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뭐, 요즘 갑자기 좀 노래를 잘 부르게 된 것 같아. 나도 몰랐는데, 운동을 하고 나서 그런가?
-뭐야 그게. 차라리 어디서 비밀리에 강습을 받았다고 하는 게 믿어지겠다.
투덜거리는 어조로 수란이 답장을 보내왔다. 말끝에는 -_- 하는 무표정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강민도 자신의 답이 바보 같다고 느꼈지만, 거짓말도 아니라서 참 곤혹스러웠다. 쓸데도 없는 이벤트에 괜히 휘말렸다고 한탄하며 애원하듯 문자를 보냈다.
-하여간 나도 그건 진짜 괴로운 문제니 그 얘긴 그만두자.
-왜 뭔가 문제라도 있니?
깜짝 놀란 듯한 답장이 돌아왔다.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그것 때문에 얼굴이 팔린 것 때문에 걱정이 많단 말이야.
-얼굴이 팔렸어?
-너에 비할 수야 없지만 그걸로 떠드는 사람들이 좀 있는 모양이야. 잦아들 때까지는 조용히 지내려고.
-그래도 노래 잘 부르는 거 하고 그런 건 별로 상관없지 않아. 난 순수하게 네 노래에 감탄한 것뿐인데. 다른 사람들도 다들 감탄하는 모양이었어.
좋게 생각하라는 어조였다.
강민의 사정을 알고, 강민이 하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대체로 보이는 반응이기도 했다.
그러나 강민의 입장에선 전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당장 지금도 뭐라 자신의 노래를 설명해야 할지 몰라 골치를 썩고 있지 않은가.
-좋게 봐 준다는 데 뭐라 할까만 하여간 나는 그것 때문에 시끄럽게 되는 건 별로 바라지 않아. 평범한 고등학생에 만족한달까?
-정말?
-물론이지.
-그건 정말 아쉽다.
-아쉬워?
수란의 답은 놀랍다는 게 아니라 아쉽다는 것이 특이했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응. 사장님이 네 노래를 듣고 꼭 물어보라고 하셨거든. 가수로 데뷔해 볼 생각 없냐고.
-좋게 봐 준거야 고마운 일이지만, 됐어. 사장님한테도 그렇게 말해줘.
데뷔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강민단원들 사이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수란을 통해 RK 엔터테인먼트도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강민도 RK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예 기획사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결국 강민의 입장에선 기피 대상일 뿐이었다.
수란은 포기하지 않고 설득을 계속했다.
-저기, 그러지 말고 가수 하면 어때? 정말 아까워서 그래.
-높게 평가해 주는 건 고마워. 그렇지만 말했듯이 소란스러운 건 좋아하지 않거든.
-알았어. 하지만 정말 아깝다.
강민의 고집스런 태도에 더 설득하려는 것은 포기한 듯 수란이 답장을 보내왔다.
강민은 자신이 너무 딱딱하게 굴었나 생각하며 수란을 달래는 것처럼 문자를 보냈다.
-세상에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은 많잖아. 아까울 것까지야 있어?
-그것도 그렇지만 네가 데뷔하면 나랑 같은 회사 소속이 되잖아. 가까이 지낼 수 있을 텐데, 그게 아쉬워.
조심스러운 어조의 문자였다.
그걸 보면서 강민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오오, 가슴 뛰는 말을 하네.
수란 같은 미소녀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면 확실히 남자라면 누구나 가슴이 뛰고 말 것이다.
-언제든 생각 바뀌면 얘기해줘.
-응. 고마워.
문자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강민은 하품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강민이 누운 방에서 멀리 떨어진 저편 수란의 숙소에서는, 그녀 역시 자신의 침대에 누운 채 스마트폰의 화면을 보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
편의점 앞을 덩치 큰 남자가 서성거렸다.
무척 험상궂은 인상이다. 사람은 마흔을 넘어서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던 공자님 말씀에 따르자면 당장 감옥에 처박혀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냉장 보관되고 있는 식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을 잠시 살펴보다가 몇 개를 골랐다. 도시락과 바나나 우유를 비롯한 몇 가지였다.
물품을 모두 고른 그는 계산대 앞으로 가져갔다. 계산대에는 아주 예쁜 소녀가 있었다.
“이거.”
“네. 14,500원입니다.”
소녀는 익숙한 손길로 남자가 내민 물건들의 가격을 계산했다.
“음.”
남자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카드를 받고, 계산하고, 서명을 받는 철차를 지나 카드를 돌려준 다음 소녀는 이어 물었다.
“영수증 드릴까요?”
“됐어.”
남자는 무뚝뚝하게 답하고는 비닐봉지에 든 물품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그의 등을 향해 소녀는 친절하게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남자가 나가고 난 다음 소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들어온 손님에게서 무척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가끔 만나게 되는 진상들처럼 짜증 나게 굴거나 성희롱 비슷한 말을 하고 간 것도 아닌데 왜 방금 전 남자에게서 불쾌감을 느낀 것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소녀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치곤 일에 집중했다.
***
편의점을 나선 남자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길가에 주차된 차량으로 들어갔다. 검은 세단으로 꽤 비싼 기종이었다.
뒷좌석에서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잡지를 보던 남자가 그를 맞았다.
“어때?”
그는 한성질을 찾아 병원에도 갔었던 깡패, 각귀였다. 지금 들어온 험상궂은 덩치는 그의 심복인 영찬. 똥뱃살이란 별명을 가진 깡패였다.
“별거 없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모양이던데요.”
“그래?”
똥뱃살이 사온 것 중 마음에 드는 걸 골라 꺼내면서 답했다.
“네. 생긴 게 워낙 곱상하니까 인근에 소문이 좀 돌아서 쟤 얼굴 보는 거 노리고 오는 손님들도 좀 있다곤 합니다만. 헤헤, 그래도 평범한 알바생일 뿐이죠.”
편의점에서 직접 본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고 똥뱃살은 음흉하게 웃었다.
“그렇단 말이지.”
“네. 왜 저런 애를 이렇게 주의해서 노리시는지 저는 이유를 모르겠다 싶은데요. 집도 가난하고…….”
그들은 지금 일을 치르기 전 사전 조사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온 결과는 시시하기 짝이 없었고, 그래서 더 이상했다. 목표인 소녀가 무척이나 아름답단 걸 제외하면 대체 왜 ‘죽이라’는 말까지 위에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가난한 집의 딸일 뿐이었다.
부모님은 모두 죽었고, 할머니와 함께 허름한 월세 집에 살고 있는데, 구청에서 나오는 지원금으로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다.
“나도 몰라. 그냥 위에서 지시가 왔으니 하는 일이지.”
“그런데 정말 죽이다니 진짜 아까운데요. 날로 먹어도 비린내 하나 안 나겠건만…….”
쩝쩝 입맛을 다시며 똥뱃살이 말했다.
한성질에야 미칠 수 없지만 그도 여자를 좋아했고, 그 때문에 나쁜 짓도 많이 한 인간쓰레기였다.
부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각귀는 찌푸린 얼굴로 경고했다.
“쓸데없는 생각 마라.”
“아이고, 형님은 저런 영계 보고도 욕심도 안 납니까?”
똥뱃살은 아쉽게 물었다.
물론 각귀라고 욕심이 안 날 리가 없다. 원래 영계는 맛도 좋지만 보약 취급 받는 보물이다. 더구나 저렇게 예쁘기까지 하니 아랫도리 달린 것들이라면 눈에 핏발이 안 설 수가 없다. 인륜을 버린 쓰레기들 사이에서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랫도리 욕심보다 먼저 해야 될 게 뭔지 아는 거지.”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 그런데 언제 하실 겁니까?”
똥뱃살도 그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듯 아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슬슬 다 파악된 거지?”
“예. 한 일주일 쭉 살피면서 저 여자애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확실하게 알아뒀습니다. 알바를 두 개나 해서 그런가 규칙적이라서 언제 어디 있을 거란 걸 예측하기가 참 편하더라고요. 덕분에 우리도 편해졌죠.”
“편하긴. 그런 만큼 얼굴 안 보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저런 걸 심복이랍시고 데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생각하며 각귀는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사실 멍청해서 심복 삼은 면도 있긴 했다.
머리 나쁜 놈은 배신을 안 한다. 정확히는 못한다. 배신도 머리 좋은 놈이나 할 수 있는 능력이니까.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
“쟤가 언제 쉬지?”
“다른 알바생을 찔러 물어보니 이번 주 금요일이라고 합니다. 주말하고 겹치던데요.”
“딱 좋군.”
윗선의 의향은 방학이 끝나기 전에 정리하는 거라 했다. 그쪽이 사고사로 꾸미기 편하니 각귀로서도 그쪽이 좋았다. 그런 면에서 주말이면 확실히 적시였다.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지요.”
각귀의 대답에서 그의 의향을 읽고 똥뱃살이 말했다.
한데 그는 잠시 뒷말을 못 잇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무데뽀는 어쩝니까?”
당장 각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아직도 마련 안 됐어?”
“아시겠지만 이게 갑자기 변경된 거라서…….”
고개를 숙이며 똥뱃살이 변명했다.
“이 멍청한 새끼…….”
“죄송합니다.”
“니가 들어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각귀가 외쳤다.
똥뱃살은 사색이 됐다. 이번 일에서 자수해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 몇 년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 똥뱃살은 전과도 이미 있는 것이다.
“그건 좀 봐 주십시오! 이건 전과 없는 깨끗한 놈이 안 하면 평생 햇빛도 못 봅니다!”
“그걸 아는 놈이 아직도 손을 못 써? 이건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하는 거란 말이다!”
각귀는 화가 풀리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를 갈며 질책을 계속했다. 똥뱃살은 쩔쩔 맸다.
“좀체 안 구해져서 말입니다…….”
“조선족 새끼들 중에는 없어?”
한숨을 길게 쉬고 각귀는 물어봤다. 불체자가 늘어나면서 푼돈을 벌기 위해 기꺼이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질 나쁜 외국인 노동자가 늘었다. 싼 인력이 필요할 때 각귀와 같은 깡패들도 자주 애용한다.
덕분에 일반 공장은 물론 깡패의 세계에서도 말단은 임금 저하 현상이 심했다.
그러나 똥뱃살은 고개를 저었다.
“그 새끼들 꼬시긴 쉬운데 배신을 너무 쉽게 해서 안 됩니다. 필리핀이나 방글라데시 같은 동남아 놈들도 마찬가지고요.”
범죄는 의외로 신뢰가 중요하다. 더 정확히는 범죄니까 신뢰가 중요하다.
범죄를 저지르는 만큼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고, 보호도 못 받는다. 기댈 것은 같이 일을 저지르는 놈들뿐이다.
하지만 조선족이나 필리핀 불체자는 그런 면에서 아주 형편없는 인력이다.
“젠장…….”
이런 데서 일이 막힐 줄은 몰랐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각귀는 투덜거렸다. 그리고 차 안은 한동안 침묵에 휩싸였다.
갑자기 각귀가 그것을 깼다.
“아! 그래.”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반가운 얼굴로 똥뱃살이 물었다.
각귀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가자.”
“네. 알겠습니다.”
똥뱃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운전했다. 무거운 검은 세단은 잠시 부르릉 떨고는 도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사람으로 가득 찬 가게의 문을 열고 세 사람의 여자가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온 가게는 바로 좋은 친구였다. 여자들의 선두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혜경이었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계산대에 있는 강민의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 어서 와.”
“자리 마련해 놨으니까 2층에 올라가 봐요.”
강민의 아버지가 혜경이 온 것을 보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니야. 우리 애 봐 주고 있는데 그 정도야 해야지.”
손을 내저으며 강민의 아버지가 말하자 알바생이 와서 그녀들을 안내했다.
가게는 사람으로 가득했고, 또한 소란스러웠다. 진상들이 찾아와서 장사를 망치던 것이 중단되고 나서 빠른 시간 내에 회복된 것이다.
지금은 예전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장사가 잘 되고 있었고, 그나마도 계속 회복 중이라 머지않아 이전의 기세를 회복할 것 같았다.
세 사람은 2층으로 가서 빈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혜경과 같이 온 여대생 둘이 주변을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와! 여기 자리 잡기 힘들다던데 용케 잡았네?”
“역시 인맥?”
두 사람은 혜경의 학교 친구였다. 동기이고, 같은 과목을 몇 개 듣고 있었다. 특별히 친했던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이 가게 주인아저씨 아들 과외를 하고 있거든. 특별히 편의를 봐 주신 거지.”
“그렇구나.”
“벌이도 괜찮겠네?”
장사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친구들이 부러운 듯이 물었다.
“응. 좋아. 그렇지만…….”
“그렇지만?”
혜경은 벌이가 좋은 것보다 가르치는 학생이 뛰어나서 더 보람을 느낀다고 말하려다가 괜히 곤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그렇다고.”
“그런데 너는 남자 친구 안 만드니?”
화제가 그쪽으로 바뀌었다. 혜경이 제일 곤란해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혜경은 곤혹스런 표정을 하면서 말했다.
“아직은 별로…….”
“너도 참 별종이다. 벌써 이 학년인데 아직 그런 소리만 하고 있으니.”
“그래. 그러다가 대학 내도록 남자 친구 하나 없이 끝나는 수가 있어.”
두 사람이 합공을 하듯이 말했다.
“생긴 것도 예쁘고 성격도 좋은데 왜?”
혜경은 실제로 경영학부 최고 미인으로 이름이 높다. 어쩌면 학교 전체를 따져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거란 말도 있었다.
“그냥…….”
혜경은 움츠러들 듯이 그렇게 말했다. 남자 친구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약간 무섭기도 했고, 너무 공부만 하고 지내다 보니 적극적으로 나가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혜경을 보고 친구들은 혀를 찼다.
“쯧쯧! 그런 식이니 주변에 남자가 꼬여도 스스로 다 쳐내는 꼴이지.”
“혹시 사귀는 사람 있으면서 우리한테 알리기 싫어서 없는 척하는 거 아냐?”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저렇게 번듯하면서 아직까지 남자 친구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돼?”
친구들의 이야기에 혜경은 당황했다.
“얘들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안 그러면 이상하잖아.”
“그래. 너 레즈야?”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