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호성은 곧 강민이 오라 한 장소에 도착했다.
당연히 강민은 미리 도착해 있었다.
“왔습니다.”
“아, 그래.”
앉아 있던 강민이 일어나며 그를 맞았다.
“무슨 일입니까?”
“실은 네게 부탁할 게 있어서.”
“무슨 일이신데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호성은 물었다.
강민은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굉장해서 사실 돈을 제외하면 호성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가 없다.
그럼 역시 돈 문제인가, 하고 호성이 생각하는데 맞는다고 응답하는 것처럼 강민이 말했다.
“항상 너한테만 이런 걸 부탁해서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또 너밖에 이런 능력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돈 문제이신가요?”
확신을 담아 물었다.
사실 강민은 친해두면 득이 되면 득이 되지 절대 손해 볼 타입의 능력과 성격의 인간은 아니라는 게 호성의 판단이기 때문에 흔쾌히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만한 능력이야 자기에게 있다 확신하고 있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상민이 의외의 말을 했다.
“뭐, 그렇긴 한데 빌리거나 돈 달라는 얘기는 아니니까 안심해.”
“그러……면?”
돈 문제이긴 한데 돈 빌려달라는 말이 아니라니?
이상한 말이었다. 재테크 상담이라도 하려는 건가?
강민은 등 뒤에서 무언가를 들어서는 호성 앞으로 냅다 던졌다. 호성은 무의식중에 그걸 받았다가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마어마하게 무거웠다!
바닥에 가방을 털썩 내려놓으면서 호성은 강민에게 물었다.
“이건……?”
“열어봐.”
호성은 강민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의 양 눈동자가 커졌다.
“헉?!”
가방 안에는 오만원권 다발 수십 개와 번쩍번쩍 빛이 나는 금괴로 보이는 것이 아주 많이 있었다.
호성이네 집은 대단한 부자라 큰돈에 대해 무딘 감각을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이만한 돈이 갑자기 나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강민은 어디까지나 태연하게 말했다.
“너희 집 부자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서 말이야, 그걸 받고 내 대신 관리 좀 해 줘라.”
호성은 그 제안에 가만히 가방 안을 바라봤다.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다. 호성이라면 저만한 금과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성이네 집안은 가볍게 천억 대가 넘어가는 엄청난 부자다.
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자칫 범죄에 연루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민이 강압적으로 나온다면 범죄에 연루되든 아니든 아무 소용도 없지만, 강민은 호성이 파악하기에 그런 성품이 아니었다. 처음에야 지은 죄가 있어서 많이 얻어맞았지만…….
그래서 호성은 물어봤다.
“이건 어디서……?”
“뭘 숨기겠냐. 장갑맨 오늘 떴잖아.”
“아……!”
어깨를 으쓱이며 강민이 하는 말에 호성은 간단히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장갑맨!
오늘 한국의 인터넷을 휩쓸다시피 한 화젯거리!
복면을 쓰고 가죽 장갑을 낀 남자가 영화라고 해도 허황되다 할 짓을 해 성공시켰다는 걸로 크게 화제가 되었다. 1대 50의 싸움이었는데 1이 이겼다는 것이다.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깨진 50명 측은 어느 하나 몸을 제대로 보전한 자가 없어서 모조리 어딘가 골절이 되어 여러 달 병원 신세를 져야만 한다니, 경악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폭력단에게서 금품과 현금을 강탈해 갔다느니 하는 말도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가 집중하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전적과, 믿을 수 없이 화려한 싸움 장면이었다.
호성도 대단하다 생각하며 강민과 싸우면 그래도 강민에겐 안 될 거라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장갑맨이 강민이었다. 그러다 보니 동영상 속의 일도 불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강민은 이어 설명했다.
“그 새끼들이 우리 부모님 괴롭히고 가게 잡아먹으려 들어 빡쳐서 쓸어버리고 그 안에 있던 거 싹 쓸어 온 거야.”
“그렇군요.”
간단한 설명이지만 호성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이 사건은 두 가지를 증명했으니까.
강민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손을 쓰지 않는다는 것.
강민은 경호 대장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무서운 힘의 소유자라는 것.
그걸 확인한 것만 해도 호성은 이번 강민의 부탁도 기꺼이 들어주리라 마음을 굳혔다.
“내가 그런 돈 가지고 있으면 의심할 거야. 하지만 너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겠지?”
“그렇긴 하겠죠.”
“그러니 그걸로 네가 돈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우리 부모님을 도와 드리고 싶어. 네가 내 베프라서 도와주기로 한다는 형식으로. 괜찮겠지?”
“문제없습니다.”
호성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웃는 얼굴로 호성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정겹게 말했다.
“진짜 고맙다.”
“하하! 아닙니다.”
자신을 향해 신뢰하는 눈빛을 보내며 좋아하는 강민을 보자 호성도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어 강민은 한숨을 쉬며 아쉽게 말했다.
“옛날에 개아들내미 짓만 안 했으면 정말 멋진 놈이었을 텐데.”
“하……하하. 지금은 반성하고 있습니다.”
호성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정말 그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집이 잘살고 하는 일마다 다 잘 풀리다 보니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된 것 같다고나 할까?
그때는 세상이 정말 다 자기 것 같았고, 주변 또래 아이들 따위는 전부 벌레 비슷하게 보였다.
하지만 강민에 의해 그것이 박살 났다.
“그래, 믿고 있다.”
“그런데 이거 한눈에 봐도 오억은 족히 될 것 같은데요. 이렇게 큰돈은 제가 나서도 좀 이상해 보일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다음 강민은 우려 섞인 의견을 냈다.
강민 역시 그 점이 걱정이긴 했다. 하지만 그에 대비한 다른 계획도 있긴 했다.
“그렇겠지? 그래서 일단은 조금씩 드릴 거야. 일단 숨통만 트이면 다음은 가게가 원상회복될 테니 괜찮아.”
이자를 갚고 가게 운영비가 생기면 가게에서 진상 부리던 놈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조금씩 원래 수준의 북적이는 가게가 될 것이다. 그러니 큰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깡패들의 돈을 몽땅 다 들고 온 건 반은 그놈들에게 쓴맛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그러면 너무 남지 않을까요?”
“그중 일부는 우리 기지 운영비로 쓰고, 나머진 어려운 사람들 돕는 데 쓰려고.”
강민이 그렇게 말하자 호성도 그게 좋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보호소 선생님들이 운영비 문제로 많이 걱정하던데. 그런데 몇 군데 알아뒀다가 쭉 돌리면 되겠죠.”
“그거 잘됐군.”
“그러게요. 그러면 익명으로 기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니, 익명 말고.”
호성이 익명으로 기부하겠다는 말을 꺼내자 강민이 퍼뜩 말렸다.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 호성은 의외란 표정으로 강민을 바라봤다.
“네?”
강민이 웃으며 말했다.
“그 기부는 장갑맨으로 하자.”
“장갑맨요?”
호성은 당황했다.
하지만 강민은 더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어차피 정체가 드러날 것도 아니고 말이야.”
***
이야기를 나누고 호성과 강민은 다음 날 곧장 강민 부모님의 가게로 찾아갔다. 뒷문으로 들어갔기에 학생이지만 문제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민이 장갑맨으로 활동한 보람이 있어서 가게 주변은 한산하지만 적어도 깡패들이 보낸 진상으로 들끓지는 않았다. 내부 역시 이전에 비할 수는 없지만 조금씩 제대로 된 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강민이 부엌 쪽으로 들어가자 일에 열중해 있던 부모님이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무슨 일이니.”
“그냥 찾아와 봤어요.”
“안녕하세요.”
강민의 옆에 있던 호성이 얼른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 강민이 친구구나.”
강민의 부모님은 웃는 얼굴로 호성을 맞았다.
하지만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안색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돈을 내놓으라 깡패들이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 빚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 뿐이지 전화로는 연락이 이미 와 있던 상태였다.
“네. 호성이라고 합니다. 강민에게는 항상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베프죠!”
강민은 호성과 어깨동무를 하며 과장된 친분을 과시했다.
다른 학부모들과 연락망을 가지고 있어 학교 상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는 강민의 어머니는 놀랍고 반갑다는 표정을 했다. 호성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특히 유명한 학생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집이 엄청난 부자니까. 학생 본인도 뛰어나다 하고 말이다.
“호호! 앞으로도 잘 지내주렴.”
“네. 물론이죠.”
호성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의 아버지가 물었다.
“그런데 웬일로 여길 들른 거니?”
“그래. 들르기 좋은 장소는 아닐 텐데.”
강민의 어머니도 거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밤늦은 호프집은 고등학생이 올 만한 곳이 아니다. 강민은 머쓱한 표정이 됐다.
“그야 그렇지만.”
“저, 건방지다 생각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호성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진지한 태도라서 강민의 부모님은 좀 놀란 표정이 됐다.
“응?”
“저는 두 분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호성이 한 말에 두 사람은 한층 더 놀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돕다니?”
“강민에게 들었습니다. 두 분 사정이 지금 어려우시다고. 마침 제가 저금을 한 돈이 적지 않게 있어서 꼭 빌려 드리고 싶습니다.”
호성이 한 말에 놀란 표정으로 강민의 아버지는 강민을 바라봤다.
“아니…….”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연히…….”
강민은 머쓱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강민의 아버지는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죄인이구나. 공부에 집중해야 할 아들한테도 이런 걱정이나 끼치고…….”
“가족인걸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여보…….”
강민의 어머니가 옆에서 아쉬운 듯이 말했다.
부군이 안쓰럽기도 했고 이 갑작스런 제안이 무척 매력적이기도 했다. 호성이네 집이 소문의 절반 정도만 되어도 지금 가게가 겪고 있는 어려움 정도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기대에 마침표를 찍듯이 강민이 말했다.
“그리고 호성이네 집 굉장히 큰 부자예요.”
“일이억 정도라면 제 용돈으로도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족하다면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되고요. 친구를 돕는 일이라고 하면 그 정도가 아까울까요.”
호성은 늠름하게 말했다.
고등학생의 포켓 머니가 억 단위가 넘어간다는 것이 황당할 법도 했지만, 호성의 집은 그런 황당함마저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위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강민의 아버지는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망설일 만했다.
열심히 일해서 한 사람의 남자로서 가족을 이끌어 왔다. 그런데 갑자기 같은 또래도 아니고 아들의 어린 친구의 도움을 받는다니.
어엿한 가장인 그로서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쌓아올린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 같기도 해서 스스로의 한심함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호성이 얼른 말했다.
“사양하지 말아 주세요. 친구가 어려운데 아무런 도움도 못 된다면 그게 무슨 친구겠습니까. 강민 이 녀석은 크게 될 녀석이거든요. 이런 일 때문에 혹시라도 갈 길을 가지 못한다면 정말 친구로서 그런 일은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강민을 위해서라는 말이 마음을 깊게 찔렀다. 아들과 가족은 분명 자존심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 당장 조금만 도움을 얻는다면, 확실히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자신은 있었다.
“물론 아무리 베프라고 해도 저도 공짜로 빌릴 생각은 없어요. 갚아야죠.”
강민이 씩씩하게 말했다.
“여보…….”
강민의 어머니도 옆에서 보채듯 말했다.
결국 강민의 아버지는 마음을 정했다.
“그러면…… 고맙구나.”
“아니요. 저야말로 어른께 시건방진 소리를 한 게 아닌가 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이렇게 흔쾌히 받아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호성은 어디까지나 겸손하게 말했다. 강민을 돕는 일이니만큼 이왕 도울 거 철저하게 돕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자기 돈도 아니고.
강민의 아버지는 어렵게 말했다.
“그러면…… 당장 급한 돈만 얼마간 빌렸으면 하는구나. 물론 이자는 지금 빌린 것과 같이 해서 돌려주마.”
“네. 신경 안 쓰고 기다리겠습니다.”
호성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강민의 어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휴……. 강민이가 친구를 정말 잘 사귀었구나.”
“정말 그렇죠.”
강민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옆에서 호성도 웃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하하!”
그리고 모두 소리 높여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