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에이리는 적지 않은 시간 시내를 돌아다니며 걸었다.
낯선 곳이었고, 낯선만큼 볼거리도 많아서 걷는게 지루하지 않았다. 공기가 너무 나쁜 것이 흠이긴 하지만.
“흠?”
길을 가던 중에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안이 훤히 보이도록 만들어 놓은 음식가게 같은 곳이었는데 죄 여자만 있었다.
여성전용가게 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남자가 아주 없는 건 또 아니었다.
무슨 가게인가 호기심에 에이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살폈다. 영어로 무어라 적혀 있었다. 한글은 알지만 영어는 모르는 에이리로선 해석 불가능한 말이었다.
그래도 영어들 틈새로 찾으니 한글이 보였다.
스타커피라는 곳이라고 한다.
겨우 가게의 이름을 찾아낸 에이리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 주변을 쭉 둘러봤다.
맞았다.
한글이 보이지 않았다.
건물이나 사람들의 옷 곳곳에 나온 문자의 대부분은 한글이 아니거나 한글이라 해도 한국어를 한글로 표기해 놓은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문명의 말이었다.
에이리는 미간을 좁혔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군. 왜 자기 나라 말 놔두고 이상한 말을 이렇게 크게 사용하는 거지? 식민지인가?’
식민지라면 그럴 수 있다.
그 나라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그 나라를 지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특히 지배층이 주인 나라의 말을 사용하고 하층민만 자기 나라 말을 사용하도록 하면 저절로 자기나라 말만 사용하는 사람들은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도태되게 된다.
그러면 종주국의 문화와 말을 따라 배우는데 열심히 노력하게 되고 따라서 식민지 인간들은 3류 백성으로써 종주국의 일원이 된다.
주변 가게 간판을 보니 자기 나라 말은 안 쓰려고 아주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은데 그건 성공적으로 식민지가 되어가는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식민지 치고는 또 평화롭네.’
강민이 그런 얘기도 안 했고 말이다.
알 수 없다 에이리는 생각했지만 다른 세계니 다른 문화도 있는 거라 생각하는 정도로 넘어가기로 하고 커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
점원이 인사하다 굳었다.
점원만이 아니고 점내 손님들도 다.
에이리의 용모를 처음 접한 이들이 으레 겪는 일이라 이제 에이리는 신경스지 않고 카운터로 갔다.
“여기서 가장 자신 있는 걸로 하나 줘.”
“네?”
점원이 당황했다.
에이리는 다시 주문했다.
“자신 있는 걸로.”
“아니 손님 그런 식으로 주문은 받지 않고요 여기 메뉴에 나온대로...”
그러면서 점원은 매뉴판을 에이리에게 내밀었다. 메뉴판을 에이리는 찌푸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여기 주인은 자기 실력에 자신도 없냐는 불평은 속으로만 했다.
“뭐야 이게...”
메뉴판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뭔가가 많았다.
커피 자체를 모르는 에이리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뭘 골라야 할지 모를 선택표였다. 결국 에이리는 더 편한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우선 주변을 둘러봤다. 여러 여자들이 수다를 떨거나 혼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 괜찮아 보이는 걸 하나 선택해 손가락으로 지적하며 주문했다.
“그럼 저 아가씨가 마시는 걸로.”
“네. 그럼 카라멜 마끼아또로 주문 받았습니다.”
점원은 웃는 얼굴로 말했고 에이리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지불했다.
돈 계산이 끝나고 곧 있어 커피가 나왔다.
“나왔습니다.”
“흠.”
그것을 들고 에이리는 근처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커피를 마셨다.
“음.”
약간 뜨겁지만 단 맛이 기분 좋았다.
에이리가 살던 세계는 맑은 물이 귀했다. 그래서 약한 도수의 술이나 차 같은 걸로 마실 물을 대체하는 일은 흔했다.
그래서 커피라는 이 음료에 익숙해지는 것도 쉬웠다.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라멜 마끼아또를 평가햇다.
‘나쁘지 않군.’
이 세계에 와서 낯선 음료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건 괜찮은 경험이었다. 특히 요즘 한참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점내의 사람들이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창밖에 시선을 던지는 에이리의 모습을 감탄해 바라봤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화보라고 할까.
***
군인들에게 전설적인 잡지가 있다.
이름은 맥심!
처음 휴가 가는 후임에게 선임이 사오라고 자주 주문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후임이 사온 것이 맥심 커피라 이후 군 생활에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자주 만들어지는 잡지이기도 했다.
군인들에게 전설적인 건 별 다른 이유가 아니고 섹시한 여성을 많이 볼 수 있는 잡지니까!
더 수위가 높은 잡지는 군대 반입이 안 되기 때문에 맥심이 군대에서 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인네들의 헐벗고 유혹적인 자태를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할머니도 여자라 예뻐 보인다는 군대!
그래서 맥심은 소중한 잡지다.
그렇다고 맥심이 군인 전용 잡지라는 소린 또 아니다.
맥심은 섹시한 여성들의 자태를 세일즈 포인트로 내세우지만 그 외에도 볼거리가 많은 잡지였다.
한데 그 편집장인 강지명은 지금 맹렬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길을 걸으면서 위가 아플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빵꾸난걸 어떻게 메우지!!’
섭외된 모델이 아파 병원에 가고 말았다.
그것도 표지모델이!
맥심은 뭐라 해도 남성 대상의 잡지다. 매력적인 여성의 헐벗은 모습이 없어서는 잡지 매상은 물론 고객들에게 엄청난 욕을 들어먹을 수밖에 없다.
그 표지모델이 빵꾸가 나고 말았다.
여러군데 연락을 넣어 이걸 만회할만한 모델은 찾고 있지만 도통 쉽지가 않았다. 맥심의 이름값이 있느니만큼 허접한 모델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내일까지 어떻게든 섭외에 성공해야 하는데...’
강지명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경악한 표정으로.
그가 멈춘 곳은 스타커피의 한 매장 앞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표정으로 가게 안을 뚫어져라 봤다.
그는 처음에 방금 스쳐 본 것이 간절함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었는가 생각했다.
‘지, 진짜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급해서 헛것을 본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스타커피의 매장 안에 빵구난 모델을 대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판을 갈아엎게 만들만하다 싶은 미인이 있었다.
얼굴?
말할 필요도 없다.
몸매?
외국인이라 그런지 이것도 말할 필요도 없었다.
키도 훤칠하니 컸고, 단순히 매력적이고 섹시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도 좋았다. 남자에게서도 쉽게 느낄 수 없는 당당함이 그 미인에게서는 느껴졌다.
‘놓칠 수 없다!’
반사적으로 강지명은 그렇게 생각했고 헐레벌떡 가게 안으로 들어가 그 미인 앞에 섰다. 미인은 갑자기 가게에 들어와 자기 앞에 선 남자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강지명은 그 여자를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영어 가능하세요?)”
에이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용모 때문인가 외국어로 대화를 거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에이리가 아는 외국어는 고향말. 그건 강민을 제외하면 이 세계에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을 만이었다.
“한국어로 말하세요.”
상대 남자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으흠, 한국어를 잘 하시는군요.”
“무슨 용건이시신가요.”
빙그레 웃으면서 에이리는 물었다. 보아하니 꼬시려고 이런 자리까지 뛰쳐 들어온 것 같진 않았다. 강지명은 진지하게 제안했다.
“저, 모델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모델?”
에이리는 그게 뭐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그게 뭔가 잠시 생각하다가 떠오르느게 있어서 물어봤다.
“그림 그리는데 앞에 앉아 있는 거 말하는 건가요?”
“그것도 모델이긴 합니다만 제가 말하는 건 그런건 아니고... 아참.”
자신의 말이 성공했다고 느끼면서 그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에이리에게 내밀었다.
“저 이런 사람입니다.”
에이리는 명함을 받아 그 내용을 봤다. 일종의 신분증 같았다. 연락처와 이름, 그리고 일하는 기관명과 지위가 적혀 있었다.
“흠? 맥심 편집장?”
“네. 맥심이라고, 혹시 모르세요?”
기대어린 표정으로 강지명은 물었다.
맥심은 남성대상 잡지긴 하지만 굉장히 많이 팔리는 만큼 여성들에게도 인지도 자체는 낮은 편이 아니다.
전국구, 아니 전세계 구급 잡지니까!
거기 모델이 되어 보지 않겠느냐는건 어지간한 연예기획사에서 아이돌이 되어 보지 않겠느냐 제안하는 것 이상으로 여자들에게 매력적으로 여겨질 만한 제안이었다.
강지명은 그런 맥심의 명성에 힘입어 에이리가 혹하고 넘어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에이리는 고개를 저어 강지명의 기대를 배신했다.
“아쉽지만.”
“나름대로 유명한 잡지입니다. 남자들 상대로는 전세계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잡지기도 하고요. 유명한 모델이나 배우도 많이 섭외하죠.”
안타까워하며 멋쩍은 듯이 강지명은 설명했다.
그런가 보다 하고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저기, 그래서 꼭 이번달 표지 모델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잡지 명성으로 밀고 들어가도 소용없겠다 생각하고 감지명은 성심성의껏 제안했다. 에이리는 뭔지 모른다는 얼굴로 물었다.
“표지 모델이란건 뭐죠?”
“그야 표지 커버에 쓸 사진하고... 내부에 나올 사진 몇 장을 찍는 모델이 되어 주셨으면 하는 거죠.”
생각도 못한 질문이 나온 것에 당황해하며 강지명은 답했다. 에이리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흠.”
“보수는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강지명이 외쳤다.
에이리는 그 말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어디든 돈은 필요하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강민에게 계속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립해야 했다.
하지만 재주라곤 칼 잘 쓰는 것 하나뿐인데 여기선 그걸로 먹고 살기 여의치 않다고 해서 약간 고민하고 있었다. 한데 그냥 사진이란걸 찍도록 가만히 있는 정도로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직 이 세계에 대해 잘 모른다. 당장 덥석 그러겠다 하긴 어려웠다.
“지금 당장 답하긴 곤란하고 나중에 연락 드리도록 하죠.”
“아, 알겠습니다. 그럼 꼭 좀 연락 부탁드립니다. 내일 오전 12시전에 연락 주세요.”
강지명은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라는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에이리도 일단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그럼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고 강지명은 아쉬운 듯이 까페를 떠났다. 에이리는 그가 남기고 간 명함을 흥미로운 듯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