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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져서 놀러왔다-53화 (53/227)

53화

혜경과의 과외를 끝낸 강민은 심심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 하는 방송은 시시한 예능이나 가쉽 방송으로 강민이 별로 흥미있어 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자연히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후아암.”

하품을 하고 강민은 시계를 봤다.

“얘는 나갔더니 소식이 없네.”

에이리가 나간지 네 시간이 넘었다. 슬슬 걱정이 됐다. 검후라 하면 전설적인 길치이기도 한데 또 어디서 헤메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에이리는 비록 약해졌다고 해도 강민보다도 강할 정도로 초월적인 강자다.

흑심을 품고 에이리에게 따라붙는다면 그놈들은 그날로 최하 남자 인생은 종친다고 봐야 했다. 진지하게 상대하려면 완전무장한 군인을 백 명 이상 끌고 와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본 강민은 그것도 부족하리라 싶었다.

강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 던져둔 핸드폰이 울렸다. 에이리인가 해서 봤더니 호성이었다. 그는 폰을 들었다.

“어, 호성이냐.”

-그래.

“어떻게 됐어?”

강민은 물었다.

호성이 오늘 이렇게 연락할 용건은 어제 있었던 3학년과의 승부 외에 없었다. 물론 승패가 어떨진 뻔했지만.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의 답이 돌아왔다.

-그런 건 보고 안 해도 알 거 아냐?

“하기야 뭐 어련히 잘 알아서 했을까.”

피식 웃으며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 저편에서 호성이 낄낄 웃었다.

-엉망으로 박살나서 울고짜는 모습이 참 걸작이더란 말야. 다 녹화해서 협박 재료로 삼았어. 또 다음 날짜도 잡혔어.

호성은 어제 잡아 족친 수길에게 연락해서 다른 삼학년 일진과의 싸움 날짜를 잡아 둘 수 있도록 하라 했다.

일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특히 2학년에게 처참하게 깨졌다는 것이 3학년 일진과 그 패거리 사이에서는 크게 화제가 되어 다들 분개해 있는 상태라는 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그걸로만 절대 안 끝날걸. 삼학년이랍시고 더러운 자존심은 있을 테니까.”

강민이 지적하는 것은 치사한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암습이라던가, 쪽수로 밀어붙인다던가 어쩌면 위험한 무기를 사용한다던가.

하지만 호성은 자신만만했다.

-그건 충분히 대비하고 있어.

“하긴 네 전공이었지.”

강민은 웃으며 그렇게 말을 던졌다.

-헤헤헤.

호성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그랬다.

호성이야 말로 강민이 지금 걱정한 분야에서는 일가견이 있던 몸이다. 모범생을 가장해서 다른 일진들을 돈으로 움직여 강민을 궁지에 몰았으니까.

머리도 좋고 돈도 많은 만큼 호성이야 말로 그런 치사한 방법의 스페셜 리스트라 할만했다.

“그럼 수고해라.”

-응!

강민의 응원에 호성은 간단히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곧 학교도 정리되겠군.’

그러면 적어도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이지메 때문에 괴로워 하는 아이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크진 않지만, 그것만 해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또 그렇다 해도 완전히 이지메가 사라질 리 없다는 것은 강민도 알고 있었다. 일진을 주축으로 한 가혹한 이지메는 사라져도 반 전체가 은근히 따돌리는 방식의 이지메는 계속 남을 것이다. 하지만 뭐 그렇게까지 문제가 될 만한 건 아니니까 괜찮았다. 조직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이지메도 아니고.

강민이 작게 만족하고 있는데 다시 또 핸드폰이 울렸다.

“응?”

보지 못한 전화번호가 적힌 연락이었다. 핸드폰 바꾸라는 어느 대리점 전환가 하고 일단 받았다.

“여보세요.”

-강민?

돌아온 것은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강민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아, 에이리야?”

-맞아.

이어서 강민이 물었다.

“뭐하고 있어? 언제 들어와?”

-그게...

자신만만하던 에이리의 목소리가 살짝 죽었다.

강민은 사정을 쉽사리 눈치 챌 수 있었다.

“길 잃었구나?”

-......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확실한 답이었다!

-잃었다기보다 좀 번잡해서 피곤한 것 뿐이야.

하지만 에이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강민은 센 척 하는 에이리의 답에 피식 웃었다. 자주 있는 일이라 별 놀라울 것도 없었다.

“어디야?”

강민이 물었다.

검후의 전설은 한국에서도 이어진다!

*

강민은 얼른 에이리가 말한 장소에 가서 헤매고 있는 에이리를 찾았다. 길을 못 찾아 헤매는 본인과 달리 에이리 자신은 눈에 잘 띄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강민은 그녀를 데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면서 강민은 놀리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어때, 복잡하지?”

“뭐 그건 인정해. 그래도 금방 익숙해질 수 있을거야.”

한 번의 실패에는 자존심을 꺾지 않는 에이리였다. 강민은 별로 기대하지 않으면서 응원했다.

“그렇겠지.”

“아, 그리고 나갔다가 이런걸 받았어.”

방안으로 들어가면서 에이리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은 듯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강민에게 내밀었다. 강민이 그걸 받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어, 맥심?”

“알아?”

강민이 아는 눈치자 에이리가 물었다.

“본 적은 없지만 유명하니까. 인터넷에서는 자주 거론되는 잡지지. 그런데 이걸 네가 왜 가지고 있어?”

“그걸 준 사람이 표지모델을 하지 않겠냐던데.”

“표지모델?”

강민이 뜨악한 표정을 했다. 맥심의 표지 모델이라니. 훈훈하고 아리따운 여성들이 많이 나오던 만큼 에이리를 보고 제안이 들어와도 이상할게 없긴 하지만...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궁금해 하며 에이리가 물었다.

“위험한 일이기라도 해? 왜 그런 표정을 지어? 그냥 모델이라 들었는데.”

“그렇긴 한데...”

“그런데 왜?”

강민은 어렵사리 답했다.

“찍는 사진들이 좀...”

훈훈하고 멋진 사진들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섹시한 사진들이다.

미인들의 훈훈한 사진인데 강민이 싫을 리가 없다.

아주 좋아하지!

그러나 자신만 볼 수 있다면 모를까, 자기 여자가 남들에게도 그런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역시 크진 않아도 거부감이 들었다.

“벌거벗고 찍어야 하는 거야?”

혹시나? 하는 불쾌한 표정으로 에이리가 물었다. 만일 그렇다면 모델이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던 남자는 정말 터무니없는 말을 한 셈이다.

물론 맥심은 그렇게 수위 높은 잡지가 아니다. 강민은 얼른 고개를 저어 에이리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방향은 좀 비슷하지.”

“그래?”

“남자들 보여주는 잡지니까 그런 사진이 메인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오해를 바로잡긴 했어도 역시 에이리가 거기나가 훈훈한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에이리가 강민의 표정을 보고 기쁜 듯 웃었다.

“후후, 질투하는 거야.”

“질투는 무슨...”

“지금 저기 나온 저 여자들 정도 돼?”

TV가 켜져 있었다.

막 광고를 하는데 거기 멋진 몸매의 연예인이 몸매를 뽐내면서 남자들을 유혹하는 것 같은 광고를 하고 있었다. 딱히 옷을 벗은 건 아니지만 미니스커트 차림에 가슴을 강조하고 있어서 섹시하다고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맥심에 나오는 화보보다 약간 낮은 수위 정도였다.

“그 정도?”

“그러면 문제 될 건 없는 것 같은데.”

에이리는 흥미가 동한 듯 말했다.

“아니 그래도...”

“이런 영상에서 당당하게 보여줄 정도라면 다들 대단찮게 생각하는 거 아냐?”

에이리가 원래 있던 세계에서라면 상당히 놀라운 차림새가 할 만하지만 여긴 그곳이 아니다. 여행을 많이 다닌 에이리는 각지의 풍습에 다른데 익숙했고 다양한 문화에도 포용력 높게 적응할 줄 알았다.

그런 에이리의 눈으로 볼 때 아무나 볼 수 있는 데서 저런 차림을 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건 일상적인 차림새란 뜻으로 보였다.

그리고 에이리의 그런 생각은 정답이다. 강민이 물었다.

“흥미있어?”

“약간.”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시 강민은 쉽게 하라고 동조해 주고 싶진 않았다.

“음.”

“표정이 뚱한데.”

“내 여자가 다른 놈들 눈요깃감이 된다는데 기뻐하긴 힘들지.”

툭하니 내던지듯 강민이 말했다. 에이리가 환하게 웃었다.

“와, 그거 두근거리는 말인데. 평소에도 그런 말 자주 좀 해 주지.”

“쳇!”

하지만 그런 말은 창피해서 남자로선 하긴 어려운 말이다. 작심하고 여자 꼬시려는 선수놈들이라면 몰라도.

“음, 하지만 그 말 들으니까 좀 욕심나는데.”

“뭐가?”

이 여자가!

라는 표정으로 강민은 에이리를 꼴아봤다. 에이리는 살짝 쑥스러운 표정이 돼서 강민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알잖아. 내가 이런데 열등감 있다는 거.”

“아, 그 줄창 듣는 여자답지 않다는 거?”

“그래.”

에이리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 듯이 아름다운 에이리지만 원래 있던 세계에서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다.

아름다운 자체야 널리 인정받았다.

그러나 에이리는 아름다운 여성이기 이전에 검후였다.

강대한 힘의 절대자!

그래서 누구나 에이리를 볼 때면 검후라는걸 생각했지 그녀가 아름답단걸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런 힘을 가지기까지의 과정 때문인지 에이리 역시도 타고난 용모의 아름다움과 달리 여성다운 행동거지 같은 것은 전혀 갖추지 못했다.

사실 아쉽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강민을 만나기 전의 일이었다.

강민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뭘 그런걸 신경 써. 너 진짜 예뻐. 아무도 거기 토 못 달아. 니가 남자같단 소리 듣는건 그냥 너무 세서 그런 거야. 천성 무인이고.”

“그건 알아. 그래도 말야...”

멋쩍게 에이리는 말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내 맘에만 들면 되는 거 아냐?”

강민이 강하게 말했다.

이건 그녀가 사진을 찍는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에이리가 오래도록 자기가 여성스럽지 않다는 데 대해서 열등감 같은걸 가지고 있는걸 고쳐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었다.

“쯧쯧,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건 그렇지가 않아.”

그리고 강민에게 충분히 여자답다는 말을 듣는건 부모가 자식 칭찬하는 것 같아서 순수하게 제대로 된 평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문제였다.

“걔 때문에 그래?”

짐작가는 사람이 있어서 찔러봤다.

여자면 여자다워야 한다면서 검후랑 자주 싸우는 아가씨가 다른 세계에는 하나 있었다. 싸우는걸 보면서 강민은 항상 둘이 사이가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래.”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쌓인게 많았던 듯, 타오르는 표정이었다!

그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러면 사실 좀 할 말이 없어진다. 여긴 여자로서의, 아니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같은게 걸린 문제가 되니까.

이어서 에이리는 불만스럽게 강민을 째려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너, 나만 보고 살지도 않잖아.”

“아니 그건...”

그 말을 에이리가 하는 순간 강민은 할 말이 없었다. 에이리는 강민만 좋아하지만 강민은 에이리만 좋아하는게 아니다!

권력자라면 일부다처가 상식인 세계에 있다보니 강민도 그런걸 당연시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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