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손짓 하나하나에 우아함이 묻어나다시피 해서 도저히 그런데 집착할 것 같은 인상으론 보이지 않았었다.
강지명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나도 좀 놀랐는데 어쩌면 이 모델 일도 보수 때문에 하는 걸지도 몰라.”
“그런 것 치곤 호응도가 진짜 좋았는데... 일에 관심도 있어 보이고. 특히 자세 잡고 워킹 하는 거 보면...”
서찬식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서찬식이 에이리가 보수에 관심 있어 보인다는 말에 놀랐던 것은 단지 첫인상 때문은 아니었다. 사진 찍으면서 보여주었던 몸의 움직임 같은 데서 이 일에 에이리가 적잖이 흥미를 느낀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도 했다.
돈만 목적이면 그런 집중도를 보여주기 힘들다.
강지명이 물었다.
“그렇게 특별해?”
“톱모델 이상이야. 신체 발란스 이런게... 서커스 선수도 저게 될까 싶을 정도로 절묘한 워킹을 보여주기도 했고. 신기해서 좀 어려운 자세 이런 것도 이야기해 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니까.”
사진 찍을 당시 에이리가 보여준 몸놀림을 재삼 떠올리며 서찬식은 이어 말했다.
“난 뭐 발레 선순가 싶더라. 근데 그럴리도 없는 것 같고.”
“가슴이 커서?”
“그래.”
강지명이 서찬식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낄낄 웃었다.
가슴이 크면 연기에 방해가 된 좋은 발레선수는 가슴이 모두 작다느니, 가슴이 크면 벌레리나로 대성할 수 없다느니 하는 속설이 있었다.
그 속설에 따르면 키도 크지만 가슴도 상당히 큰 에이리는 발레리나로서는 영 좋지 않은 몸을 가진 셈이었다.
분위기를 바꾸며 강지명이 말했다.
“하여간 딱 신비하긴 신비한 아가씨야.”
“그래도 매력적이지.”
“진짜 그렇긴 해. 섹시함 뿐만이 아니라 군인 같은 박력이 있고.”
“그렇지? 여잔데 마주 대하면 내가 압도된다니까.”
서찬식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근데 그 얘기하니까 굉장히 싫어하더라.”
“그래?”
서찬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찍으면서 어느 것이던가, 그 사진이 나온데 대해 남자조차 압도하는 박력이 있다고 칭찬을 했더니 아름다운 얼굴을 팍 일그러뜨리며 그 사진 빼고 다시 찍어 달라고 말했다.
아깝게 왜?
라는 것이 서찬식의 생각이었지만 본인의 요구가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정체가 뭘까?”
“나도 모르겠어. 어디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공주님?”
강지명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서찬식과 강지명 두 사람은 함께 의외로 그게 정답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에이리의 행동거지에는 보통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기품이 있었다. 숲속 공주님이라기 보다는 귀족적인 권위랄까.
“그러면 무슨 수를 쓰든 놓치지 마. 가능하면 한 석 달 특집으로 가고 싶은 아가씨니까. 포토샵 보정이 필요 없는 피사체는 진짜 오랜만이다.”
사실 포토샵이 본격적으로 활용되면서 이런 모델 사진도 포토샵을 쓰는게 당연시 되었다. 정말 보정 없이 찍어 올린 사진을 싣는 건 연예인을 통틀어도 실은 별로 없다.
강지명은 그 마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보수를 세게 불러서 연락처를 하나 받아 뒀어. 어떻게든 앞으로도 물고 안놔 줘야지. 아예 괜찮은 연예 기획사 같은데 연락해서 넣어버릴가 싶기도 해.”
“키워 보고 싶어?”
“이 아가씨 진짜 멋지잖아? 생긴 것만 아니라 속도 꽉 찬 것 같고. 인간으로서 매력을 느낀다고.”
서찬식은 엉큼하게 웃으며 물었다.
“여자로서는 아니고?”
“안 느끼면 그게 고자지.”
강지명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서찬식도 너무 뻔한 걸 물었나 싶어 어깨를 으쓱였다.
강지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건 아냐. 애인도 있다 하고. 그냥 선생이 제자 보는 마음같은 거야.”
“그 마음 알겠다.”
서찬식도 에이리를 찍으면서 이 모델을 좀 더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RK 김경길 알지?”
“그야 알지.”
서찬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경길이 이 바닥에서 얼마나 유명한데 모를 리가 있을까!
“그 사람도 요새 재목을 멋진 걸 하나 발견해서 꼭 좀 키워보고 싶다 벼르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나도 비슷한 영역에서 오래 활동하다 보니 진짜 보석이다 싶은 사람은 보면 키워 주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거지.”
부러운 듯이 강지명이 말했다.
능력과 사용할 수 있는 돈, 그리고 영향력에 압도적인 차이가 있는 만큼 김경길이 하려는 만큼 에이리를 도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갈 길에 문 정도는 열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뭐 그렇게 되면 좋겠다.”
“그러게 말야. 그러려면 일단은 여기 일부터 잘해야 하는 법이지만.”
“그건 걱정말고.”
서찬식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강지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호는 기대되는군.”
“그래.”
두 사람은 함께 모니터에 나온 에이리의 모습을 봤다.
*
이지연은 끙끙대며 쓰레기통을 들고 가게 뒤편의 골목으로 갔다.
퀘퀘한 쓰레기 냄새가 골목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름이라서 더 그런 냄새가 심했다. 이지연은 들고 나온 쓰레기통을 열어 안에 이물질이 섞여 있지 않은가를 확인한 다음 그 속 내용물을 밖의 쓰레기통에 쏟아 넣었다.
단순한 작업이지만 양이 많았고 더러워서 고됐다.
“휴.”
작업이 끝났을 때 이지연은 품에서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30분 정도 지나 있었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지연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화장실에 가서 손과 얼굴을 씻은 다음 옷을 갈아입고 가게로 돌아갔다. 교대한 알바생이 카운터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다 끝났어?”
그 알바생은 남자로 대학생이었다. 이지연보다 두 살이 많았고, 방학을 맞아 알바를 하는 중이었다.
“네.”
“내가 대신해 준다니까.”
생글 웃으며 붙임성 있게 인사하는 이지연을 보고 알바생이 아쉬운 듯이 말했다.
쓰레기통은 교대생이 오면 비우고 가는 것은 관례인데 알바생은 이지연에게 자신이 하겠고 이전부터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이지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다.
“제 일인걸요. 이런 걸 어떻게 신세 지겠어요.”
“그래. 그럼 가봐.”
알바생이 그런 호의를 베푸는 것은 물론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이지연이 무척 예쁜 소녀이기 때문이다. 이지연의 용모가 평범한 수준이거나 약간 예쁜 정도였다면 아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혹심이랄 것까진 없지만 호감을 사고 싶어 하는 일이니 또 칭찬받을 일도 아닌 셈이었다. 이지연도 상대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했기에 깨끗하게 거절했다.
“네. 그럼 오빠도 수고하세요.”
그리고 이지연은 편의점을 나서려 했다.
알바생은 사복 차림의 그녀를 초조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참.”
“네?”
우뚝 걸음을 멈추고 이지연이 고개를 돌렸다. 알바생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저기 주말에 혹시 시간 있니?”
“죄송해요. 알바가 있어서...”
미안한 얼굴로 거절했다.
알바생은 당황하면서 이어 물었다.
“그, 그래. 그런데 넌 언제 알바가 없니?”
이제까지 데이트신청 했다가 세 번 거절 당했는데 전부 이유가 저거였다. 사실 차라리 그냥 싫다고 하라는 말이 나오는 게 속 편하겠다 싶어 대 놓고 물어보기로 한 것이다.
이지연은 망설이다가 답했다. 불필요한 오해는 사지 않는게 좋겠단 생각에서였다.
“그게... 다예요.”
“일주일 다?”
황당하단 얼굴로 알바생이 물었다.
이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음 방학에 해외여행이라도 가려고?”
이지연은 고등학생으로 아는데 그렇게 열심히 알바를 항 이유라면 그 정도 밖에는 짐작하는게 없었다. 아니라면 명품이라도 사려는 건가.
“그 비슷한 거죠.”
사실은 그런게 아니다. 정말 그런 게 이유라고 일주일 내도록 쉬는 날도 없이 알바를 하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하지만 이지연은 그렇게 답했다. 그게 편한 대답이니까. 알바생은 역시 이렇게 까지 답을 들었으니 더 이야기 하는 것은 소용 없겠다 생각했음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지런하구나.”
“모처럼 제안해 주셨는데 죄송해요.”
붙임성 있는 애교와 함게 고개를 숙이는데 알배생도 이지연에게 원한을 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수고하세요.”
“그래.”
그리고 이지연은 밖으로 나갔다. 이제 알바생 홀로 남아 가게를 지켰다.
***
가게를 나온 이지연은 빠른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이동했다.
그녀가 나서 이동하는 모습을 편의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차에서 관찰하고 있었다. 각귀와 똥뱃살, 한성질이 타고 있는 아반떼였다.
이지연의 이동하는 등을 보고 각귀가 말했다.
“저기 간다. 추적해.”
“네.”
똥뱃살이 얼른 차를 몰기 시작했다. 조용한 엔진음 소리를 내며 아반떼가 이지연을 쫓아 움직였다.
물론 이지연은 자신을 미행하는 차가 있다는 사실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녀는 단지 바쁘게 움직이며 다음 갈 아르바이트 처를 생각했다.
‘후. 얼른 떡집에 가야지.’
편의점 다음 그녀가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는 여기서 다섯 정거장 떨어져 있는 재래시장에서 장사하는 떡집의 판매원이었다.
호객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지연은 용모가 고운 덕에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좋아 비교적 편하게 알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사 마치면 남는 떡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 알바하고 있는 떡집의 떡은 무척 맛있어서 남은 떡을 얻어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게 먹는 것이 이지연의 요즘 작은 즐거움이었다. 떡집 주인도 친절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르바이트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지연은 바라마지 않았다!
‘부디 대형마트가 들어오지 않기를!’
대형마트가 들어오면 재래시장이 박살날 거고 알바도 끊어지게 된다. 지연에게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지연은 골목을 꺾어 들어갔다.
그녀를 따르던 차량도 도로를 꺾어 움직였다. 그 쪽 길로 움직인다면 차량이 들어갈 수 있는 골목이 나오고 그 길이 걷는 길과 겹치는 골목길이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연이 걷는 중에 그 차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빵빵.
크락션이 울렸다.
지연은 길도 옆으로 비켰는데 왜 차가 저런 소릴 내는가 의아해 하며 고개를 돌려봤다. 차량 안에서 똥뱃살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저기 학생.”
“네?”
“길을 좀 묻고 싶어서.”
지연은 지금 고개를 내민 남자가 참 살벌하게 생겼다 생각하면서도 친절하게 대하려 노력했다. 접대일을 오래 하다 보니 몸에 배다시피 한 서비스 정신 때문이기도 했다.
덜컥 똥뱃살 옆 문이 열리고 각귀가 나왔다. 그는 손에 지도를 들고 있었다.
“여기 지도에 보면 말이야...”
“네.”
네비게이션을 왜 안 달았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이지연은 각귀가 들고 온 지도를 보려 했다. 그때 각귀의 손이 이지연의 옆구리에 가 낳았다. 그의 손에는 특수 제작된 주사기가 쥐여 있었다.
그것은 쉽게 이지연의 옷을 뚫고 따금, 하는 감촉을 남겼다.
이지연이 이게 뭔가 하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
이지연은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각귀가 부드럽게 그녀의 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