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해져서 놀러왔다-51화 (51/227)

51화

혜경은 붉어진 얼굴로 강민의 집 문앞에 서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기가 망설여졌다.

‘어휴, 그런 꼴을 보였으니...’

며칠전 있었던 일이 또 생각나고 말았다.

술을 마시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걸 강민에게 연락했고, 그가 집으로 데려다줬다. 가르치는 학생에게 정말 못 볼 꼴을 보여주고 만 것이다.

물론 술을 먹어서 당시 어떤 모습이었던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짤막짤막하게 기억나는 건 몇 장면이 있었다.

‘어휴.’

그걸 생각하면 붉어진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그래도 안 들어갈 수는 없었다. 부끄럽지만 꾹 참고 얼굴에 철판을 까는 수 밖에.

혜경은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덜컹.

문이 열렸다.

혜경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얼굴로 생글 웃으며 인사했다.

“안...”

하지만 그의 인사는 중간에 굳고 말았다.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이 너무도 의외였기 때문이다. 포니테일 형식으로 머리를 묶고 남자처럼 헐렁하게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믿지 못할 만큼의 미인이 갑자기 나타났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이리는 혜경의 굳은 얼굴을 의아한 듯 바라봤다. 그녀의 등 뒤에서 막 나온 듯한 강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왔어?”

“어떤 여잔데.”

고개를 돌리며 에이리는 답했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이 시간에 올 여자 방문자라면 한 사람 뿐이었다.

“아. 혜경 누나구나.”

“혜경 누나?”

에이리가 의아하게 물었다.

“응. 내 공부 봐 주는 분이야.”

“호, 공부도 하고 있어?”

비웃는 눈길로 에이리는 강민을 바라봤다. 그 눈길이 심기에 거슬려 찌푸린 얼굴로 강민이 물었다.

“뭐야 그 눈빛은?”

“아니, 기특해서.”

“흠, 말해두지만 나 모범생이라고. 너나 걔나... 주변에 있던 놈들이 괴상하게 머리가 좋은 거였지.”

강민이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뭐 그건 알고 있어.”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랬다. 강민이 이세계로 건너가서 사구니 친구들은 대부분이 천재였다. 천재 아닌 놈이 희귀했다.

강민도 공부하는데 쓸모 있는 천재가 아닐 뿐, 그쪽 기준으론 충분히 천재였으니 어떤 의미에선 천재클럽을 만들고 있었다.

강민은 문 앞으로 와서 여전히 굳어 있는 혜경을 의아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있어요. 들어와요.”

“아... 그게. 좀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렇게 놀랐는가는 뻔했다.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에이리가 처음 보면 좀 임팩트가 있죠.”

“응, 그, 그래.”

아직 놀라움이 남은 눈길로 혜경은 에이리를 훔쳐보듯 바라봤다.

같은 여자의 눈으로 봐도 반하고 말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였다. 하지만 단지 아름답다기 보다도 박력이 있는 용모라 더 매력적인 것 같았다.

키도 훤칠하고, 그런데 가슴도 크고.

“......”

괜히 슬퍼진 마음으로 혜경은 집안에 들어갔다. 셋은 함께 방으로 갔고, 에이리는 싱긋 웃으면서 혜경에게 말했다.

“저 녀석 가르치신다면 수고가 많으시겠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제 이름은 들으셨죠. 에이리라고 합니다.”

“아... 그, 그래? 나는 혜경이라고 하는.. 데? 아니, 존댓말을 써야 하나?”

혜경은 혼란스러운 듯이 말했다. 겉으로만 보기에 에이리의 나이는 대충 스물 이상으로 보였다. 그러면 혹시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을 수도 있었다.

강민이 얼른 장난스레 웃으며 끼어들었다.

“나이만 따지... 헉!”

에이리가 그 간섭을 용납지 않으며 옆구리에 쵸크를 먹였다.

강민의 육체는 강철과도 같지만, 에이리의 육체는 그런 강철같은 육체조차 파괴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강민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통에 끙끙댔다.

에이리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저어 답했다.

“아니요. 신경 쓰지 말고 하대하세요. 저하고 강민하고 비슷한 나이거든요.”

체중과 나이는 여자의 비밀!

굳이 밝혀 늙은이 취급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에이리는 쥐톨만큼도 없었다.

“그,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할게.”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끙끙대며 책상에 앉았다. 두 사람은 곧 교재를 펼쳐 책상 위에 늘어놓으며 공부할 준비를 했다.

옆에서 에이리가 그걸 보고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공부하는 거야?”

“그래. 앞으로 두 시간은 혜경 누나와 공부해야지. 잠시 외출이라도 하는게 어때? 많이 낮설건데 공부도 할 겸. 돈은 줬잖아.”

강민이 군자금으로 받은 50만원은 에이리에게 쓰라고 줬다.

어차피 그녀 때문에 받은 돈이고, 맨몸으로 온 에이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돈이니까.

물론 다른 곳도 별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에이리는 강민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그럼 그렇게 할게.”

“응. 혹시 길 잃거나 하면 연락하고.”

강민이 말하자 에이리가 찌푸린 얼굴을 했다.

“나를 뭘로 알고...”

“너 길찾기 못하잖아.”

낄낄 웃으며 강민이 말했다. 에이리는 흥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건 던젼 이야기지.”

에이리는 길찾기를 못했다.

정말 못 했다!

기사라서 일 수는 있는데 강민이 보기엔 그런게 아니고 선천적으로 뇌의 어딘가에 길찾기 회로가 빠져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절대 에이리는 혼자서 던젼 같은 곳에 보내면 안 되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언젠가 이걸 고치려고 단순한 던젼에 밀어넣고 자력탈출 하라고 훈련한 적이 있었는데 일주일만에 돌아왔다. 보통은 하루만에 나오는데. 그것도 길을 몾 찾아서 안에 있던걸 다 때려 부시면서 나왔다.

덕분에 에이리 탈출 이후 그 던젼은 폭싹 내려앉았다.

“도시는 처음 간 사람한테 던젼이야.”

강민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하긴 그렇다. 외지인이 커다란 도시에 처음 도착하게 되면 그곳은 던젼이나 다름없다. 특히 단순한 구조의 작은 마을 같은 데서 살던 사람이라면 한층 더 그렇기 마련이다.

무수한 신호와 인간의 무리!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길!

어쩌면 던젼이상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중소도시라 해도 이세계의 대도시 따위는 어린애 취급을 할 수 있는 복잡함을 자랑하기 마련이다!

“흥. 그 웃음을 오늘 깨뜨려 주지!”

“기대해 보지.”

강민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두고 보라는 눈빛을 번쩍 보낸 다음 에이리는 외출을 위해 복장을 챙겨 입고는 집을 나갔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혜경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얼른 물었다.

“누, 누구야?”

“인터넷으로 사귄 외국인 친구예요.”

강민은 쉽사리 답했다. 한번 정해두고 나닌 이런 것 답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말 진짜 잘하네?”

“한류에 관심이 있어서.”

헤경은 한 번 더 놀랐다. 아무리 한류에 관심이 있어 한국어를 공부했다지만 저건 현지인 수준이 아닌가. 하지만 혜경도 그런 자들을 본 적이 있다.

서울대에도 많았다!

특히 오덕이라고 흔히 불리는 이들은 금방 일본어 배워서 만화나 책을 보곤 했다. 그러니 놀랍긴 했어도 금세 수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디 출신이야?”

“우즈벡요.”

혜경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거기? 거기 진짜 미인이 많나보지?”

혜경은 인터넷에서 보았던 우즈벡에 대한 많은 풍문을 떠올렸다. 김태희가 밭갈고 한가인이 밤참 머리에 이고 온다던가 하는 낙원으로 설명된 꼴을 보고 남자들이란, 쯧쯧 이라 생각했는데 에이리가 거기 출신이라니 팍 자신감이 죽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에이리라는 여자는 정말 아름다워서, 여자로서의 자신감을 죽어버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강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기야 하겠어요? 쟤가 특별한 거지.”

“그렇겠지?”

강민의 말이 힘이 되었다.

강민은 혜경을 바라보며 우습다는 듯 물었다.

“부러워요?”

혜경은 얼굴을 붉혔다.

“뭐 부럽다고 해야 하나... 호호.”

“혜경 누나도 충분히 예뻐요 뭘.”

“그, 그래?”

갑작스레 칭찬을 들으니 가슴이 두근 뛰었다. 혜경은 양손으로 붉어지려는 볼을 잡았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강민은 고개를 끄덕엿다.

“그럼요.”

“호호, 넌 정말 말 잘한단 말이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말로 최고로 잘 말하는 것이긴 하죠.”

강민은 가볍게 너스레를 떨었다.

“호호호.”

혜경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약간 긴장되어 있던 것 같은 분위기가 부드럽게 녹았다. 혜경은 이어서 물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사귄 친구라면서 굉장히 친밀해 보이네?”

“인터넷으로 안지 좀 됐거든요. 저도 처음 봤을땐 깜짝 놀라긴 했는데 뭐 그래도 금방 친해지더라고요. 여러해 안 사이다 보니.”

“그렇구나...”

혜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강민이 한 답을 듣고 약간 기분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한편.

에이리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사람들이 우글우글했다. 사람들 너머로는 건물들이 우글우글했다.

에이리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사람들이 우글우글했다. 사람들 너머로는 자동차라는 신기한 기계가 우글우글했다. 자동차 넘어서는 또 사람과 건물이 우글우글했다.

우글우글우글우글 복잡한 곳이었다.

“음.”

우글우글 복잡한 만큼 일단 나오긴 했는데 뭘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버스라는 기계를 타고 좀 멀리까지 나와 번화하다 싶은데 대충 내린 것이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돈은 있으니...”

어디서나 돈은 중요하다.

돈이 없으면 행동에 커다란 불편이 따른다.

원래 세계에 있을 땐 가끔 지갑을 까먹는 일도 있긴 했다. 그럴 땐 검으로 어떻게든 몬스터도 때려잡고 그걸로 돈도 벌어 해결할 수 있지만 강민에게 듣기론 이 세계에선 그런 게 없이 전적으로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다행히 강민에게서 50만원이란 돈을 받아 왔다.

여기선 상당한 거금이라고 한다. 4인 가족 기준으로 200만원이 있으면 한 달을 살 수 있다고 하니 확실히 적은 금액은 아니다.

“부딪혀 보는 거로 할까.”

에이리는 그리 생각하며 걸었다.

사실 어디나 직접 충돌해서 깨닫는 것이 가장 빠르게 그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긴 하다. 그녀가 걷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모였다.

처음부터 그랬다.

에이리의 용모는 너무도 눈에 띄는 것이다.

단순히 특이한게 아니라 놀랍도록 아름다워 눈에 띄는 것이다. 남자들이라면 자석에 이끌리듯 시선이 따르고 여자들도 질투와 시기, 부러움으로 바라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미인에게 유혹이 없을 리가 없다. 에이리가 걷던 앞을 가로막으며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영어였다.

“한글로 말하세요.”

에이리는 웃으며 요구했다.

남자는 한글로 말했다.

“저기 혹시 시간 있으시면...”

“아, 유혹 하려는 건가요?”

남자는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노골적으로 말하자면야...”

“제안은 고맙지만 나는 이미 애인이 있어요.”

빙그레 웃으며 에이리는 가볍게 그 남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그렇습니까.”

“그럼.”

에이리는 계속 걸었고, 치안 남자는 에이리의 등을 아쉬운 듯 계속 바라봤다. 에이리는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시선을 받으며 걸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