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보, 본부 주소는...”
강민의 주먹에 완전히 굴복하고 만 각귀는 순순히 위치를 밝혔다. 강민은 그것을 메모지에 적어놓고는 이어 물었다.
“흠, 그리고 금고 있지?”
“네. 이, 있습니다.”
각퀴는 강민이 무얼 노리는지 알고 순간 갈등하는 눈빛을 보였지만 곧 입을 열었다. 다른 생각을 하기엔 상대의 힘이 너무 무서웠다.
“위치는?”
“제 사무실에 걸려 있는 족자 뒤에...”
“패스워드는?”
“19730503입니다.”
강민은 피식 웃었다.
길이는 길어 보이지만 분석해 보면 1973년 5월 3일에 태어났다는 생년월일을 암호화 했을 뿐이다.
가장 어리석은 암호로 꼽히는 패스워드였다.
“보안성이 낮은 패스워드군. 그걸 다행으로 생각해. 지문인식이었으면 손가락 잘라 갔을 테니까.”
“으으...”
각귀는 두려운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물론 아무리 강민은 손가락을 자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선 악을 처단하는 것이라 해도 엽기범행의 냄새가 나게 된다.
그냥 끌고 가서 열게 했겠지.
강민은 이어서 음산하게 경고했다.
“그리고 만일 지금 얘기한 내용이 거짓이면 돌아와서…. 어떻게 될지 알지? 내가 너 때문에 지금 당장 경찰을 안 부른 거야.”
“며, 명심하겠습니다.”
각퀴는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마지막 할 일을 끝낸 다음 강민은 기다리고 있는 이지연에게로 돌아갔다.
“이제 가죠.”
“네.”
이지연은 아직 두려워하는 목소리로 답했다.
***
네 명의 악당을 꽁꽁 묶은 다음 입에 재갈을 물리고 두 사람은 곧장 산의 대로에까지 나섰다. 그 길을 따라 이제 쭉 내려가기만 하면 시내로 가는 길이 나온다.
강민은 거기에 이르러서 이지연에게 말했다.
“여기까지군요. 저는 따로 떠나겠습니다.”
“네...”
이지연은 아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악당들을 모두 처리했다지만 아직 방금 전에 겪었던 위기의 감촉은 피부에 남아 있었다. 강민과 떨어져 간다는 것이 불안했다.
그 불안을 꿰뚫어 본 것처럼 강민이 말했다.
“이 자리에서 경찰에 신고하세요.”
“네? 하지만 방금 별장 안에서는...”
이지연은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강민은 그 깡패의 금고를 털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던가. 강민은 놀라는 지연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건 겁줘서 거짓말 못 하게 하려 했을 뿐이죠. 금고야 한 번 시도해 보고 열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뭘 그런델 집착할까요.”
“그랬군요...”
지연은 부끄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만일 그 놈 말이 맞다면 다음에 만날 기회가 생기면 얼마간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 위자료는 받아야겠죠.”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지연은 답했다.
강민은 의외라는 표정을 복면 안에서 지었다. 이지연의 표정이 농담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기엔 너무 진지해서였다.
가난하다는 말이 기억났다.
정말인 것 같았다. 그것도 상당히 어려운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소녀를 왜 오십억이나 들여 죽이려는 놈들이 있는 것일까.
새삼 알 수 없다 생각하며 강민은 지연에게 인사했다.
“그럼.”
“저기.”
지연이 막았다.
“네?”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지연이 물었다. 강민은 그녀가 많이 불안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강민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녀의 불안을 삭히기 위해 천연덕스럽게 강민은 답했다.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사실 강민이 말한 대로긴 했다. 강민을 다시 본다는 것은 위험에 처한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단순히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깊은 불안 때문에 그녀는 곁에 있어줄 사람을 원했다.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지만... 도움이 필요해지면 부르세요. 연락할 수 있는 메일 주소는 알려드렸잖아요? 도와드리겠습니다.”
강민은 부드럽게 말했다.
“네...”
이지연은 못내 아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은 그걸 끝으로 가방을 맨 채 산길을 달렸다. 그의 몸은 곧 숲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됐다. 아쉽게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지연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경찰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
“여기군.”
강민은 어느 높은 건물의 앞에 서 있었다.
바로 각귀가 밝힌 그의 본부 건물이었다.
주변은 이미 어두웠다. 이지연을 구하고 깡패놈들을 때려 심문하고 여기까지 오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경찰들이 곧 여기 오게 될 것은 예상도 못하고 있는 듯 주변에는 각귀의 부하로 보이는 깡패가 드물게 보였다.
하지만 강민은 곧 여기 경찰들이 들이닥치게 될 거란 걸 안다. 그러니 작업 시간은 많지 않았다.
“어디보자.”
강민은 건물 주변을 살피며 움직이기 편할 만한 장소를 찾았다.
골목 뒤쪽이 인적이 없었다.
“후후.”
괜찮은 장소라 생각한 강민은 곧 건물과 떨어진 골목으로 들어가 거기서 서둘러 옷을 갈아입엇다. 깡패들이 거점을 잡고 있는 건물 근처라선지 어두워지니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 옷을 갈아입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
복면과 가면을 착용해 정체를 숨긴 강민은 조심스레 움직여 각귀의 건물 근처로 움직였다. 어두운 그늘만 따라 움직인데다 그의 몸놀림이 극히 기민해서 바로 앞에서 강민이 움직이는 걸 보더라도 그게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곧 강민은 작업을 하기 위해 점찍어둔 건물 뒷 골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으샤.”
이어서 그는 벽면을 타고 건물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스파이더맨 같았다. 건물은 매끄러운 편이었지만 타일이 맞물린 사이의 작은 틈만 가지고도 강민은 자기 체중을 지탱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
거미가 건물벽을 올라타듯 그는 척척 건물을 타고 올라가 각귀에게 들은 4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4층에서 이동하며 창문을 찾았다.
곧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가가서 열어 봤다.
“다행히 열려있군.”
잠겨 있어도 뜯어내는 것 따윈 강민에게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 시끄러워질 수 있다. 피곤할 수 있는 일은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강민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화장실이었다.
강민은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흠.”
가만히 서서 강민은 주의를 집중했다. 이곳에 얼마나 인원이 있는가 조사하는 것이다. 다섯 명 정도 있는 것 같았다. 어디 있는지 위치도 대충 알 수 있었다.
강민은 조심스레 인기척을 피해 각귀에게 들은 그의 방문을 찾아 움직였다. 경비는 허술했다.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긴 벽을 타고 이 층으로 누가 침범하리라 상상할 리 없으니 당연했다. 강민은 쉽게 각귀의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각귀의 방 문을 손으로 잡았다.
열쇠가 걸려 있었다. 강민은 억지로 돌리면 소리가 날 것 같아 포기하고 한쪽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벗은 손의 손가락을 유리에 가져다 대고 그었다.
끼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잠시 났다.
강민은 손톱으로 원을 그렸다. 컴퍼스를 이용한 것처럼 훌륭한 원이 그려졌다. 그는 장갑을 다시 낀 다음 그 원의 밑동을 살짝 폈다. 원으로 그인 유리가 쏙 빠져나왔다.
강민은 그것을 받고 그 구멍으로 손을 넣어 문을 열었다.
달칵.
문은 쉽게 열렸다.
강민은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각귀의 사무실은 조용했다. 각귀에게 들은바 이곳에는 CCTV가 항상 촬영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강민은 복면을 하고 있는 만큼 신경 쓰지 않고 각귀에게 들었던 대로 족자를 찾아 움직였다.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뒤를 보니 금고가 있었고 강민은 그걸 패스워드대로 눌렀다.
띡.
문이 열렸다.
‘어지간히 무서웠던 모양이군.’
각귀가 고백한 정보는 전부 사실이었다. 강민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각귀를 비롯해 네 깡패를 두들겨 패고 괴롭힌 것은 그가 이계에 있을 때 적을 고문하는 방법으로 쓰던 것이다.
험하게 굴렀다고 해 봐야 평화로운 한국에서 살아온 깡패 따위가 진짜 피가 철철 흐르는 판타지 세계의 고문을 당하고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디 보자.”
안을 살폈다.
“와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안에는 지난번 한성질의 건물을 털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금괴와 대량의 지폐가 있었다. 강민은 그것을 한 손에 쥐어 꺼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나 저기나 어째 나쁜 놈들이 잘 산단 말이지.”
곧 그의 가방에 다 담겼다.
묵직했다.
한성질 당시 수확과 비견하거나 약간 더 되는 금액이리라 싶었다.
“어느 정도는 이렇게 내가 회수해서 재분배하도록 하지.”
강민은 복면 안에서 빙그레 웃고는 사무실을 빠져 나가 들어왔던 화장실 창문을 통해 이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경찰이 그 건물을 급습한 것은 20분 후의 일이었다.
***
강민의 집이 문이 열리고 강민이 들어왔다.
가방이 무거워진 것을 제외하면 나갈 당시와 다를 것이 없는 차림새였다.
“나 왔어.”
돌아오자 마자 인사가 돌아왔다. 거실에서 TV라고 보고 있었던지 에이리가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아, 어서와.”
그녀는 강민의 위아래를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물었다.
“갔던 일은 잘됐어?”
“에헴.”
강민은 잘난척을 하며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소리가 났다. 안에 든 게 많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에이리가 물었다.
“안에 뭔가 많이 든 모양이지?”
“네 생활비 걱정 안 할 정도는 되지.”
어깨를 으쓱이며 강민이 그리 말했다. 확실히 생활비 정도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금액이긴 했다.
감탄하며 에이리가 물었다.
“도둑질하러 갔던 거야?”
“어허, 비교하자면 몬스터 때려잡고 전리품 획득한 거야.”
강민은 고개를 흔들며 에이리의 말을 부정했다. 사실 둘러치나 매치나 비슷한 말이었다. 몬스터라고 해도 결국 사람이었으니까.
어쨌건 또 사람이라 해도 하는 짓은 몬스터 보다 못하지 좋을게 없는 쓰레기였으니 또 지금치장해 강민이 한 말이 크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강민의 꾸민 말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에이리는 아름다운 얼굴을 찡그리며 아쉽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나도 갔어야 하는데.”
“쯧쯧 너는 눈에 띄어서 안 된다고.”
“흥.”
에이리는 불만스레 코웃음을 쳤다.
혼자 재밌는 일을 하고 돌아온 강민이 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