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에이리는 웃으며 이어 말했다.
“뭐 그건 괜찮아. 반한 게 죄지 어쩌겠어. 너만 그런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 정도는 그러니 감수하라고.”
“쳇.”
결국 에이리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에이리는 이어 강민을 등 뒤에서 껴안으면서 위로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해. 니들이 보는 저 멋진 아가씨가 내꺼다! 라고.”
“뭐 그렇긴 하다만.”
그건 좀 자랑스러울 것 같았다.
멋지게 나온 사진을 보면서 다들 감탄하는데 사실 저 여자가 자기 여자다! 라고 하면 그건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그래서 인터넷에는 자기 애인 얼굴부터 시작해서 수영복 사진까지 올려서 점수 매겨 달라는 해괴한 놈들이 줄을 잇지 않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거 하며 돈을 준다잖아. 여기서 줄곧 너한테 신세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도 알아서 해 봐야지. 그런 면에서 이게 참 좋아. 검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데 모델만 되어주면 되고.”
“그런건 신경 쓰지 마. 여기서 너 하나 편하게 살도록 하는 정도를 못할까.”
강민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건 뻔히 아는 거야. 하지만 내가 새장 속 새도 아니고 공주님처럼 대접받으며 편하게 늘어져 있길 바란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진 않아.”
강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에이리와 오래도록 같이 모험을 해 봤다.
그래서 안다. 그녀가 얼마나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인가를. 보호받는 공주님 따위가 결코 아니다. 그녀야말로 세계를 구한 진정한 영웅의 하나였다.
“그래. 그러니 이 세계와 친숙해 진다는 면에서도 괜찮은 일 아니겠어? 이 정도면.”
“쩝. 뭐 네 생각이 그렇다면 뜻대로 해.”
“고마워.”
강하게
등 뒤에서 에이리의 풍만한 가슴 감촉을 느끼며 강민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역시 완전히 받아들인건 아니었다.
“으으, 하지만 역시 분한데.”
“후후.”
에이리는 그런 강민의 모습이 즐거워서 웃었다.
남자가 여자의 가벼운 질투를 즐기듯이, 여자 역시 남자의 가벼운 질투는 즐거워하는 법이다. 사실 이 정도 질투해 주지 않으면 그게 더 곤란하기도 했다. 그래선 사랑받고 있는 거라 말하기도 어렵다.
강민은 이어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참, 그리고 너도 휴대폰을 마련해야 할 텐데.”
“휴대폰이라면, 저 연락하는 기계?”
“응. 근데 신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민은 곤란하단 얼굴로 말했다.
“신분이 있어야 해?”
“뭐 단순히 연락하는 기계가 아니라서 말야.”
“흐응.”
에이리는 일단 우즈벡 출신이라 주변을 속이고 있지만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다. 외국인 등록을 하고 들어온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의 체류기간이 길어진다면 불편해질 수도 있었다.
“뭐 그건 적당히 알아볼게. 내꺼 또 하나 만들어서 그걸 니가 사용해도 되고.”
“알았어.”
이어 강민의 말에 문득 걱정이 되어 에이리는 물었다.
“모델하는덴 문제 없을까?”
“괜찮지 않을까? 그건 뭐 그쪽 사람하고 적당히 상의해 봐.”
“그럴게.”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
강민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에이리는 다음날 약속했던 대로 강지명에게 전화했다. 강지명은 아주 기뻐하며 에이리에게 얼른 와 달라고 했고, 어렵사리 에이리는 그가 와 달라고 하는 서울 시내의 한 건물로 들어갔다.
그 건물의 사무실에서 곧 강지명을 만난 에이리는 자신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고 신원을 명확히 밝히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왜 신원을 밝히기 어려운가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지명은 에이리의 말을 듣고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거야 괜찮습니다. 신비주의 컨셉으로 나가면 되는 거죠.”
“그런가요. 걱정했는데 다행이군요.”
“모델이란게 사실 자영업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깐깐하진 않습니다.”
강지명은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맥심은 이름있는 잡지고 그만큼 회계 문제도 깐깐하게 할 수밖에 없다. 영수증이나 기록이 남아야 돈이 움직인다는 말이다.
표지모델쯤 되면 속이기도 힘들다.
하지만 강지명은 이번엔 그걸 자비로라도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이유로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기대한 만큼의 반응을 얻을 자신이 있는 만큼 나중에 위에서 말이 나오면 도리어 들인 돈 이상을 회사로부터 회수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도 있었다.
강지명의 말이 마음에 든 듯,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아요. 곧장 시작하죠.”
“그렇지 않아도 다 마련해 뒀습니다. 이쪽으로 와 주시죠.”
“그러죠.”
강지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리를 안내했다. 에이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강지명이 안내하는 쪽으로 따라 움직였다.
***
작업이 끝난 다음이었다.
피로한 얼굴로 강지명은 작업실에 들어갔다. 거기는 오늘 에이리의 사진을 찍은 사진사인 서찬길이 컴퓨터로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어느 걸 어떻게 사용할지 그리고, 간단히 손을 봐서 더 밋지게 보이도록 하는 작업을 진행중이었다.
강지명은 작업실 안의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시면서 다가가 물었다.
“어때?”
“끝내주는데.”
사진을 보면서 서찬길은 힘을 담아 답했다.
기대했던 대로의 대답이라 강지명은 만족한 듯이 웃었다.
“그렇지? 나도 거리에서 우연히 보고 벼락 맞은 것 같았다니까.”
“어디 소속된 모델도 아니라면서?”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서찬길이 물었다.
강지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놀러온 외국인이래.”
“호, 어디? 동유럽 쪽인가?”
화면 속 에이리의 용모를 보면서 서찬식이 물었다.
그는 사진을 찍는 사람인 만큼 인간이라는 피사체에 대해 평범한 자살보다는 자세히 아는 편이엇다. 한국인들이 미묘하게 중국인과 일본인의 용모를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서찬식은 백인이나 흑인의 용모를 구분할 수 있었다.
용모에서 확실히 그런 걸 알긴 어려운 만큼 한 70% 정도의 정확성이긴 하지만 그의 눈으로 볼 때 에이리는 유럽, 그것도 좀 추운 지방의 사람들과 용모가 좀 비슷한 것 같았다.
강지명은 고개를 저었다.
“우즈벡이라던데?”
“우즈벡?”
틀릴 수는 있지만 이건 또 시원하게 틀렸다 생각하며 서찬식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인터넷 속설을 떠올리고 말했다.
“또 인터넷에선 난리 나겠네.”
“그렇겠지.”
우즈벡에 대한 허황된 환상을 떠올리고 그들은 낄낄 웃었다.
우즈벡 뿐이 아니고 유럽 각 국가를 비롯해서 외국 미인에 대한 환상이 널리 퍼진게 인터넷이긴 하지만.
어쨌건 에이리가 참 못 믿을 만큼 굉장한 미인인건 사실이었다.
그들은 곧 웃음을 그쳤고, 서찬식은 물었다.
“인터뷰는 다 했어?”
“대충. 그래도 상세히는 역시 알 수 없었고 말야.”
표지모델인 만큼 사진만 찍는 데서 그칠 수는 없었다. 몇 마디라도 인터뷰해서 메이지를 채우는 것도 역시 중요했다.
그래서 형식적이나마 인터뷰를 했다.
“굉장히 내용이 재밌었어.”
“그래?”
하지만 모델 인터뷰는 모델 자신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유명인이 아니면 보통 시시한 형식상의 장식에 불과하기 마련이다.
다들 관심을 가지는 것은 모델의 아름다운 몸이지 그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런데 오래 이 일을 해 온 강지명이 재밌다고 평할 인터뷰가 나왔다니 흥미가 동할 수 밖에 없었다.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니까 거기서 오는 이질감이나 차이 같은게 재밌는 이야기가 되긴 하는데 이 아가씨는 그게 굉장히 컸거든.”
“호, 그래? 뭐랬길래?”
강지명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우리나라가 식민진줄 알았다는 거야?”
“뭐?”
서찬식은 상상하지 못한 말에 당황한 표정이 됐다.
그 표정이 나올 줄 알았다는 얼굴로 강지명은 말을 이어나갔다.
“거리 나가보면 자기나라 말을 너무 안 써서 그런 줄 알았다는군. 아니라고 하니까 왜 남의 나라 말을 그렇게 좋아해 하냐고 의아해 하던데?”
“아... 그런건 있지.”
서찬식은 고소를 지었다.
한국이 지금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 어느 연예인이던가. 외국에 나가서 거지도 영어를 한다는데 열등감을 느끼고 말았다는 고백을 했었다.
한국어의 언어구조 상 영어는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한국어와 그만큼 영어가 큰 차이를 가진 어법구조의 언어라는 말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한국어는 아주 어렵다.
그러니 영어를 못하는데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필요한 사람만 익히면 된다.
그런데 다들 영어에 열등감을 지니고, 그 열등감이 온갖 문화에 반영되어 영어를 위대하고 고상한 언어로 만들고 있다. 심지어 영어를 못하면 인간 자체가 천한 3류가 되는 듯이 여기고 있다.
마치 노예가 주인의 언어를 동경하는 꼴이다.
“솔직히 좀 창피하긴 했다. 게다가 그 아가씨는 외국인인데도 한국어 정말 잘 하던데. 자기나라 말처럼. 그런데 정작 한국인이면서 우리는 참.”
“찔리는 이야기긴 한데 맥심에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잖아?”
맥심은 화장실에서 보기 좋은 잡지라는 식으로 평가 된다.
심심파적 잡지란 뜻이다.
문화비평에나 어울릴 주제는 맥심의 색체완 좀 이질적이다.
“뭐 어때. 가끔은 그런 지적도 진지하게 들어둘 필요가 있는 거지. 안 그래도 패션업계 같은데서 허세 영어 작렬한다고 비웃고 하는 것도 있었잖아. 한 발 정도는 걸치고 있는 셈이니 그런 의견으로 자체정화 하련다는 인상 주는 것도 좋지.”
강지명은 그렇게 말했다.
“그렇긴 하겠군.”
서찬식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도 가끔 패션 잡지랍시고 보면 해괴한 단어를 쓰는 것들이 많아서 소름이 온몸에 돋곤 했었다.
서찬식은 거기까지 이야기 하곤 화제를 적당히 정리해야 하겠다 생각해 에이리에게로 이야기의 화살을 돌렸다.
“하여간 이번호 나가면 문의가 천통은 올 거다. 준비해 둬.”
“그렇게 자신 있어?”
“그럼.”
서찬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지명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서찬식이 작업하는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봤다. 자신이 발굴한 아가씨긴 하지만 역시 매력적이다.
강지명은 문득 말했다.
“흠, 그러면 아예 신비주의 컨셉 나가는 것도 좋지 않아?”
“이번이 끝 아냐?”
의외라는 얼굴로 서찬식이 물었다. 놀러온 관광객이라 하니 이번에 한 번 찍는게 다일 줄 알았는데 컨셉을 잡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앞으로도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 아닌가.
강지명은 혀를 찼다.
“저런 걸작을 이번만 하고 놓칠 수 있냐? 사정사정해서 어떻게든 인연의 끈 정도는 만들어 둬야지. 다행히 저 아가씨도 관심이 있는 것 같았어. 놀러 왔다곤 해도 체류도 상당히 긴 모양이었고.”
“연예계 데뷔 같은 거라도 해 보려 하나? 그런 거라면 확실히 한방일걸.”
서찬식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여기서 같이 작업하는 걸 끝내기엔 너무 매력적인 피사체다. 에이리란 아가씨는.
그러나 강지명이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은 소리 하긴. 신비주의로 나간다 했잖아. 그건 내가 그러려는게 아니라 저 아가씨가 별로 자기 얘길 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런 사람이 예능에 잘도 나가겠다. 그냥 보수를 쎄게 부르니까 관심 있어 하더라고.”
“뭐? 그거야말로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서찬식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능이 관심이 없다는 건 그럴 수 있다. 모델은 잠깐 하고 끝날 수 있지만 예능 같은건 직접 나가서 능동적으로 이야기도 하고 해야 하는 거라서 거부감이 더 클 수 있다.
하지만 보수에 관심을 보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