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하필이면 딱 이때 부모님이 돌아오신다니, 이게 왠 날벼락인가 싶었다.
덜컹.
문고리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얼른 에이리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지금 당장은 에이리를 부모님에게 소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내 방에 들어가 있어!”
“왜? 누가 오는 건데? 너희 부모님 아냐?”
에이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의 생각에는 굳이 숨길 거 없이 이 자리에서 인사를 드리는 게 더 좋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나는 여기서 고등학생이라고! 성인이 아냐!”
“그런데 뭐가 중요해서...”
역시 에이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게에서는 사실 그렇다. 성인이니 어린애니 하는 구분이 별로 없다. 남자도 급하면 열넷 다섯에도 결혼한다. 여자가 그 나이에 결혼하는건 너무 흔한 일이라 화젯거리도 아니다.
스물 넘으면 노처녀 취급받을 정도다.
그래서 에이리는 노처녀다!
본인 앞에서 말하면 얻어맞는다.
그리고 강민도 성인취급 받던 나이에 활동해서 유명해지지 않았던가.
“여기서는 중요해!”
덜컹!
문이 열렸다.
하지만 이때 아직 에이리는 강민의 방으로 들어가 숨어 있지 못한 차였다.
“엇?”
“어머나!”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오자마자 보인 광경에 놀라 소리쳤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고등학생 아들이 여자와 단 둘이서 이런 늦은 시각까지 함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못 믿을 것처럼 아름다운 여자였다.
TV에서 보는 연예인 용모라 추해 보이게 만들 정도로!
“아. 아버지, 어머니 이건...”
강민은 서둘러 나서서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에이리는 차라리 잘 됐다는 표정으로 성큼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강민의 부모님이시죠? 저는 에이리라고 합니다.”
“아, 그래요.”
“자, 잘 부탁해요.”
강민의 부모님 두 분은 당황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에이리의 인사를 받았다.
***
강민은 부모님 두 분과 큰방에 들어가 사정을 설명했다.
사실은 사정이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지만.
“인터넷 친구?”
“아, 그렇죠. 페이스북 아시죠?”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가 재빨리 만들어낸 핑계!
그것은 바로 에이리가 인터넷을 통해 사귄 외국 친구라는 것이었다.
“들어는 봤다만...”
“인터넷으로 뭐 한다는 거 아니니?”
뉴스에서 가물가물하게 들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강민의 어머니가 말했다.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인터넷으로 사람들끼리 글 올리고 댓글 받고 하는 거죠. 전 세계 어디서든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친구들끼리 글도 올리고 방문자도 받고 하는 거거든요. 거기서 알게 된 거예요.”
강민의 부모님은 그 말을 듣고 흥미롭다는 표정을 보였다.
“재밌겠구나.”
“세상 좋아졌군.”
“그렇죠. 덕분에 외국 사람도 이렇게 쉽게 친구가 되고 말이죠.”
강민은 부모님이 자신의 설명에 넘어가는 것 같자 거기 힘을 얻어 얼른 설명했다. 그런데 이어서 강민의 어머니가 물었다.
“한국어를 굉장히 잘 하더구나.”
“그래. 전혀 어색하지가 않아.”
강민의 아버지도 그 점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말했다.
사실 에이리의 한국어 실력은 마법을 통한 것이다.
과거 강민의 머릿속에서 한글에 대한 지식을 그의 친구가 마법으로 쏙 빼놓아 정리해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있는데, 그걸 부여받아 왔기 때문에 한국인이 아니면서도 저토록 수월하게 한국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강민은 이 점에 대한 변명도 빈틈없이 준비해 둔 상태였다.
“에이리가 한류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처음 제가 운영하는 페이스북에 댓글을 남긴 것도 한류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저도 저렇게 한글을 잘 할 줄은 몰랐어요.”
한류!
거품이니 뭐니 해도 과거에 비해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요즘 그 기세가 오른 것은 사실이다.
덕분에 이런 핑계로도 써먹고 있다.
“그래서 저 아이가 이번에 한국에 관광차 오게 돼서 여기서 묵게 해 주기로 했다는 거지?”
“그, 그렇죠.”
“이 녀석이 그럼 미리 말을 해야지!”
강민의 어머니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강민은 쩔쩔매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저도 오늘 도착하는 건 깜빡하고...”
“쯧쯧. 정신머리하곤.”
“죄송해요.”
강민의 아버지는 흥미로운 기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그래서 저 아이는 오늘 여기 묶게 한다는 거지?”
“사실 오늘만이 아니고 한 며칠 정도, 거처가 마련될 때 까지는 여기 묶게 해 줬으면 하고요.”
기대했던 것 보다 이야기가 잘 정리되었으니 좀 욕심을 부려보자는 생각에 강민이 조심스레 말했다. 사실 따로 살 곳을 구하려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건 사실이었다.
강민의 어머니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아니, 괜찮다.”
하지만 강민의 아버지는 도리어 긍정적이었다.
“여보.”
“뭐 어떻소. 친구도 사귀고, 또 멀리서 온 손님에게는 친절하게 대해야지. 어차피 우리 집은 거의 텅 비어 있잖소.”
“그렇긴 해도 애 공부도 해야 하는데...”
강민의 어머니가 걱정스레 말했다.
자식 공부!
그것은 한국 학부모에게 있어 지상 과제다.
그걸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면 자기 피든 남의 피든 상관없이 흘릴 수 있는 것이 한국의 학부모! 얼마든지 치사하고 추악하고 더러운 짓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학업의 최대 적은 자고로 이성이라 했다.
남자에겐 여자!
여자에겐 남자!
대학 들어갈 때 까지는 접근 금지의 저주받을 생물들!
“어허, 당신이 잔소리해서 어떻게 될 수준은 한참 전에 지났어! 그냥 우리는 지켜봐 주고 뒷바라지나 하면 되는 거지. 쓸데없이 잔소리는 해 봐야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강민의 아버지는 단호하게 어머니의 걱정을 차단했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요.”
평범한 집안이라면 당신이 뭘 알아서~ 란 말이 나와야 할 타이밍이지만 강민은 성적으로 아버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오고 있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었다.
역시 공부는 하고 볼 일이라 생각하며 강민은 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그래.”
“니 아빠가 저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지.”
강민의 어머니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감사합니다.”
“아니다. 그것보다 잠깐 와 봐라...”
강민의 아버지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강민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일로?”
“일단 나와봐.”
“왜 그러는 거에요?”
설명은 없이 나오라는 말만 하니 강민의 어머니도 의아해 물었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강민의 아버지는 간단히 말했다.
“이 녀석하고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무슨 말을 하시려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따라봐야 하겠다 싶어 강민은 움직였다. 두 사람은 곧 방에서 나가 부엌에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강민의 아버지는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거기서 노란 종이 여러장을 꺼내 강민에게 내밀었다.
“옛다 받아라.”
강민은 재빨리 노란 지폐의 숫자를 세었다.
열 장!
무려 오십만원이었다.
“아니 갑자기 용돈은 왜.”
강민은 감사히 받으면서 물었다. 강민의 아버지는 가타무타 하지 않고 아들과 어깨동무를 하더니 속삭였다.
“잘 해 봐라.”
“네?”
강민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너를 응원하고 있단다!”
“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아는 사이가 되다니, 이 기회를 놓치면 너는 정말 천치인 거다! 알겠냐?”
“아니...”
이제야 강민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강민에게 에이리를 꼬셔 보라고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갑자기 주어진 50만원은 간단히 말하면 군자금인 셈이었다.
“남자의 인생이 별 거냐! 에쁜 아가씨 꼬셔 마누라 삼고 애 낳아 행복하게 살면 장땡이지! 그런 의미에서 너는 지금 대학 입시보다도 중요한 인생의 고비에 들어와 있는 거야!”
“아...”
강민은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남자 고등학생에게 공부할 의욕을 불어넣는답시고 흔히 하는 말 중 하나가 공부 좀 더 열심히 하면 나중에 결혼 상대 얼굴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여자는 외모, 남자는 연봉이라는 합법적 매춘 거래가 결혼의 정체라는 걸 암시하는 말이긴 했지만 그에 상관없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잘 해 보거라!”
“네, 그, 그러겠습니다.”
강민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생각하다가 일단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하기도 싫고 뜻하지 않게 용돈도 생겨 나쁠 것도 없고 해서 고개를 끄덕여 답해 뒀다.
*
강민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에이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강민은 새삼 에이리가 눈부시다 생각했다.
어떻게 하고 있어도 화보가 되는 얼굴과 몸매랄까.
“뭐라셔?”
“뭐... 괜찮다고.”
“정말? 잘 됐네.”
에이리는 강민의 대답에 환하게 웃었다.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내심은 살짝 걱정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데 잘 결론이 났다는데 강민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한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아니, 그런 일이 있어서.”
“실없긴.”
강민이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자 에이리 역시 굳이 캐묻진 않았다. 강민은 에이리를 계속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이리 와봐.”
“왜?”
의아해 하면서도 에이리는 강민에게 갔다.
강민은 에이리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양 손으로 그녀를 꼭 껴안았다. 에이리의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특히 에이리는 가슴이 큰 편이기도 하고!
에리리는 갑자기 강민이 자시를 포옹하지 부끄러운 듯이 물었다.
“갑자기 왜 이래?”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그렇지.”
강민이 자신의 품에서 하는 말에 에이리는 피식 웃었다.
“외로웠던 모양이야?”
“사실은…. 그렇지. 진짜로 소중한 사람들은 부모님 빼면 전부 거기 있으니까.”
강민은 솔직하게 말했다.
부모님을 제외하면 전부, 정말 소중한 사람은 지구가 아니라 저 머나먼 세계에 있었다. 너무 바빠서 도망쳐 오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그립기도 했다.
오랜만에 그중 한 사람을 이렇게 직접 보자니 그 그리움이 해방되고 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이리는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괜히 달콤한 말로 구슬리려 해도 소용없어. 감시는 철저히 할 거니까.”
“어련하실까요.”
포옹을 풀면서 강민은 말했고 이제 손을 에이리의 얼굴로 가져가서 조용히 자기 쪽으로 끌었다. 에이리는 저항 없이 그 손길에 따랐다.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쳤다.
“으음.”
“음.”
긴 키스였다.
오십만원은 공으로 굳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