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 무대에는 뷰티걸의 멤버 다섯 명이 있었다. 다섯 사람이 마네킹처럼 무대 중앙에 우뚝 서 있을 때 가장 큰 조명이 켜지며 그녀들에게 빛을 집중시켰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소녀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음악이 시작됐다.
음악의 시작과 동시에 멈춰 서 있던 소녀들이 화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안무와 동시에 노래를 시작했다.
-내 마음을 아니~
와아아아!
-그래, 넌 언제나 그렇지~
와아아아!
-하지만 포기해 나는 널 놓치지 않아.
와아아!
콘서트 장을 메운 팬들은 그 노래에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러 응답했고, 따라 부르는 이들도 많았다.
그 무대 객석의 일등석에는 강민과 혜경이 있었다. 살짝 찌푸린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며 헤경은 감탄한 듯 말했다.
“다들 굉장하구나.”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겠죠. 저도 처음이긴 한데, 누나도 별로 익숙하지 않은 것 같네요?”
“응. 이런 아이돌 스타는 별로 안 좋아했거든.”
강민의 물음에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헤에, 학생 때도요?”
“그땐 그야말로 공부에 바빠서.”
약간 창피한 듯 혜경은 말했다. 강민은 놀리며 웃었다.
“하하! 누난 왕따였구나.”
“그렇진 않아. 뭐 아싸긴 했지만!”
혜경은 불평했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끼리의 화제에 소원해서 대화를 나눈 일이 별로 없긴 하지만 절대 왕따는 아니라는 것이 혜경의 주장이었다.
강민은 이런 데서 강하게 주장하는 혜경이 귀엽다 생각하며 무대를 바라봤다.
소녀들이 아름답게 춤추며 노래했고, 그 가운데는 수란이 있었다.
“그런데 멋지지 않아요? 친구가 저렇게 멋지게 춤추고, 노래하고, 사람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니. 제가 다 뿌듯한 기분인데요.”
“하긴 그렇구나. 나도 어디 가서 많이 이뤘다고 자랑할 수 있는데, 저 애들이랑 비교하면 초라해지는 것 같을 정도니까.”
소녀들의 빛나는 모습을 보며 혜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이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렇진 않아요. 누나도 노력해서 이뤘잖아요. 그런 걸 가지고 누가 더 잘났다고 이야기하는 건 참 치사하고 더러운 짓이죠.”
“호호, 동생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이상한 기분인데.”
얼굴을 붉히면서 혜경이 말했다.
이런 때 항상 생각하게 되지만 역시 강민은 고등학생이라고 생각되지 않게 듬직했다. 믿고 기댈 수 있는 듬직한 기둥인 것처럼.
무대 위에서 공연은 계속됐다.
***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어.
어디 있을까?
노래를 부르고 안무를 계속 하면서 수란의 눈길은 무대 객석을 뒤지고 있었다.
찾고 있는 대상은 강민이었다.
문자를 보내 왔으니 틀림없이 있을 텐데, 눈이라도 마주치면 웃어 주고 싶었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나는 너를 가질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던 노래 가사가 지금은 괜히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아!’
수란의 눈동자가 커졌다. 강민을 발견한 것이다.
강민 쪽에서도 수란이 자신을 본 것을 아는 듯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눈으로 웃어 거기 답해주려 했지만 수란의 표정은 다음 순간 살짝 어두워졌다. 강민의 옆자리에 앉은 여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누굴까?
마음이 살짝 어두워졌다.
수란은 공연에 집중하기 위해 잡념을 떨쳤다.
-포기하지 않아.
환호성과 함께 노래는 홀
***
몇 곡을 부르고 휴식 시간이 되었다.
사회자가 얼른 자리에 올라와서 말했다.
-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때 뷰티걸을 위해 찾아주신 팬 여러분들을 위한 이벤트를 잊으면 곤란하겠죠.
와아아아아-!
객석의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사회자는 큰 목소리로 진행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주신 팬 여러분을 위해 정말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자는 뜸을 들였고 여기저기서 얼른 말하라는 성토가 이어졌다. 그들의 성화에 못 이긴 듯 사회자가 과장된 몸짓을 하며 외쳤다.
-뷰티걸의 멤버와 함께 부르는 뷰티걸!
요란한 팡파르 소리가 터지고 공연을 전달하던 거대한 화면을 화려한 글자가 메웠다. 방금 사회가가 외친 것과 같은 내용으로 ‘뷰티걸의 멤버와 함께 부르는 뷰티걸’이라고 쓰여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환호성이 한층 커졌다.
팬들의 환호성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회자는 말했다.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다. 객석에 앉아 계신 분 중 추첨을 통해 뷰티걸의 멤버 중 한 명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각 멤버당 한 분씩, 총 다섯 분에게 그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야말로 남자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하자마자 객석 여기저기서 열렬한 호응이 이어졌다.
“맞습니다!”
“만세!”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리! 나랑 노래 부르자!”
“가혜야! 오빠가 왔다!”
벌써부터 자기가 같이 노래를 부를 사람으로 선정이 되기라도 한 듯이 흥분한 남성 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멤버의 이름을 부르며 외쳤다.
열광의 도가니가 된 콘서트 장을 둘러보며 혜경이 말했다.
“다들 신났네.”
“좋아서 찾아왔을 테니까요.”
“너는 어때?”
혜경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강민은 고개를 저었다.
“노래 듣는 건 좋아하지만 하는 건 별로.”
“그렇구나. 실은 나도 그래서 노래방 가면 곤란하다니까.”
“그 심정 이해해요.”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
무대 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던 수란은 뭘 결심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매니저에게 가서 물었다.
“저기, 같이 노래 부를 사람 제가 지정하면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다만……. 누구 온 사람이 있어?”
궁금한 얼굴로 매니저가 물었다.
수란은 웃으면서 말했다.
“학급 친구가 한 명 와서요.”
“음……. 좋아. 팬들도 학급 친구가 찾아와 줘서 기회를 준 거라고 하면 이해해 주겠지. 미담도 될 테고.”
잠시 생각하던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부탁이 아닌가 싶었는데…… 감사해요.”
“하하! 아니다. 어차피 너는 학교 성적이 좋은 걸로 이미지 마케팅도 잘 먹히고 있으니까 이런 걸로 학교생활을 강조하는 이벤트도 나쁘지 않지. 회사로서도 좋은 일이야.”
매니저는 웃으며 말했다. 유리의 인기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물론 미인이라는 것이지만, 또한 뛰어난 성적을 자랑하는 학생이란 면도 작지 않았다.
서울대 연예인처럼 학벌 사회인 한국에서 성적이 좋은 연예인이란 좋은 어필거리가 된다.
매니저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한 차례 더 해야 할걸? 안 그러면 시끄러울 테니까.”
“그건 뭐 문제없어요!”
수란은 힘차게 답했다. 두 차례 노래하는 정도는 문제없었다.
“그래. 좋아. 많이 친한 학생이 온 모양이구나.”
“그런 것보다 이전에 크게 신세를 진 적이 있거든요.”
“알겠다. 차례 되면 부를 테니 기다리고 있으렴.”
“네!”
환하게 웃고 수란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무대 앞에서는 환호성이 이어졌고 곧 이벤트가 시작됐다. 멤버들이 차례로 하나씩 나갔고, 나간 멤버가 불려 나온 팬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부르는 노래는 뷰티걸의 대표곡들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어쩌면 본 공연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곧 수란의 차례가 됐다. 무대 진행자가 와서는 그녀를 손짓으로 불렀다.
“유리 양, 차례 됐습니다.”
“네!”
긴장된 안색으로 수란은 무대에 나갔다.
나가자마자 사회자가 그녀를 맞이해 뷰티걸의 떠오르는 샛별, 유리 양입니다! 하고 소개했다. 폭풍 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다른 멤버들도 그랬지만.
그리고 많은 남자 팬들이 유리의 이름을 연호했다.
매니저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은 사회자가 모르는 척 물었다.
-자, 그러면 유리 양, 그런데 오늘은 꼭 이 자리에 불러들이고 싶은 학급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면서요?
-네. 실은 작년에 그 친구한테서 큰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단 인사도 하고 싶고요.
부끄러운 얼굴로 수란이 말했다.
-남자인가요?
-네. 남학생이에요.
수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남자들이 울부짖었다.
“우우우우!”
싫은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부러운 모양이었다.
사회자가 웃었다.
-하하! 팬 여러분들의 아우성이 들리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은 유리 양의 마음을 방해할 수는 없지요. 그러면 불러주시겠습니까?
-네!
수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객석을 바라봤다. 그리고 일등석 쪽에 앉은 강민을 정면으로 봤다.
강민은 그녀의 눈길이 자신을 향하자 마음속으로 ‘설마.’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 설마가 맞았다.
-저…… 강민, 나와 보지 않을래?
“어, 나?”
강민은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것은 옆에 있던 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강민이 저런 자리에 불리리라곤 서로 생각하지 못했다.
무대 스태프가 손짓으로 강민을 불렀다. 강민은 머쓱해하면서도 무대로 올라갔다.
사회자가 강민이 올라온 것을 보고 말했다.
-아, 행운의 사나이가 바로 저 청년이었군요. 아주 훤칠하고 미남입니다.
그리고 화면에 강민의 모습이 잡혀 크게 떴다.
남자들은 부러워하며 우우, 거렸지만 여자들 중에는 감탄한 이들이 많은 듯 놀라워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본래 얼굴이 잘생긴 편인데다 요즘 키가 많이 커져 훤칠해진 강민은 비주얼이 무척 뛰어났다.
그런 뛰어난 비주얼을 한층 강조하는 것은 강민의 분위기였다. 뭘 하더라도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듯한 그런 분위기가 강민에게선 느껴졌다.
-칭찬 감사합니다.
강민은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건네받고 쑥스럽게 인사했다.
-학교에서 유리 양과 친하다고?
-하하! 그냥 작은 인연이 있었던 정도죠.
-어떤 것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회자가 심술궂게 묻는데 수란이 약간 난처한 표정이 됐다. 깡패에게 습격당했던 걸 도움을 받아 무사히 탈출했던 건데, 사실 아이돌의 입장에서 공론화되어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수란의 표정을 보고 강민은 얼른 둘러서 말했다.
-그냥 길에서 다친 걸 도와준 정도입니다.
-아, 그런 인연이 있었군요!
-그렇죠.
강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수란을 향해 윙크를 했다.
수란은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 두 사람이 같이 불러 볼까요. 어떤 곡이 좋겠습니까?
-그야 물론 ‘거기 있어 봐!’ 죠.
강민은 즉각 말했다. 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유리 양의 친구시군요. 유리 양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히트곡이었죠.
-하하! 그 정도도 파악하지 않으면 티켓을 받았겠습니까.
수란이 TV에 나오는 걸 주의 깊게 보기 시작한 이후 관련된 정보를 틈틈이 접하며 알게 된 이야기였다. 노래 자체도 강민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간혹 듣곤 했다.
그리고 다행히 다 외우고 있는 곡이기도 했다.
-그럼 시작하죠.
두 사람은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반주가 시작됐다.
-거기 멈춰 봐. 나를 봐. 나를 돌아봐.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잡고 싶은 소녀의 마음을 경쾌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강민은 유리를 따라 배에 힘을 주고 노래를 불렀다.
듣고 있던 이들이 모두 놀란 표정이 됐다.
“와아…….”
“장난 아닌데.”
“저 사람 어디 연습생 같은 거 아냐?”
“목소리 끝내준다.”
“내 몸이 다 같이 떨리는 것 같아.”
객석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나왔다.
강민의 목소리는 감미로우면서도 힘이 넘쳐서 듣는 이의 마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고음과 저음을 자유롭게 소화해냈고, 호소력이 아주 짙었다. 여기저기서 뷰티걸 본인들보다 잘 부르는 게 아니냐는 감탄의 소리가 나왔다.
‘굉장하다.’
강민의 옆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수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민의 지금 목소리는 굉장했다. 아주 오랫동안 철저히 연습했던 사람인 것 같았다.
수란의 보컬 트레이닝을 도와주는 선생님도 강민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오래된 선배 가수들의 열정 어린 무대에서나 저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기계의 도움이 아니면 강민의 지금 목소리에 미치지 못할 것 같아서, 수란은 조마조마함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리고 노래가 끝났다.
노래가 끝난 뒤, 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와아아아!
짧은 침묵 뒤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쳤다. 휘파람과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들의 반응을 보고 강민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됐다. 이런 반응은 생각하지 못했다. 서둘러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인사했다.
-아, 감사합니다.
-아, 잠시 좀 있어 봐요.
사회자가 막으려 했다. 강민에게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강민은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고는 마이크를 넘기고 얼른 무대를 벗어났다.
-아니요. 아닙니다.
하지만 무작정 도망치듯 빠져나가면 수란에게 실례일 것 같아서 가는 길에 수란에게 인사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다음에 보자.
-응.
조금 멍한 표정으로 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객석으로 돌아오자 혜경이 정말 놀랐다는 표정으로 강민을 맞았다.
“너 노래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해놓고선…….”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니 실수한 거 같아요. 가요.”
하지만 강민은 지금 그걸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혜경의 팔을 잡고 사람들 틈을 헤치고 콘서트 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가 움직이는 길에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거기, 이름이 뭐예요?”
“한 곡 더 불러봐!”
“연습생이지?”
“짜고 치는 거 아냐?”
“그래도 잘 부르더라!”
그들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리며 강민은 얼른 빠져나가는 데만 집중했다. 사람들이 많아서 길을 확보하기 어렵긴 했지만 어떻게 나갈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