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그날 밤.
재철 일당과 호성은 널찍한 공터에 와 있었다. 3학년과의 대결을 위해 온 것이다. 호성은 전투 영상을 기록해 협박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따라왔다.
지루한 표정으로 재철이 물었다.
“준비 다 됐냐?”
“그야 다 됐지.”
호성이 답했다.
그는 이미 공터 한구석에 삼각대를 세우고 거기 카메라를 올려둔 상태였다. 언제든지 최고 화질로 녹화할 수 있었다.
재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근데 이 새끼는 왜 이리 안 와.”
“선배에 나이 한 살 많다고 잘난 척 하려는 거겠지.”
수구가 옆에서 말했다. 만수도 아마 그럴 것이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재철은 기분 좋게 웃으며 곧 이어질 싸움을 상상했다.
“후후 그 면상 찌개지는 꼴을 오늘 보고 스트레스를 풀어야겠다.”
강민 덕에 조용하고 힘든 삶을 보내고 있다.
매일매일이 예전과 달리 그래도 성취감이 있어서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어른 말 따위는 콧등으로도 안 듣고 제 맘대로 살던 불량 학생들이었다.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런 싸움에서 승리해 강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그런 스트레스를 푸는데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그야말로 살아가는 낙!
“그래. 오늘이야 말로 진짜 아니겠어. 사실 이전에 싸웠던 놈들이야 그냥 너 혼자 옛날이라도 다 때려눕힐 수 있는 하수들이었으니까 말야.”
재철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수구와 만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특히 강해진 건 틀림없는데 아직까지 진짜 예전에는 상대할 수 없었던 적을 상대로 싸워 이긴 적은 없었다. 오늘이 바로 그 시작점이다. 뭐니 뭐니 해도 한 학년이 위니까!
이긴다면 그 쾌감은 지금까지의 열배는 될 것이다!
“그렇긴 하지.”
재철도 기대가 되는지 주먹을 꽉 쥐었다.
곧 공터 맞은 편에서 검은 그림자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검은 그림자는 주변에 재철이 그러하듯 동료 몇몇을 데리고 온 상태였다.
“아 저기 온다.”
재철이 앞으로 나섰다.
곧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상대 3학년은 재철도 아는 얼굴이었다. 이름은 수길. 옛날 한국을 침략한 일본놈이 생각나는 이름이었는데, 그 일본놈의 혼이라도 호나생이라도 되는지 아주 치사하게 애들을 괴롭히는 얍실한 놈으로 유명했다.
그래도 3학년에 한 반의 일진을 맡고 있는 만큼 센 건 틀림없었다.
수길이 재철을 보면서 화난 얼굴로 말했다.
“너냐? 시건방지게 주먹질 좀 한다고 위아래 못 알아보는 새끼가?”
“그렇수다.”
재철은 건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길이 이를 갈았다.
“이 새끼가 어디서... 니 애비애미한테도 그딴 말버릇이냐?”
“어이고 위아래 잘 알아봐서 약한 애들 삥이나 뜯으시니 좋겠다. 병신아.”
침을 뱉으며 재철이 이죽거리는 어투로 답했다. 멀리서 이 광경을 활영하면서 호철은 재철의 입담이 끝내준다고 감탄했다.
수길은 화가 나서 눈을 부라렸다.
“이게 어디서...!”
“입으로 일진 땄냐?”
재철은 상대 속을 긁었다.
“개새끼가...”
수길이 이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재철이 한 발 더 빨랐다. 그의 펀치가 수길의 복부에 꽂혔다. 퍽 소리가 나며 몸이 뒤로 밀렸다. 주춤주춤 꼬부라진 새우꼴로 허리를 숙이고 물러나건 수길은 결국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재철이 상대를 비웃으며 다가갔다.
“쪼다새끼가.”
“어어어... 너...”
쓰린 배를 부여잡으며 수길은 뭔가 말하려 했다.
“너 뭐?”
그러나 재철은 능숙한 일진답게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주저 없이 수길의 배에다 발길질을 넣었다.
퍽!
“컥!”
퍽!
“켁!”
퍽!
“커억!”
손도 발도 못 쓰고 수길은 얻어맞고 바닥을 벌레처럼 기어 다녔다. 옆에서 그 광경을 보던 수길의 친구들이 이대로 가다간 안 되겠다 싶었던지 욕설을 내뱉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철은 그들이 덤벼들면 더 좋다는 입장이었지만 수구와 만수가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그들도 쌓인게 많았다.
“끼어들어?!”
“끼어들면 죽는다!”
신이 나서 달려들었다. 하나가 아니고 단체로 돌아서 선배를 몰라보고 덤벼드는데 3학년들이 꼭지가 돌아버렸다.
“이것들이...!”
“어디 해 볼까!”
숫자는 3학년 쪽이 더 많았다. 딱 두배.
하지만 거리가 좁혀지고 싸움이 시작되자 싸움은 금세 일방적으로 되고 말았다. 수구와 만수가 가볍게 상대의 공격을 피하며 주먹을 휘두르는데 휘두를 때마다 3학년들이 속절없이 얻어맞는 것이다.
“켁!”
“아악!”
“억!”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일진들은 곧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공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수구와 만수는 비웃었다.
“한 주먹 거리들 주제에.”
“저녁 먹은거 소화도 못 시키겠다.”
얻어맞은 3학년들은 끙끙대며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들 아무 말도 못했다.
도무지 상대가 안 됐으니까!
멀리서 그 모습을 아쉽게 바라보던 재철이 수길의 머리를 잡고 그의 친구들이 쓰러진 쪽을 보도록 고개를 억지로 돌리면서 뺨을 탁탁 치며 말했다.
“봤냐. 니 친구, 부하 하는 새끼들 하고 니 수준이란게 이것 밖에 안되는 거야.”
“크으...”
재철은 이어서 분해하는 수길의 머리를 또 돌려 호성이 있는 쪽을 보게 했다.
“자, 저기 카메라 잘 보이지.”
호성이 잘 촬영하고 있다는 ok 신호를 보냈다.
“해봐. 멍멍.”
“이...”
수길은 머리를 잡힌 상태에서도 자존심은 있어서 이를 갈았다.
“해 봐!”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재철이 아니다. 그는 뺨을 짝짝 때리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때리는데 소리만 들어도 아플 지경이었다. 곧 수구는 양 볼이 퉁퉁 부었고 코피까지 흘리며 울었다.
재철은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머리를 잡아 호성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수길은 순순히 재철의 뜻에 따랐다.
“머, 멍... 멍...”
“어이구 잘했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을 잘 들었어야지 이 새끼야.”
재철은 머리채를 잡은 상태로 비웃어 주곤 머리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철의 발 아래에서 수길이 꿈틀댔다.
그걸 아래로 내려다보며 재철은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어미 보지 타고 일 년 먼저 나온게 그리 자랑스럽더냐? 씨발 그럼 니가 학교서 선생 말이나 잘 듣던가. 선생 말은 개같이 안 듣는게 이럴땐 어른 노릇이지. 니가 말 안 들으면 기존 뭐 질서에 반항하는 멋쟁이고, 남들이 니 말 안들으면 얻어맞아야 되는 멍청이냐?”
“어으...”
수길은 덜덜 떨뿐 아무 말도 못 했다.
재철은 답을 요구했다.
“내 말이 맞지?”
“마, 맞아...”
수길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재철이 원하는 답을 토해냈다. 일초라도 빨리 이 끔찍한 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데 재철이 그 대답을 더 불쾌한 얼굴이 됐다.
“말이 짧다?”
“마, 맞습니다.”
더듬거리며 곧장 수길은 굴종했다.
만수와 수구는 좀 떨어진 곳에서 재철이 수길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면서 몸서리를 쳤다. 강민에게 잡힌 이후로 본색이 드러날 일이 별로 없긴 했는데 역시 옛날 가락은 어디 안 간다고 진자 소름 돋을 정도로 사악했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재철은 수길을 향해 품에서 종이 조각 하나를 던지며 말했다.
“자, 이거 보고 똑바로 쭉 읽어.”
덜리는 손길로 종이를 주워 수길은 내용을 확인했다.
“이건...”
일그러졌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재철이 음산하게 물었다.
“못 일겠냐?”
“아, 아닙니다.”
“얼른.”
재철의 협박 앞에 굴복 외에 다른 수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뭉개진 얼굴로 호성이 촬영하는 카메라 앞에 더듬거리며 받은 종이를 읽었다.
“나, 나는 인생을 잘못 살아온 쓰레기입니다. 이제까지 똥 만드는 기계로만 살아왔을 뿐입니다. 누구든 저를 보면 ‘똥만기’라 보며 침을 뱉어 주세요. 웃으면서 받아들이겠습니다. 전부 사실이니까요. 왜 이런 말을 하냐 하면...”
수길의 표정이 파래졋다.
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그가 괴롭혔던 아이들의 상세한 피해 내역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삥을 얼마 뜯었니부터 때려서 병원 신세를 지게 한 내용까지 전부 다 나와 있었다.
대충 둘러서 무마하긴 했는데 제대로 밝혀진다면 인생 조지는건 순식간일 내용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했다.
긴 피해자 목록을 겨우 다 읽은 수길은 더듬거리며 다음을 읽어 나갔다.
“...정말 나쁜 놈이지 않습니까? 저는 저 하나 행복하자고 이렇게 많은 다른 아이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왜 이런 삶을 살아온 지 반성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재철이 넘긴 종이는 거기서 끝났다.
히죽 웃는 얼굴로 재철은 말했다.
“잘했다.”
“수고했어.”
호성이 카메라를 끄고 재철에게 다가왔다.
“이런거야 뭘.”
재철은 가볍게 답했고, 호성은 수길과 눈을 마주치며 웃으며 말했다.
“말해두지만 우리한테 반항하면 이 멋진 영상이 인터넷으로 흘러나가 평생 얼굴도 못 들게 될 거다.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심리적으로 완전히 억눌려 있는 수길은 반항할 생각을 못했다.
“그리고 쓸 때 없는 생각은 마라. 내가 맘만 먹으면 너 같은 새끼 인생 조지는 건 순식간이다. 내가 누군지는 알지?”
그리고 호성의 얼굴은 호성 자신이 말했듯 수길도 알았다. 호성이 수길을 아는건 아니지만 호성은 학교에서 굉장히 유명인이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부잣집이라 이 일대에서 먹고살려면 호성네 집과 연관이 없는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건 정말 수길같은 깡패에게는 호성에게 찍히면 안 될 이유다.
능력은 없는 그들 양아치가 학교를 졸업하고 그나마 직업을 구하는건 인력센터나 거지같은 인맥을 사용해서 짜장 셔틀이 되는 데 성공하는 정돈데, 호성한테 찍히면 그걸 할 수가 없게 된다. 이 지역을 떠나서 완전히 맨몸으로 시작해야 한다.
아무 인맥도 없는 곳에서 맨몸으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말만 쉽다.
사실 일진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양아치들은 노력과 성실이란 것과 담을 쌓았기 때문에 한층 더 그렇다.
“아, 알고 있습니다.”
겁먹은 표정으로 수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성은 고개를 까딱이며 명령했다.
“그럼 꺼져.”
“으, 으윽...”
일진은 허둥지둥 도망쳤고, 그의 친구들이 따라 붙으며 그들은 공터에서 멀어졌다. 싸움을 끝마친 재철 일당과 호성이 한 자리에 모여 하이파이브를 했다.
“후, 정리했군.”
“이제 겨우 한건이지.”
“그래도 금방일 거 아냐.”
“하긴 그렇지.”
모두 낄낄 기분좋게 웃었다.
학교를 완전히 장악하기까지는 며칠 남지도 않았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삼국지 같은 소설에 나오는 장군의 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