남성의 하루 권장 칼로리가 2,300이니 열 조각 기준으로 통닭 한 마리는 2,000칼로리라는 뜻이 된다.
거기다 튀긴 만큼 지방양도 많다!
여성이라면 당연히 공포에 떨 만한 수치!
“나는 괜찮아.”
그러나 에이리는 자신만만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덕분이다.
강민도 뭐 그건 그런가 라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리는 여자치곤 예전에도 많이 먹는 편이지만 몸매는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다. 도리어 체중이 있어야 강한 공격이 되는데 너무 살이 안 찐다고 걱정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야 에이리의 전투능력과 운동량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사실 하루 만 칼로리도 부족할 때가 많을 정도였으니까.
에이리는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눈을 번쩍였다.
“아, 고 계집애가 오면 잔득 먹여야겠다. 방구석폐인인데다 움직이길 귀찮아 뭐든 마법으로 해결하니 이런 진미를 먹여주면 틀림없이 돼지로 폴리모프 하고 말걸!”
그리고 둥근 공처럼 변한 상상 속의 상대를 생각하며 즐거운 듯이 후후후 하고 음산하게 웃었다. 강민이 거기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정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다곤 할 수 없어서였다.
특히 방금 에이리가 말한 대로 지금 그녀가 적의를 불태우는 상대는 운동을 통한 칼로리 소모라는거 하곤 정말 거리가 멀었으니까.
‘아니 그건 나로서도 문제가 있으니 좀 참아줬으면 하는데...’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 말리진 못했다.
그냥 주의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도록 노력할 뿐.
“으음, 뭐 만족했다니 다행이군. 그럼 다음엔 치킨을 진정으로 맛있게 먹는 방법을 소개해 줄게.”
“뭐? 이대로 그냥 먹는게 아냐?”
기대 어린 표정으로 에이리가 물었다.
강민은 혀를 찼다.
쯧쯧, 그것은 치킨도의 입문에 불콰하지. 치맥을 즐기게 되어야 겨우 중수라 할 수 있는 거야.“
“치맥? 그건 또 뭐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에이러는 물었다.
“치킨과 맥주라는 거다!”
치킨과 맥주의 만남이야 말로 음식계의 수어지교!
그 궁합은 최강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면 우주최강이라 할 수 있는 요소가 또 있었다. 한일전 축구다! 아니면 한일전 야구도 괜찮다.
그런 날은 통닭을 주문하면 기본 대기 시간이 두 시간이기 마련!
치킨과 맥주의 조합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인정받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복날 삼계탕집 같달까.
하지만 그건 한국인 전용 옵션이니 만큼 에이리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에이리는 닭도 좋아하고 술도 즐기는 편이었기 때문에 강민의 말을 듣자마자 크게 흥미가 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오. 그건... 끌리는데.”
“그렇지? 크, 내가 학생의 몸만 아니면...”
식욕이 동하는 건 강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강민은 아직 미성년자라서 술은 마실 수 없었다. 물론 먹고자 결심하면 우회할 방법은 여러 가지 있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사는 만큼 속상하게 할 수 잇는 일은 피할 생각이엇다.
기대 어린 표정으로 에이리가 말했다.
“나는 상관없겠지?”
“너도 안 돼.”
“내가 왜!”
찡그린 표정으로 에이리는 반발했다.
“술은 성인에게만 판다고.”
“나는 성인이야.”
에이리는 자신의 가슴을 탕 쳤다. 강민은 확실히 저 훌륭한 몸매를 보면 성인이라 다들 인정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에이리 혼자 좋은 일을 하도록 놔두고 싶진 않아서 고개를 흔들었다.
“근데 성인이란걸 증명할 수단이 없잖아.”
“아니 딱 보면 몰라?”
에이리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강민이 코웃음을 쳤다.
“나랑 같은 연배라며?”
확실히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강민의 과외선생이라던가 하는 여자에게 자신를 소개할 때 말이다. 하지만 에이리는 철판을 깔기로 했다.
“그건 그거고...”
“한국에선 어른인가 아닌가를 주민등록증이란걸로 확인한다고.”
강민이 에이리의 말을 잘랐다.
“주민등록증?”
“그래. 모든 시민에게 주어지는 신분증이지. 그걸로 나이를 구분할 수 있어. 그게 없으면 한국에서 살긴 정말 불편해. 술도 못 사니까. 그래서 너도 술을 못 산다는 거야.”
“으음...”
에이리도 이제는 찌푸린 얼굴을 할 뿐 달리 강민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신분증이 여기선 통상적으로 사용된다니 몰랐다.
강민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후후, 알겠어! 너 혼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고!”
“쳇.”
아쉬워하는 에이리에게 강민은 달래듯 이어 말했다.
“뭐 그건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지. 어차피 한국에 있으려면 어떻게든 적당한 신분은 있어야 하니까.”
“응.”
에이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델료 받는 것도 그렇고, 술을 사는데 신분증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렇고 강민이 말한 것처럼 오래 여기 머물려면 신분을 마련하는게 중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강민이 이 곳에 앞으로 자주 오다니게 될 게 분명한 만큼, 에이리 역시 여기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강민은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일 뉴스를 꼭 보도록 해.”
“뉴스? 뉴스가 뭐야?”
“뭐 저걸로 보는 신문 같은 거지.”
강민이 가리킨 것은 TV였다.
“그렇군. 그런데 뭐 재밌는 이야기라도 나오는 모양이지?”
신문은 에이리가 있던 세계에서도 꽤 보편적인 매체였다. 지구에서처럼 대량으로 자주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이나 한달 단위로 발행해서 지역 사람들이 구매해 정보를 얻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뭐 그렇지.”
내일 또 장갑맨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해 질 걸 생각하며 강민은 낄낄 웃었다.
***
다음날.
거실에서는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아나운서가 딱딱한 얼굴로 경찰들 앞에 서서 얼굴만큼 딱딱한 어조로 사건의 내용을 전달했다.
“...한성질, 강나구, 영구산, 장호천 이상 네 사람은 살인 미수, 특수 범죄 등 여러 혐의로 긴급 체포 했습니다. 이들은 어제 이지연이란 소녀를 납치해 폭행, 강간을 시도 했으며, 실질적인 목적은 살인이었다고 자백했습니다.”
이지연의 얼굴이 뉴스에 잠시 비췄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그 화면을 바라보는 두 남녀.
강민과 에이리였다.
강민의 부모님은 아침 일찍 일 나갔고, 두 사람만 남아 아침 식사를 마치고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아나운서는 보고를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장갑맨이라 불린 남자의 개입으로 인해 범행에 실패하고 역으로 묶여 이지연양의 신고로 인해 출동한 경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경찰은 이지연양의 스마트폰에 녹화된 동영상을 중요한 참고자료로 선택하고 범행 주모자인 강나구가 말한 홍동구의 조사를 시작했습니다.”홍동구의 얼굴이 뉴스에 나타났다. 하지만 홍동구는 관련되었다는 주장을 완전히 부인하고 있다고 아나운서는 말했다.
이어서 그는 말했다.
“그런데 범인들은 이 자백은 폭행과 위협에 의한 것으로 전부 거짓말일 뿐이라 주장했으며 단순히 강간이 목적이었을 뿐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동영상의 증거가치를 어떻게 법원이 과연 인정할지 주목되고 있습니다.”
이지연의 스마트폰이 나왔다.
스마트폰에서는 녹화된 동영상이 모자이크 되고 음성 변조되어 흘러나왔다.
-누가 이런 일을 시켰지.
-호, 홍동구입니다.
아나운서의 얼굴이 다시 떴다.
“그러는 한편 경찰은 이번 사건에서 이지연양을 구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갑맨을 지명수배 하기로 했습니다. 구출 과정에서라 하나 지나친 공격으로 네 범인의 성기능이 파괴됐고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게 된 만큼 폭행죄를 비롯하여 다양한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갑맨은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폭력집단의 본부에서 막대한 금품을 훔쳐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CCTV로 활영된 장갑맨의 모습이 나왔다.
사실 지명수배 한다고 해도 저걸로 대상이 누군지 발견하긴 불가능해 보였다. 기껏해야 키나 대충 알아맞힐 수 있을까.
생긴게 전혀 나오지 않는데다 지문을 남긴 것도 아니니 추적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신체능력이 대체 얼마나 되는지 기존 수사망 짜는 방식으로는 조사할 수도 없는 대상이었으니까.
뉴스가 끝났다.
다 보고 나서 에이리가 옆의 강민을 돌아보고 물었다.
“저거였어?”
“응.”
강민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리가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으응, 역시 재밌었겠군.”
“후후, 꽤 재밌긴 했지.”
악당을 두들겨 패고 그 자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사람을 구하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더구나 그 덕에 구한 대상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완벽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에이리가 TV를 향해 턱짓하며 물었다.
“그런데 저게 무슨 말이야.”
“뭐가?”
“널 체포한다잖아. 나쁜 놈들 때려잡은 거 아냐?”
강민은 고개를 피곤한 듯이 흔들었다.
“뭐 그렇긴 한데 나쁜 놈들 때려잡은 거라고 다 봐주는 건 아니란 말이야.”
“그런게 어딨어. 죽이려고 했다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에이리가 말햇다.
이지연이라는 소녀를 죽이려 한 놈들을 막고 두들겨 패서 고자로 만든다는 강민답지 않게 약한 처분을 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상은커녕 체포해야 한다는 말을 하니 황당하게 여길 수밖에.
“죽이려고 했다고 해서 죽여도 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도둑질도 했고.”
강민은 자신의 가방을 보며 말했다.
족히 오억이 넘게 들어있는 가방!
괜히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뿌듯해졌다.
“저런 놈들 때려 패고 재산 몰수 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냐?”
“여긴 민주주의 법치사회라서 그런 식으로 운영되는 건 아냐. 그리고 그렇게 해도 내가 하면 안 되지. 정부가 해야지.”
“불편하군.”
미간을 좁히고 에이리가 불평했다.
강민도 그건 동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지. 답답한 구석도 많고. 뭐 그래도 그게 이런 사회에선 합리적인 거야.”
“마음대로 그 법을 박살 내면서 말은”
혀를 차면서 에이리가 강민을 흘겨봤다.
“하하하!”
할 말이 없어서 강민은 호탕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