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이야기를 끝낸 둘은 곧장 가게를 나왔다. 미성년자가 출입 금지된 공간에 오래 있어 좋을 것은 없기 때문이다.
급한 일이 아니었다면 이 일 자체를 주말로 미뤄 뒀을 것이다.
나오자마자 강민은 호성에게 말했다.
“고마워.”
“뭘요. 어차피 다 내 돈도 아니었는데.”
호성은 쑥스러워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너 아니었으면 꽤 힘들었을 거야.”
“지은 죄가 있으니 얼른 갚아야죠.”
호성은 어설프게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강민은 피식 웃었다.
“말했듯 받기만 하진 않을 거야.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도와줄게. 네가 옳은 일을 하는데 어려움에 봉착했다면 그 상대가 누구든 나는 너를 돕는다. 알아둬. 너는 강민단원이고, 나는 네게 신세를 졌으니까.”
호성이 말한 대로 부모님을 돕는 돈은 호성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강민이 지렛대파의 금고에서 뜯어온 것이다.
하지만 설령 돈이 있다 해도 호성이 아니었다면 의심을 받지 않고 부모님을 돕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강민이 호성에게 신세를 졌다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호성도 굳이 뺄 필요는 없다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든든하게 기억해 두겠습니다.”
이어 호성은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데 기부 말인데요.”
“왜?”
“장갑맨 티 내는 건 어려울 거 같습니다.”
“문제가 있어?”
“그거 장물이니 말입니다.”
“장물이긴 하지. 아…….”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하려다가 퍼뜩 깨달았다.
장갑맨 사건은 이미 너무 커졌다!
장갑맨이 보낸 돈이라고 명확히 공표하고 기부를 하게 되면 경찰이 그걸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좋은 일에 쓰려고 해 보냈다고 해서 장물이 장물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면 정작 도움을 주지는 못하고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호성은 강민이 자신의 걱정을 이해한 걸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대로 장갑맨이라고 공표하고 보내면 그거 다 경찰이 압수해 갈 겁니다.”
“흠…….”
강민은 방책을 생각하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다 곧 표정이 변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아, 그래 이렇게 하면 어때?”
“어떻게요?”
“그냥 돈하고 장갑만 넣어서 보내는 거야.”
호성은 밝은 표정이 됐다.
“그거 괜찮군요. 장갑만 가지고 장갑맨이 보낸 돈이라곤 못할 테니.”
“그렇지. 그건 그냥 익명의 기부일 뿐이지.”
아무 흔적도 없이 그냥 돈과 장갑만 넣어 보내는 것이다. 그게 장갑맨이 보낸 건지, 아니면 그냥 그 장갑도 선물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뻔한 거긴 해도.”
“그럼 그렇게 해 줘.”
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얼굴 좀 안 보이게 꾸미고 편의점 택배로 보내면 추적도 불가능할 겁니다.”
“좋은 생각이야.”
택배가 운송 과정에서 직원들에게 험하게 굴려진다는 것이 걱정이긴 하다. 만일 포장이 터져 내부의 돈이 드러나면 눈이 돌아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큰 걱정거린 아니다. 포장을 그만큼 단단하게 하면 되니까.
“곧 보내도록 하죠.”
“좋아.”
둘은 웃으며 대화를 그 정도에서 일단락했다.
한데 호성은 아직 끝내지 못한 말이 있는 듯 아쉬운 표정으로 강민을 슬쩍 바라봤다. 강민이 그러지 말고 말하라는 뜻으로 턱짓을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왕 신세를 졌다 생각하면 저를 위한 자유 시간을 좀 더 허락해 주는 건 어떠신지?”
눈 딱 감고 말했다.
자유!
호성은 자유를 원했다!
강민은 그 요청에 호탕히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
호성도 혹시 좋은 결과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에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강민은 갑자기 웃음을 딱 끊었고, 호성의 이마를 살짝 탁 치며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어오르긴. 그건 나중 일이다.”
“네에…….”
호성은 실망했다.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강민은 호성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그리고 안에서 했던 것처럼 어색한 존댓말은 관둬. 또래끼리 영 보기 좋지도 않고.”
“네, 아니…… 응.”
호성은 얼른 말을 고치며 강민에게 멋쩍게 답했다.
정말 강민과 친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
천하무적 장갑맨!
장갑맨의 충격은 계속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고, 그에 관련된 팬클럽도 여럿 만들어졌다. 회원 수가 수만 명을 넘어서는 것도 있었다.
무술하는 사람들도, 운동하는 사람들도 그의 싸우는 모습을 보고 저게 정말인지, 만든 영상이 아닌지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저 사건에 휘말려 온몸의 뼈가 부서진 채 병원에 입원한 깡패의 숫자는 오십이 넘었다.
레알,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그들이 당한 부상을 앞에 두고 촬영된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강한 걸 좋아하는데 장갑맨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했고, 사람들은 통쾌한 걸 좋아하는데 장갑맨은 깡패들을 때려잡아서 통쾌함을 느끼게 해 줬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물론 모든 사람이 장갑맨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은 주먹이나 휘두르는 깡패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돈을 훔쳐갔다고 하는 걸 보면 똑같은 깡패 놈일 거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전국의 고등학교는 방학을 맞았다.
***
별빛 보호소는 여러 가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다.
또한 강민이 재철 일당과 호성을 보내 봉사 활동을 하도록 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국가의 지원을 받긴 하지만 결코 넉넉한 것은 아니라 항상 예산에 쪼들리는 곳이었다. 마음 착한 사람들이 조금씩 기부를 해 오기도 하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도 보수도 받지 않고 일하지만 궁핍한 운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부족한 옷가지와 도구들, 그리고 난방비와 전기세는 거기서 일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하지만 책임감 없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쉽게 버렸고, 자립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 보호해줘야 할 아이들은 더 늘어나기만 하는 형편이었다.
별빛 보호소 앞에 한 대의 차량이 도착했다. 택배 차였다.
차에서 내린 배달원이 큰 목소리로 안의 사람을 불렀다.
“택배요.”
“네.”
건물 안에서 일을 보던 사람이 얼른 밖으로 나왔다. 보호소 일을 여러 해째 맡아 하고 있는 여자였다. 물론 자원봉사다.
여자가 나오자 택배원은 포장된 상자를 여자에게 넘겼다.
“여기 있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택배를 받으며 여자는 인사했고 택배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 차로 돌아갔다.
여자는 상자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큰 것은 아니었지만 안의 내용물은 묵직한 듯 보기보다 무게가 많이 나갔다.
“이건 뭘까?”
“이 선생, 그건 뭐야?”
여자가 궁금해하는데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도 이 보호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 마찬가지로 자원봉사자였다.
책상 위에 상자를 올리며 여자는 답했다.
“어디서 택배가 왔네요. 그런데 어디서 보낸 건지는 나와 있지도 않아요. 글씨도 삐뚤삐뚤하고.”
“아! 알겠다. 익명 기부구나.”
반가운 얼굴로 남자가 말했다.
“익명 기부요?”
“운영에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이름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 하지만 글씨체까지 바꾸는 건 드문데.”
그리고 보통 이런 기부는 물품으로 오는 경우가 많아 크기가 크다. 쌀이나 채소, 과일, 옷 등이니까.
한데 이런 작은 상자라니. 안에 무엇이 든 것일까.
남자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얼른 열어봐.”
“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포장을 찢었다. 안은 강철 상자 같은 것으로 한 번 더 포장되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무거웠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뚜껑을 열었다.
“어?”
“와…….”
둘 모두 크게 놀란 얼굴이 됐다.
그 안에는 오만원권 다발 여럿과 검은 가죽 장갑 하나, 그리고 서툴게 쓴 ‘좋은 곳에 사용해 주세요.’란 글이 적힌 메모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이렇게나…….”
“누군지 몰라도 정말 고마운 일이야.”
“네…….”
남자는 감격한 얼굴로 말했고 여자도 동의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
여름에 들어서서 장갑맨의 이차 충격이 한국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서울 근교의 봉사 시설에서였다.
여러 지체 장애아를 돌보는 그곳에 현금 2,000만 원 상당의 금액이 익명으로 배달되었다. 좋은 곳에 써 달라는 메모와 함께 말이다.
여기까지만이라면 단순한 미담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배달된 물품에 장갑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물론 이때는 어디까지나 가십 수준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장갑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을 비롯해서 전국 각지 5곳에 같은 택배가 배달되었다.
모두 같은 구성이었다.
현금 2,000만 원.
좋은 곳에 써 달라는 메모.
그리고 장갑 한 켤레.
사람들이 흥분하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것은 장갑맨이 보낸 게 아닐까 하고. 성급한 사람들은 벌써 영웅 장갑맨이라 하며 인터넷 각지에서 떠들썩하게 화제로 삼았다.
회의적인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고, 장갑맨이 보냈다고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결국 도둑질한 돈이 아니냐며 좋게 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경찰은 이 기부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골머리를 앓았지만 결국 손대지 않기로 결정했다.
장갑이 들어있을 뿐 그것이 장갑맨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어떤 실질적인 증거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영웅일지 그냥 치졸한 폭력배일지 갑론을박이 진행되는 가운데 장갑맨은 어쨌든 무수한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장갑맨이 아무리 많은 관심을 받더라도 그의 정체가 알려지는 일이 없었다. 그는 철저히 신비했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
철컥.
문이 열리고 강민단의 기지에 한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든 강민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고 있는 비닐봉지 안에는 다양한 간식거리가 들어있었다.
“나 왔다.”
“아, 와, 왔어?”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자 테이블을 넓게 펼쳐두고 공부하고 있던 중 재철이 고개를 들고 먼저 맞이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반말로 대하라 했는데 그게 익숙하지 않은지 어색한 태도였다. 강민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공부 잘하고 있었냐?”
“안 돼! 이놈들은 안 돼!”
울부짖으며 호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간식이 든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리며 강민이 물었다.
“중학생 레벨이야! 아니, 그 이하야!”
호성의 외침은 간절했다.
그는 강민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제발 부탁이니 나를 여기서 탈출시켜 줘! 그래! 휴일을 반납할 테니 이놈들 공부시키란 건 제발 안 하게 해 줘!”
“그렇게 심해?”
강민은 호성이 얼마나 자유를 갈구하는지 안다. 그런 그가 자유를 반납(?)할 정도라니.
호성의 태도에 당혹감을 느끼면서 강민은 강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강석의 표정도 결코 좋지 않았다.
“아…… 솔직히 나도 자신이 없어. 고등학교 공부로는 도저히 못해. 중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지…….”
강석도 자신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강민은 한심해서 재철 일당을 노려봤다. 그들은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숙인 채로 쩔쩔 매고 있었다.
“이 인간들아…….”
“하, 하지만 몇 년째 손 놓고 지냈는데 갑자기 공부해서 서울대를 목표로 한다면…….”
“그게 만화에서나 되는 거지…….”
“응. 애당초 꿈이 너무 컸던 거야.”
재철 일당은 창피한 표정으로 변명처럼 그리 말했다.
사실 그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몇 년째 공부를 안 했는데 일 년 반 바싹 공부한 걸로 서울대라니. 그게 가능하면 열심히 공부하는 다른 학생들을 농락하는 꼴이다.
강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휴! 이 방법까지 써야 하다니.”
“뭔가 비책이 있어?”
재철이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나씩 이리로 와봐.”
강민이 말했고, 재철 일당은 그 말에 따랐다.
“뒤돌아봐.”
재철부터 강민의 앞에 등을 보이고 섰다. 강민은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하나 펼치곤 쿡쿡 바늘로 연타를 하듯이 등의 곳곳을 찔렀다.
“켁!”
재철은 고통에 전신을 바들바들 떨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다음은 수구였다. 재철이 부들거리는 꼴을 보니 하고 싶지 않았지만 강민의 눈초리가 너무 무서워서 안 할 수도 없었다.
수구가 등을 보이고 서자 강민의 손이 무자비하게 움직였다.
“끄엑!”
수구 역시 마찬가지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떨었다.
남은 것은 만수.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강민에게 말했다.
“이, 이런 건 때린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고!”
“때리는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돌아.”
“으으…….”
강민은 만수를 잡아 등을 보이도록 했고, 마찬가지로 손을 움직여 쿡쿡 찔렀다.
“컥!”
만수도 쓰러져 부들부들 떨었다.
호성과 강석은 겁먹은 표정으로 셋이 부들거리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자기 몸이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강민은 태연하게 말했다.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다. 그리고 공부해봐.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그리고 호성이 너도 저러고도 안 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 그때는 내가 좀 생각을 달리하든가 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