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으, 응. 뭔가 한 거야?”
호성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인체에는 통로가 있다고. 신비한 힘이 흐르는 통로 같은 거.”
“차크라? 혈도?”
“비슷하려나. 그걸 자극해서 집중력과 암기력 같은 걸 한동안 올라갈 수 있도록 한 거지. 총명침 비스무리한 거야. 많이 나아질걸.”
강민이 사용하는 마법에 비하면 훨씬 효과가 떨어지고 효력이 지속되는 기간도 짧지만 마법에 기댈 필요가 없다는 점이 편리했다. 다만 자기 몸에다 할 수는 없는 비술이라 강민 자신에게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도 있구나…….”
“그걸로 장사해도 떼돈 벌겠다.”
강석과 호성도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강민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코웃음을 쳤다.
“내가 큰돈 벌고 싶으면 격투기 선수만 해도 수백억은 그냥 굴러 들어온다. 돈이 목적이면 니들 데리고 이러고 있겠냐.”
“하기야…….”
강석은 지금 강민이 한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사정을 아는 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은 인간 흉기, 아니 인간 군대나 마찬가지다.
현재 전설로 기록되고 있는 대단한 운동선수나 싸움꾼을 다 데리고 강민 앞에 데려다 놔도 과연 한 대나 버틸 사람이 있을까 싶다.
호기심에 호성은 물어봤다.
“그런데 그런 거 어디서 배운 거야?”
“후후, 그거야 비밀이지. 그리고 어디 가서 떠들면 난리 나니까 입 다물어라. 특히 너희.”
그러면서 이제 부들거림을 멈추고 몸을 일으킨 재철 일당에게 강민이 매서운 눈빛을 날렸다.
“무, 물론이야!”
“감히 우리가 어떻게……. 헤헤.”
“그래, 그렇고말고. 우린 너의 충실한 수족인걸.”
모두 비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하긴 어디 가서 떠들어 봐야 누가 믿어주기나 하겠냐만. 미친놈 취급이나 받지.”
그것도 그래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강민은 물었다.
“아, 그런데 2학년 통합은?”
“내일부터 시작할 거야.”
호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민이 일일이 손쓰지 않아도 호성이 그런 일은 모두 알아서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3학년을 대비한 수련은 모레부터 해야겠군.”
“응. 그래야겠지.”
호성도 동의했다. 2학년을 통합하는 데엔 일주일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호성의 판단이었다.
강민이 호성에게 물었다.
“여기 옥상 쓸 수 있어?”
“응. 얘기해 두면 괜찮을 거야.”
건물 옥상에는 간단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좋아. 그럼 거기서 한다. 멀리 갈 필요까지도 없으니.”
“그럼 내일은 노는 거야?”
재철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수구와 만수 역시 환한 얼굴이 됐다.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 따위 한다고 끙끙대느니 몸을 움직이는 게 훨씬 좋았다.
더구나 강민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그의 1%만큼이라도 강해진다면 세계 어딜 가서도 싸움을 못해 굴욕을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일진으로서 그 이상 가는 보물은 없는 셈이다.
하지만 강민은 피식 웃었다.
“무슨 개소릴. 공부가 차라리 낫다는 소리가 나도록 굴려 줄 거다.”
“으으으…….”
“으음.”
재철 일당의 얼굴이 금세 공포에 질려 버렸다.
강민에게서 배우는 것이니 강민의 강함을 생각하면 무척 기쁜 일이긴 한데, 강민에게 오래도록 얻어맞아 온 역사를 생각할 때 공부가 낫다는 소리가 나오도록 굴릴 거란 말도 결코 거짓이 아닐 테니,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민이 재철 일당의 표정 변화를 낄낄대며 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리니 강석이 무언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강석은 고개를 저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강석 본인이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억지로 말을 꺼내도록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열심히들 하고 있어. 내가 없다고 농땡이 피우면 나중이 무서워진다는 원칙은 잊지 말도록.”
“어, 어딜 가?”
“우리만 공부 시키고 너는 놀려고!”
재철 일당이 억울한 듯 외쳤다. 강민은 어개를 으쓱인 다음 그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면 뭐 불만이냐?”
물론 불만이 있어도 그들은 불만을 꺼낼 수 있을 만한 입장이 아니다.
“아, 아니…….”
“불만이라기보다…….”
“단원 간의 친목을…….”
재철 일당은 쩔쩔 매며 변명했다.
강민은 코웃음을 치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노는 거 아냐. 나는 오늘부터 과외가 있어서 가야 해. 쓸모도 없는데. 쯧!”
“과외?”
과외라는 말에 그들이 또 다른 흥미를 보였다.
“선생은 남자야 여자야?”
“뭐라더라…… 여자라던대.”
강민은 부모님에게 들은 말을 기억하며 답했다.
“헉! 여대생! 미인이야?”
“어느 학교래?”
여대생이라는 말에 재철 일당은 수컷으로서의 강렬한 리비도를 드러내며 물었다.
강민은 같은 수컷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혀를 찼다.
“서울대라던 것 같던데……. 근데 무슨 쓸데없는 기댈 하는 거야. 어차피 선생인데 미인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서. 그리고 유감스럽지만 나도 생긴 건 아직 몰라.”
“에이.”
“그럼 뭐 별로 기대할 것도 없겠네.”
“갑자기 싸하게 식네?”
강민이 의아한 듯 물었다. 불과 몇 초 전과 반응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러자 재철 일당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수군거렸다.
“그야 서울대 여대생이면 대체로…….”
“예쁘긴 텄지 않겠어?”
“여자들은 좀 덜 생겨서 독한 심성을 가진 애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는 법이라고 하던걸.”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그런 개소리를…….”
강민은 한심해서 고개를 흔들며 문으로 갔다.
“하여간 농땡이 피우지 말고 공부나 해.”
“그럴게.”
신뢰가 가지 않는 대답을 들으며 강민은 밖으로 나갔다.
***
강민은 집으로 와서 과외 선생이 오기를 기다렸다. 곧 약속한 시간이 되었고 초인종이 울렸다. 강민이 문을 열었다.
“안녕.”
문 너머에서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웃고 있었다.
강민은 살짝 감탄하면서 인사했다. 그녀가 과외 선생인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정혜경이라고 해. 들었지?”
집 안으로 들어오며 혜경은 말했다.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올라서는 혜경의 미니스커트 아래로 늘씬하게 이어지는 스타킹 신은 다리가 특히 예쁘다고 생각했다.
“네, 들었죠.”
강민은 자신의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고, 혜경은 방 안의 의자에 앉았다.
강민은 밖으로 나가서 마실 것을 가져와 혜경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혜경은 웃으면서 음료수를 받아 들이켰다. 그녀는 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강민에게 말했다.
“공부 잘한다면서.”
“공부 때문에 잔소리 안 듣는 게 목표예요.”
강민이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 혜경이 놀렸다.
“호호! 고등학생에게는 불가능한 목표를 꿈꾸네?”
“그런가요?”
“그럼. 나도 대학 들어가기 전까진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다고.”
“과연.”
과거의 악몽이 생각난다는 듯이 혜경이 말하자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공부할 정도의 학생에게 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면 그건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부모님은 다 그런 거지.”
물론 부모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래도 다들 대동소이한 면이 많으니까.
강민은 침대에 앉아 혜경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굉장히 미인이시네요.”
“그래?”
혜경은 강민이 직설적으로 하는 말에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하지만 연하라곤 해도 직설적으로 칭찬해 오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실은 여대생한테 과외 받는다니까 친구들이 미인인지 아닌지 관심을 보였거든요. 그런데 서울대생이라니 텄다면서 다들 실망하더라고요.”
“어머, 걔들 실례되는 말을 하는구나. 우리 학교에도 예쁜 아이들 얼마든지 있어.”
화내는 얼굴로 혜경은 말했다.
서울대 3대 바보라는 말이 있다.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찾아오려는 놈, 서울대 축제 즐기려는 놈, 그리고 마지막이 서울대에서 전교 일등 해봤다고 자랑하는 놈을 칭한다.
서울대입구역은 서울대에서 너무 멀고, 서울대 축제는 형편없고, 서울대생 중에 전교 일등 안 해본 놈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공부만 하는 범생이들만 모이는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 대표 미녀 연예인이 바로 서울대 출신이지 않은가!
강민은 그 말이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죠. 이렇게 눈앞에 그 실례가 있는데.”
“고등학생이 너무 말주변이 좋은데. 아부도 잘하고. 물론 내가 우리 학교에서도 좀 특출 난 편이긴 하지.”
혜경은 기분이 좋은 듯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강민은 혜경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실제로 혜경은 학교에서 보기 드문 미인으로 유명할 거라 생각했다. 혜경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대생이 흔하다면 서울대는 일류대라기보다 미인대학이란 명칭을 얻어야 올바를 것이다.
“하하! 그런가요. 좋게 보였다면 기쁜 일이죠. 앞으로 누나랑은 자주 보게 될 테고.”
“그래. 나도 든든한 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좋은걸.”
자신감 넘치는 강민의 태도에 친근함을 느끼면서 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혜경은 강민에게서 어리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누나라는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가 어린 것 같았다.
그만큼 강민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녀석들한테 가서 자랑해야겠는걸요. 부러워서 팔딱 뛸걸요. 그런 의미에서 사진 한 장, 괜찮죠?”
“응- 어쩔까? 그래, 좋아.”
고민하는 척하다가 혜경은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강민은 기분 좋은 듯 웃고는 폰을 꺼내 혜경을 향해 초점을 맞추고는 찍었다. 찰칵 소리가 나고 디지털 사진이 떴다.
“좋아요. 잘 나왔어요.”
“어디, 정말이네.”
혜경은 얼른 강민 곁으로 와서 스마트폰의 화면을 들여다봤다. 기분 좋게 웃으면서 손짓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혜경은 조금 놀랐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 경계심이 없어 보였다.
‘내가 왜……?’
혜경은 그렇게 자문했다. 이렇게 편안하게 다른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니, 아무리 연하라지만 이건 특이한 일이었다.
혜경은 곁눈질로 강민을 바라봤다.
유쾌한 성격에 매너가 좋고, 말주변이 뛰어난데다 용모도 늠름하고 믿음직했다. 더구나 여기서 뭔가 더 있었다.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위험한 냄새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여기서 조금만 더 크면 정말 남자가 될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붉어진 볼을 양손으로 감싸면서 혜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기 위해 노력하며 혜경은 말했다.
“자, 그러면 잡담은 이 정도로 하고 공부 시작해야지.”
“네.”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에 가서 앉았다.
혜경은 옆자리에 의자를 하나 끌고 와 앉은 다음 가지고 온 가방에서 프린트된 종이를 여러 장 꺼내 강민에게 내밀고는 말했다.
“너희 부모님이 전체적으로 알아보고 약하다 싶은 과목을 해 달라 하셨거든. 그래서 문제지를 준비해 왔어. 우선 풀어보겠니.”
“그러죠.”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혜경이 마련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국어, 수학, 영어, 과학, 사회 등 전체적인 과목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문제였다.
20분 정도 지났을 때 강민은 문제지를 혜경에게 내밀었다.
“다 풀었어요.”
“벌써?”
“뭐 그렇게 어렵진 않던걸요.”
깜짝 놀라며 혜경이 하는 말에 강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받아넘겼다.
이 아이가 잘난 척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혜경은 결과 확인에 들어갔다.
“어디 보자.”
십 분 정도가 지났다.
“으음…….”
“문제 있나요?”
혜경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데 의아해하며 강민이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냐.”
혜경은 고개를 얼른 흔들었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린 이유는 생각보다 좋은 성적이어서다. 뛰어난 학생이란 말을 듣긴 했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에 문제 풀 때는 잘난 체를 하는 게 아니었나 싶었는데 결과를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강민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좋아. 가장 약한 부분은 수학 같은데…….”
하지만 그거라고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뛰어나지만 다른 부분이 엄청나게 뛰어난 거라고나 할까.
“그런가요. 그럼 그걸 중점적으로 공부하도록 하죠.”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학은 논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단순히 집중력과 암기력을 높이는 것만으론 극복되지 않는 부분이 많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응, 그게 좋겠어.”
“교재 같은 건 누나가 다 정해 주세요. 저는 따라갈 테니까.”
강민은 웃으면서 혜경에게 말했다. 혜경은 강민이 부드럽게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라 느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그럼 다음에 봐.”
일단은 오늘 만난 건 어디까지나 강민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한 거였다. 강민의 수준을 파악한 이상 교재 등을 정해서 시작하게 될 다음 수업부터가 진짜였다.
사실 혜경은 강민의 부모님에게서 아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라는 특명을 받았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강민이 뛰어나니 좀 걱정이 됐다.
본때를 보여주는 건 원래 학생만이 아니라 선생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실력 차를 보여줘야 선생의 지도에 학생이 잘 따라오는 법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일단은 열심히 해보는 수밖에 없다. 서울대를 연필 굴려서 들어간 것도 아니니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생에게 창피를 당할 일은 없을 테고 말이다.
“아차차! 저도 같이 가죠.”
강민이 자리에서 일어난 혜경을 보고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갈 곳이라고 있니?”
“세상이 험한데 적어도 차를 타는 걸 볼 때까지는 배웅해야죠.”
강민은 으쓱 웃으며 말했다.
“그, 그래?”
혜경은 강민의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듬직함을 느끼고 볼을 붉혔다. 바보같이 가슴이 뛰었다.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