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혜경을 배웅하고 강민은 우선 부모님의 가게로 갔다.
진상들이 아직도 나타난다면 파악했다가 나중에 다리라도 부러뜨려 못 오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가게에 가보니 다행스럽게도 이제 진상들은 보이지 않았다.
돈을 모조리 빼 들고 와서 운영 자금을 고갈시켜 버리고, 주요 조직원들을 병원 신세로 만들어 둔 전략이 완전히 먹힌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 정도로 본부가 박살 나면 역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굴러야 하는 게 조폭이란 쓰레기들의 특징인데 몸까지 완전히 조져뒀으니까. 병원비나 제대로 낼 수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가게는 진상들의 방해 때문에 예전에 비하면 많이 한산했지만 워낙 맥주 맛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에 서서히 다시 손님들이 돌아오고 있는 추세였다. 이대로라면 금방 원래 호황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상황이 모두 자신이 안배한 대로 안전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확인한 강민은 만족하고는 집으로 돌아갔고, 지금은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한데 잠시 몸을 쉬고 있던 그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그리고 책 사이를 뒤졌다.
곧 강민의 손에 걸려 한 장의 서류 봉투가 빠져나왔다.
강민은 그것을 들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어 안의 내용물을 쑥 꺼냈다.
사진 한 장과 신상명세서 같은 것 하나였다.
“이건 뭐지?”
중얼거리며 강민은 우선 사진을 들어 올려 바라봤다.
“예쁜 여자앤데…….”
긴 머리의 청초한 인상의 여학생이 찍힌 사진이었다. 교복도 예뻤고, 그 교복보다 여러 배 더 예쁜 여자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찍혀 있었다. 얼굴이 티 없이 깨끗해 한층 어여쁘다는 인상을 줬다.
“흠…….”
지구로 돌아와서 만난 여자들의 용모를 떠올려 봤다.
지금도 아이돌로 각종 행사에서 활약하고 tv와 인터넷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수란.
오늘 만난 지적인 여대생 혜경.
모두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이 사진에 찍힌 여자애도 뛰어난 용모와 개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두 여인에 비해 부족함이 없거나 도리어 더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강민은 다른 종이를 쥐어 눈앞에 펼쳐 보였다. 그것은 사진에 찍힌 소녀의 신세명세서가 맞았다.
“이지연. 화민고등학교 1학년 3반이라.”
학교와 반 이외에도 주소나 체형에 대한 것도 나와 있었다. 가슴은 약간 작은 편이지만 몸매가 좋고, 165를 넘는 키는 여자치고는 큰 편이었다.
만일 이게 전부였다면 강민은 단지 예쁜 애가 있구나, 하는 정도에서 생각을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깡패 놈들의 금고에서 소녀에 대한 정보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지.’
강민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그들은 이 소녀를 주목하고 있는 것일까.
무얼 할 생각인 걸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건 한 가지였다.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점.
깡패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일일 리가 없다.
어쩌면 이 아이를 해코지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몰랐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이렇게 알게 된 이상 완전히 무심하게 있기에도 찜찜한 일이었다.
무력한 일반 시민이었다면 힘이 없는 걸 핑계로 모른 척하고 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강민은 강했고, 또한 오래도록 어려운 사람들을 구하며 지내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상이 미인이란 말이야.’
강민은 키득 웃었다.
자고로 미인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건 용사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인연으로 이런저런 관계로 발전되어 그녀의 사랑을 얻는다는 전개도 기대해 볼 수 있고 말이다.
‘후후.’
별로 기대는 하지 않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띠리리.
벨 소리가 울렸다. 화면에는 강석에게서 온 전화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강민은 전화를 받았다.
“아, 강석이? 왜?”
-저기,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강석이 말했다.
“뭔데 이야기해 봐.”
강민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기 위해 유쾌하게 물었다.
강석은 그래도 쉽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느낌으로 조심스러워하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재철 일당들을 가르칠 거야?
“응. 근데 그게 왜?”
-하지만 걔들은 나쁜 놈이라고! 호성이랑 걔네들이 널 대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어. 오늘 본 것도 있고. 넌 정말 세잖아. 걔들이 너한테 배워서 더 세지면 또 아이들을 괴롭힐 거야. 다시 생각해줘!
강민이 가르칠 거라 하는 순간 발작하듯이 강석이 외쳤다.
그 외침을 듣는 순간 강민은 강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일진이 다시 강해져서 피해자를 만드는 것이 그는 싫고, 또한 일진으로 아이들을 괴롭히며 희희낙락해 왔던 놈들이 강민 덕에 앞으로도 거들먹거리며 지내게 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 심정을, 강민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한때 왕따였다.
그 당시에 강민이 가장 즐겼던 환상은 자기 자신이 슈퍼맨처럼 강해져서 일진들을 때려눕히는 것과, 지금은 이렇게 지내지만 결국 학교를 나가면 일진들은 사회의 쓰레기로서 굶주리고 경멸받다가 인간쓰레기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민이 지금 재철 일당에게 하는 것처럼 하면 그런 기대는 모두 부서지고 만다.
재철 일당은 성실하게 공부하게 되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 몫을 하게 될 것이고, 또 싸움도 잘해 계속 일진 노릇하며 아이들을 괴롭히게 될 수 있었다.
왕따였던 강석이 그런 걸 도저히 눈 뜨고 못 봐주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걱정 하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걱정 마.”
강민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비가 된 거야?
강민의 대답에서 약간 안도한 듯 강석이 물었다.
“그야 물론이지. 그 정도 대비도 없이 하려고. 내가 걔들 가르치는 건 어디까지나 내 수족으로 쓰기 위해서야. 나한테 배운 힘으로 나쁜 짓 하고 다니게 내가 놔둘 것 같아?”
-그건…… 아냐.
강석의 대답을 들으며 강민은 말을 이어갔다.
“서울대도 그래. 내가 왜 그 녀석들을 서울대로 보내고 싶어 하는데. 계속 내 곁에 두고 반성하게 하고 괴롭히기도 하고, 부려먹기도 하려는 거야. 아직 벌을 덜 받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놈들이 나한테 얼마나 맞았는지 모르지? 지들이 애들 괴롭히면서 즐겼던 거 열 배는 될 거야. 그리고 벌써 여러 달째 주말이면 봉사 활동 하고 있고.”
-아…….
그런 건 모르고 있었다.
그냥 강민이 한두 번 재철이 일당을 두들겨 패고 부하로 부리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서울대에 걔들을 보내려는 것도 결국 부하로 부려먹기 위해서라니, 쌤통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강민에게서 멀어질 수 없다면 아무리 힘이 세어져도 결국 그걸로 나쁜 짓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강민의 설명을 듣고 나니 강석은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재철이하고 호성이하고 꼭 나쁘게만 보지 마. 그야 나쁜 짓 많이 했지만 그만한 대가는 다들 치르게 했어. 그러고 나서 공부도 시키고, 무술도 가르치고 하는 거니까. 그리고 지금 하려는 일이 뭔진 알잖아?”
-응…….
강석은 전화 저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이 지금 재철이 일당을 부려서 하려는 것은 동성고등학교의 왕따를 모조리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다.
“나중에 이 녀석들 데리고 괴롭힘 당했던 녀석들 찾아다니며 일일이 사과시킬 거야. 그때쯤 되면 이 녀석들도 진짜 진심으로 반성할 거야. 그래도 너는 내가 무술을 가르쳐 주는 걸 용납 못하겠어?”
-아냐. 그건 아냐…….
강석은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강민이 말한 대로라면, 괴롭힘 당했던 당시의 기억이 분하긴 하지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강민이 말한 대로 실천이 된다의 이야기지만, 강민이라면 틀림없이 전부 말한 대로 만들고 말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강민이 친근하게 말했다.
“그래. 날 믿어줘.”
-응. 믿어.
강석은 처음 전화했을 때와는 달리 훨씬 안정된 기색으로 말했다.
두 사람은 통화를 끝냈다.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강민은 다시 옆에 던져뒀던 종이를 들어 올려 바라봤다. 조폭의 건물에서 발견한 그 서류다. 거기에는 이지연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흐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 소녀가 위험할지 모르니 그에 대한 대비도 일찌감치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
일인 병실이었다.
그 병실의 침상에 누워 있는 중년의 남자는 사지에 깁스를 하고 화난 듯이 굳은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질이 아주 더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그는 실제로도 성질이 더럽기 짝이 없는 깡패였다.
한성질이란 이름의 지렛대파 보스니 어련할까.
그는 살아오면서 많은 이들의 인생을 파괴한, 진짜 악당이었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병실에 들어섰다.
한성질에 지지 않는 험상궂은 모습의 남자였다. 키가 크고, 몸은 날씬했다. 양복을 입었는데, 양복이 갑옷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성질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안부를 물었다.
“어떠십니까?”
“보면 모르겠냐, 각귀.”
남자를 알아보고 한성질은 초췌한 안색으로 답했다.
각귀는 한성질과는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깡패로, 한성질이 그러하듯 자기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한성질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구성원들은 좀 더 독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조직 이름은 각귀파.
각귀나 조직원들이 지은 건 아니고 경찰에서 편의상 지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각귀는 한성질의 위아래를 살피고 말했다.
“좋아 보이시진 않는군요.”
“그렇지.”
한성질은 한숨을 쉬었다.
경멸하는 눈빛으로 한성질을 바라보며 각귀는 말했다.
“전국이 다 난립니다.”
“크으…….”
한성질은 이를 악물었다.
전국이 다 난리라니. 난리가 날 만한 일이긴 했지만 깡패 체면에 그런 꼴이 전국에 방송됐다면 끝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찰들이 병원에도 쫙 갈렸더군요.”
“됐어. 그런 얘긴 마라. 그렇지 않아도 엉망이야. 골치 아픈 소리 듣기 싫다. 그보다 여긴 왜 왔어?”
한성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각귀는 뻔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실 거 아닙니까?”
“으으으…….”
홍동구에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홍동구의 귀에 지금 한성질이 어떤 형편일지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일을 맡길 수 없다 판단한 것이리라.
“그리고 목표물 얼굴하고 신상명세서 들어간 서류도 뺏겼다면서요?”
“그건…….”
한성질은 변명할 수 없었다.
“그 서류에 사진하고 신상명세서만 있었을 뿐이니 홍동구 형님도 별로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그거 있다고 해서 이번 일에 무슨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고요. 하지만 못 믿을 놈이란 말을 하시더군요.”
홍동구가 했다는 말에 한성질을 이를 악물었다. 못 믿을 놈이란 평가는 아마 그를 평생 따라붙을 것이다.
“할 수 있습니까? 이제 슬슬 시작해야 할 텐데요.”
“그래. 그렇긴 하다만…….”
한성질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저희가 맡을까요? 홍동구 형님은 벌써 저희한테 연락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도 법도와 의리가 있으니까 무작정 받을 수는 없어서 이렇게 찾아뵙는 거죠.”
“그렇게 해라.”
한성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야 그리했지만, 각귀가 찾아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사실 양해를 구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통보하러 온 것이다. 한성질은 그걸 알았다.
“알겠습니다.”
각귀는 원하는 대답을 들었음에 만족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성질이 그때 애타는 눈빛으로 각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하자.”
“뭡니까?”
“결행 날 나도 가자.”
“형님도요?”
“그래.”
애걸하는 것처럼 한성질은 말했다.
그는 알고 있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매장 당한다는 것을.
홍동구에게서 못 믿을 놈이란 평가를 얻었고, 사지가 박살 나 싸움꾼으로서도 이전만 못할 것이다. 이래서는 그냥 골목의 쓰레기가 되는 게 전부다.
그런 꼴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공을 세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비굴하게 빌붙어서라도 각귀와 함께 움직여야 했다.
각귀는 한심하단 눈으로 한성질의 깁스한 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꼴로 어떻게 하시겠단 겁니까?”
“뭐, 뭐든 하마! 어떤 일을 시켜도! 그러니 부탁한다!”
한성질은 애걸복걸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각귀는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병신하고 일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각귀는 그 말만을 남기고 한성질의 병실을 빠져나갔다.
얼빠진 얼굴로 혼자 남은 한성질은 이내 제 성질에 못 이겨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이노오오오옴!”
와장창!
병실 내부의 물건이 박살 나는 소리가 곧 이어졌다.
*
강민은 기지로 갔다.
시간에 맞춰 가니 강민단원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강민단원들은 강민을 맞았다.
그들에게 손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가 단원들의 얼굴을 살폈다.
주로 재철 일당의 얼굴을.
생각했던 대로 얼굴에 상처가 좀 있었다.
재철은 왼쪽 볼이 좀 부은 것 같았다.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어제 싸움을 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제가 바로 다른 일진과 담판을 짓는 날이었다. 틀림없이 그 싸움의 흔적이다.
“어젠 어땠어?”
“그야 이겼지.”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재철은 말했다.
옆에서 만수와 수구가 옆에서 어제 재철이 상대를 어떻게 때려눕혔는지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고 한다.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만나서 다른 반 일진이 왜 불렀냐고 묻는 말에 재철이 방학 개학하면 이제 애들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경고를 했다.
물론 그 일진이 그걸 좋게 볼 리 없었고 시비가 붙었다.
시비가 붙으면?
그야 싸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