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물론 혜경은 레즈가 아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보고 답답한 듯이 둘은 물었다.
“그러면 마음에 둔 사람도 없어?”
“그래! 우리 학교에도 없어?”
“마음에 둔 사람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혜경의 마음속에는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사람의 모습에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혜경의 친구들은 그녀의 동요를 보고 이거다 싶어 공격을 계속했다.
“있구나!”
“누구야? 누구?”
“아, 아냐.”
고개를 흔들며 혜경은 대답을 회피했다.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으나, 그때 구세주가 도착했다. 알바생이 안주와 맥주를 들고 온 것이다.
“왔습니다.”
“고마워요.”
반갑게 그를 맞고 나서 혜경은 친구들에게 권했다.
“자, 술이나 마시자.”
“치이.”
친구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술이 도착하니 그쪽에 더 관심이 쏠렸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곧 세 사람은 잔에 맥주를 따라 건배를 하고는 함께 마셨다. 잔을 내리는 세 사람의 표정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놀라움에 물들어 있었다.
“와! 맛있다.”
“그렇지? 그래서 역시 굉장히 유명하대. 안 그러면 여기까지 너희 데리고 왔겠니.”
“그것도 그러네.”
모두들 웃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방학이 되고 오랜만에 다시 만나 이렇게 함께 즐기는 시간을 가지니 무척이나 유쾌했다.
그때 세 사람의 테이블 뒤쪽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너희!”
“유재길!”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고 세 사람은 모두 놀란 표정을 했다. 훤칠하게 키 큰 남자가 손을 들고 그들을 반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학부의 유재길이었다.
혜경의 친구가 물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야?”
“그야 술 마시러 왔지. 여기 맥주가 그렇게 맛있다고 해서. 그런데 잘됐다. 합석하자.”
“좋아!”
“으, 응.”
혜경은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좋아하는 기색이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유재길은 학부에서 여학생들에게 무척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반응하는 게 무리가 아니기도 했다.
곧 재길은 친구 둘을 데리고 와서는 합석했다.
유재길이 앉은 것은 혜경의 옆자리였다. 혜경은 몸을 살짝 움츠렸지만 재길은 친한 척 자연스런 태도로 혜경에게 말을 걸었다.
“학교에선 별로 얘기 못 나눴지?”
“응, 그러고 보니 그러네.”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은 재길을 멋지다고 좋아했지만 혜경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사실 좀 싫었다. 학기 초에 그가 친구들과 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재길은 막 사귄 친구들과 함께 ‘나이트에 홈런 치러 가자’고 했었다.
혜경은 당시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고 알게 되었다. 나이트에 가서 원 나이트 상대를 찾겠다는 말이었다.
그런 것도 개인이 사는 방식이긴 하겠지만, 적어도 혜경은 그런 걸 당연시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한데 이미지 관리를 잘 해서인지 재길에 대한 교내의 소문은 나빴던 적이 없었다.
“어때, 지낼만해?”
“응. 괜찮아.”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혜경은 답했다.
조금 무섭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친근하게 다가오는데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혼자도 아니고 친구도 있었으니까.
재길은 혜경의 움츠린 모습을 뜨겁게 위아래로 훑았다. 여름이어서 시원하게 입은 옷을 통해 혜경의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나고 있었다.
“자, 그럼 마시자. 마음껏 마셔. 오늘은 내가 다 산다.”
“정말?”
“정말이고말고.”
“와! 재길이 최고!”
“그래야지!”
재길의 친구들과 혜경의 친구들은 환호하면서 잔을 들었고, 부어라 마셔라를 했다. 그 과정에서 재길과 혜경의 친구들은 혜경에게 강요하다시피 맥주를 마시라고 했다.
“자, 쭉 마셔야지.”
“아, 아니 난…….”
가득 찬 잔을 한 번에 쭉 마시라는데 당황해 거절하려 했지만 친구들은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얘는. 이런 데서 그렇게 빼선 되겠니. 그리고 방학이잖아?”
“그래. 방학 때도 그래선 무슨 재미야?”
등을 떠미는데 어쩔 수가 없어서 결국 들이켰다. 맥주가 워낙 맛있기 때문에 한 번 마시기 시작하니 별문제 없이 쭉 들이켤 수 있었다.
“푸아…….”
“자자, 또 한 잔.”
혜경이 잔을 비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또다시 혜경의 친구가 가득 찬 맥주잔을 내밀며 말했다.
혜경은 벌써 취기가 오른 것 같아 자제하려 했지만 계속 권하는 것을 못 이기고 결국 마셨다.
그렇게 마시는 사이 혜경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혜경의 친구들이 물었다.
“취했어?”
“조금…… 그런 것 같아.”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마시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것 같아서 살짝 걱정이 됐다.
하지만 재길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말했다.
“술 마시는데 안 취하면 무슨 보람이야.”
“그것도 그렇지!”
다들 동의했고, 재길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사실 이 만남은 계획된 것이었다. 재길이 두 여학생에게 오늘 깜짝 미팅처럼 자기 친구를 소개시켜 줄 테니 혜경과 자리를 마련해 보지 않겠냐 했고, 혜경의 친구들은 그걸 받아들여 혜경에게 만나자 한 것이다.
그리고 재길은 혜경의 친구들을 통해 그녀가 갈 곳을 들어 이곳으로 찾아와 우연을 가장해 합석한 것이었다.
몇 잔의 맥주를 더 마시고, 혜경은 크게 취한 상태가 됐다.
그제야 혜경의 친구들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괜찮을까?”
“괜찮아. 내가 혜경이 데려다줄 테니까.”
재길이 말했다.
모두들 재길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걸 기회로 재길과 혜경이 가까워지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했다.
“재길이가 그렇게 말하면 안심이지.”
“아, 아니…….”
하지만 흐려진 정신 사이로도 그 말을 듣는 순간 혜경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제대로 가누어지지 않았다. 친구들이 등을 떠미는 걸 못 이겨 벌써 너무 많이 마시고 만 것 같았다.
“화장실에 좀…….”
“하기야 그렇게 마셨으니.”
“얼른 와!”
일단 시간을 벌어야겠다 생각하며 혜경은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 어렵게 도착한 혜경은 위기감을 느끼며 변기 위에 앉아 스마트폰에 어렵게 문자를 찍어 보냈다.
상대는 강민이었다.
-강민이니.
-혜경이 누나? 왜요?
-너희 집 가게에 와 있는데 술을 많이 먹어서 집에 못 가겠어.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나서 혜경은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란해했다.
하지만 돌아온 문자는 간결했다.
-알겠어요. 기다려요.
아무 설명 없이 와 주겠다는 문자였다.
혜경은 괜히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고마워.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혜경은 자리로 돌아와 술자리에 어울렸다.
몇 차례 맥주와 안주가 더 배달되어 왔고, 빈 잔과 빈 안주 접시가 알바생에 의해 옮겨졌다.
그리고 밤이 충분히 깊어졌다.
좋은 때가 되었다 생각하며 재길이 혜경에게 말했다.
“이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그래. 이제 더 마시면 곤란할 것 같아.”
혜경의 친구들도 동조했다. 하지만 혜경은 강민을 기다려야 했다.
“조금만 더…….”
“화장실 다녀오더니 애가 변했네.”
“그러게 말이야.”
“더는 내일 괴로울 거야. 자, 내가 데려다 줄 테니까 얼른 가자.”
재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혜경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다. 혜경은 힘을 줘서 그 손길을 거절하려 했다.
“아, 아니야…….”
“어허, 고집 부리지 말고.”
재길은 혜경의 몸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잔뜩 취한 데다 남자의 힘에 여성이 저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혜경은 쉽게 재길의 손에 이끌려 움직였다.
재길은 이제 그녀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게 말이지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앳되어 보이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당당한 분위기의 키 큰 소년이 서 있었다.
재길은 당황해 물었다.
“누구세요?”
“혜경 누나 동생이죠.”
“강민아…….”
혜경이 취한 얼굴을 들어 올리며 강민을 보고 방긋 웃었다.
“적당히 마시지. 완전히 파김치네요. 이래서야 원. 쯧쯧.”
혀를 차며 강민은 혜경에게 다가갔고, 재길의 손에서 혜경을 뺏듯이 자기 품에 이끌고는 양손으로 들었다.
“으쌰.”
마치 종잇조각을 들 듯이 가벼운 동작이었다.
암스 캐리, 혹은 프린세스 캐리라고 불리는 모습이었다. 업는 것도 아니고 양손으로 안기는 이의 무게 전체를 지탱해야 하니 상대가 여자라도 쉽지 않은 동작이었다.
그러나 공기를 드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혜경을 안은 강민은 재길을 비롯, 테이블의 구성원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곤 총총걸음으로 멀어졌다.
“다들 즐겁게 마시세요. 전 누나 데려다 드릴 테니까요.”
모두 멍한 표정으로 강민의 등을 쳐다봤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혜경의 친구들이었다.
“와! 쟤 저런 멋진 동생이 다 있었어?”
“남자 친구 없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저런 동생이 있으니 눈이 너무 높아진 거야!”
“그럴지도! 소개해 달라고 해 봐야지!”
“내가 먼저야!”
소란스럽게 깔깔대며 여자들은 대화했다.
다 잡은 먹이를 놓친 재길은 분한 눈길로 강민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
강민은 혜경은 안고 밖으로 나가선 택시를 잡아 올라탔다. 강민 본인도 탑승했다. 이런 상태로는 택시에 태우고서도 위험할 수 있었으니까.
운전사에게 갈 곳을 말하고 나서 혜경은 옆자리의 강민에게 말했다.
“고마워…….”
“술냄새하곤.”
강민이 투덜댔다.
하지만 기분 좋은 듯이 웃으면서 혜경은 말했다.
“헤헤……. 누나가 미안해…….”
그리고 강민에게 기대면서 말했다.
“강민이는 왜~ 이리 멋진지~ 몰라~~♡”
“술에 취했어도 다행히 시력은 무사한 모양이군요.”
강민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헤헤헤…….”
그러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무척 안심이 됐다.
***
길버트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변했다. 컴퓨터 화면에 이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특이한 현상이 관측되고 있었다.
먼 우주에서 온 것도 아니고, 갑자기 지구 어딘가에서 발생한 것 같은 기이한 전파의 측정 신호였다.
“이게 뭐야? 고장 났나?”
당황하며 길버트는 컴퓨터를 조작했다. 다른 계측 자료를 살펴서 지금 관측되고 있는 게 옳은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올 그린(All Green).
문제시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컴퓨터는 정상이었다. 관측되고 있는 것이 정상이 아니란 게 문제일 뿐이었다.
“미치겠네.”
그는 머리를 긁으며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그 설명할 수 없는 계측이 있은 이후로 아직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또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길버트는 짜증을 부리며 이곳 저곳에 연락을 하고, 컴퓨터를 조작했다.
그러는 사이 화면에 나타났던 그 기이한 관측은 사라졌고, 평소와 같은 화면이 돌아왔다.
정상적인 상황이 된 다음에야 길버트는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지금이야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왔다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도대체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
강민의 집은 아주 조용했다. 강민의 부모님은 가게에 나간 지 오래였고, 강민 본인 역시 혜경을 배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 있던 상태였으니 당연했다.
그런 강민의 집이 갑자기 기이한 기운에 휩싸였다.
그리고 강민의 방 가운데 갑자기 파스스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푸른빛의 원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것은 극지의 오로라의 일부를 잘라 그 빛을 백 배로 밝혀 놓은 듯한 것이었다.
그 빛이 온통 방을 휘감으며 계속 찬란하게 빛을 뿜었다.
거기서 불쑥 인영이 나타났다.
하지만 원의 빛이 너무도 강해 도리어 인영의 정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인영은 강민의 방 안으로 들어섰고, 완전히 몸 전체가 들어선 다음에는 방 안에 나타났던 푸른빛의 원이 천천히 그 빛과 크기를 줄여 갔다. 그리고 이내 곧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인영 하나뿐이었다.
빛이 사라진 방은 어두웠다.
방 안의 인영은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 인영은 이내 방의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 올렸다. 달칵 소리가 나고 방 안에 빛이 들어왔다. 빛의 원을 통해 이 방에 들어온 인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자였다.
믿을 수 없도록 아름다웠고, 나신이었다. 키는 어지간한 남자만큼이나 훤칠하게 컸고, 몸매는 완벽하다 싶을 정도였다. 성형을 통해 몸을 만들어도 저런 몸매는 나올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이는 스물을 조금 넘긴 정도로 보였다. 표정은 차가워 보였지만 그것이 도리어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한데 이토록 아름다운 용모에 몸매, 더구나 나신이었음에도 그녀에게서는 섹시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당당하고 위엄찬 느낌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방 안을 신기한 듯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가 마그누스의 고향인가.”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신비의 미녀.
그녀는 강민이 있던 곳에서 그와 깊은 인연이 있던 그랜드 마스터 에이리였다.
마그누스가 이름을 떨치기 이전 세계 최강을 논하면 흔히 거론되던 검후(劍后-Sword Queen). 그녀가 대현자와의 내기에서 승리하고 강민의 고향으로 건너온 것이다.
“후후.”
자신을 보면 강민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며 에이리는 기분 좋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