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기말시험이 끝났다. 이제 방학식만 남았다.
학교생활은 느긋해졌고, 아이들은 모두 들뜬 기분으로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강민과 관계된 극소수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방학이 되면 저 보기 싫은 얼굴을 안 봐도 되겠지! 주말에만 봉사 활동을 나가면 다른 날은 놀 수 있겠지! 라고 들뜬 마음으로 기대했다.
그런 느긋한 흐름 가운데 있는 것은 강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간 자율 학습 시간.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방학이라…….’
방학은 특별한 시간이다. 학생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이라고나 할까.
물론 선생이나 교수라면 똑같은 것이 아니냐, 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다음 학기의 준비라든가, 세미나라든가 등등으로 방학이 되어도 여전히 바쁘다. 성인에게 방학이라는 긴 휴식 시간이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건 이계에서 한층 더했다.
사람들은 등골이 부서져라 일했다.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이루는 농민들은 일 년 내내 일해야 했고, 농사를 짓기 어려운 겨울이 되면 다양한 부업을 하거나 도시 상인들에게 이런저런 일을 받아 상품을 만들기도 하면서 푼돈을 벌었다.
그러고서도 마을의 다양한 일에도 참여해야 해서, 물레방아를 고치거나 다리를 만들고, 귀족의 장원을 돌보고, 목책을 수리하고, 심지어 몬스터의 토벌에 동원되기까지 했다.
쉬는 시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하고 일하는 세계였다.
물론 강민은 농민이 아니다. 처음부터 특별한 후원자를 만났고, 재능도 있어서 강자가 되었다.
그 이후로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발전해 더 마그누스라는 칭호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로도 무수한 적과 싸워 세계를 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강해지는 속도만큼이나 빈번하게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지만 모두 극복했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강민은 이계로 넘어간 이후로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다. 꾸준히 일만 해온 셈이다.
‘쉬러 왔는데……. 쉬는 게 어색한 거 같군.’
강민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열심히 뭔가를 하며 살아왔기 때문인지 놀러 왔다고 지구로 돌아왔음에도 별로 쉬질 않았다. 부모님을 구하고, 공부를 하고, 미운 놈들을 골려주고, 부모님 사업을 도우며 바쁘게 보냈다.
하지만 그래선 지구까지 온 보람이 뭐란 말인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잖은가!
그러면서 방학이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쉽게 할 만하다 싶은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강민이 할만하다 생각하는 일은 이런 것이다.
‘너무 눈에 띄지 않고, 진지하게 무겁지 않으면서도, 보람은 충실한 소소하고, 재밌는 일.’
강민은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이 조건에 부합되는 일은 드물 수밖에 없다.
이계의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더구나 강민은 이계에 있던 십 년간 피에 절어 지내다시피 해서 평화 시에 할 만한 일에 대해서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음-.’
샤프 끝을 이로 물고 강민은 계속 창밖을 바라봤다.
***
답은 의외의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방학식을 삼 주 앞둔 주말, 한 소년이 강민을 찾아왔다.
“네가 강민이지?”
강민은 자신을 찾아온 소년을 쳐다봤다.
소년은 키가 작은 편이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표정은 겁먹은 듯해서 또래 남학생이라기보다는 어린 동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 사실 강민의 실제 나이는 이십 대 중반을 넘었으니 다들 동생으로 보이는 면도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기, 좀 묻고 싶은 게 있어.”
긴장된 얼굴로 소년은 말했다.
“뭔데?”
“어, 어떻게 하면 왕따가 안 될 수 있어?”
“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돌아와 강민도 당황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정말 절실한 문제인 듯, 당장 눈물을 흘리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애걸하듯이 말했다.
“애들한테 들었어. 너도 왕따였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왕따라고 무시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하면 돼? 부탁해. 방법을 알려줘!”
“아…….”
강민은 어쩌면 좋을까 싶어 쉽게 무어라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아예 소년은 강민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뭐든 할게!”
“여기서 이러지 마. 애들도 보는데. 나라고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강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따라와 봐.”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면서 스쳐 지나가는 어조로 소년에게 말했다. 계속 이 자리에서 대화하다간 쓸데없이 시선을 끌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강민의 뒤를 쫓아서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강민은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문은 잠겨 있었지만, 문 앞에 공간이 있어 밀담을 나누기엔 좋았다.
강민의 뒤를 따라 소년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강민은 우선 물었다.
“이름은?”
“가, 강석.”
“강석? 외자네? 특이하게.”
“그래서 광선이라면서 애들이 놀려.”
강석은 우울하게 말했다. 강민은 본인에겐 미안하지만 ‘광석’도 괜찮은 별명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물었다.
“몇 반이야?”
“3반이야.”
“알겠어. 가봐.”
그 정도면 필요한 정보는 다 모았다고 생각해서 말했다.
하지만 강석은 너무도 짧고 무뚝뚝한 대화 내용에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다시 애걸하는 얼굴이 되어 강민에게 물었다.
“도, 도와주는 거 아냐?”
“너 나 아니?”
도와줄 생각이었지만 놀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 강민이 짓궂게 물었다.
그러자 강석은 시체처럼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강민에게 애걸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안 도와주면 나는 더 괴롭힘 당할지 몰라! 그러면 자살밖에 답이 없어져! 제발 부탁해! 뭐든지 할게!”
벌써 눈물이 뚝뚝 흘렀다.
“아, 알았어. 알았어.”
강민은 얼른 답해서 강석의 울음을 말렸다.
사실 강민 그 자신도 왕따로 처참한 꼴을 당한 적이 있는 만큼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었다.
자살밖에 답이 없다는 것도 농담이 아니다. 실제 적지 않은 아이들이 왕따 문제로 자살하고, 강민 역시 문제가 좀 복합적이긴 했으나 자살을 시도했었다.
더구나 강민의 십 년간 직업은 말하자면 정의의 용사였다. 뭐, 이득도 충분히 챙기면서 정의의 용사 노릇을 하긴 했지만.
강석은 환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그냥 가봐. 해볼 테니까. 대신에 아무한테도, 아무 소리도 하지 마라. 괜히 시끄럽게 만들면, 전보다 더한 꼴로 만드는 수가 있으니까.”
“으, 응.”
으름장을 놓으며 강민이 한 말에 강석은 주눅이 든 얼굴로 멀어져 갔다. 하지만 가면서도 때때로 강민을 돌아보곤 고맙다고 굽실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뭐, 성격은 착한 모양이군.’
강민은 강석의 예의 바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
그날 자습 쉬는 시간에 강민은 강민단원을 항상 모이는 그곳으로 소집했다.
네 사람은 오늘 또 무슨 황당한 일이 있으려나 싶은 긴장된 얼굴로 모였다. 그래도 지각생은 없었다.
지각하면 어떤 꼴을 당할 줄 알고!
“무, 무슨 일이십니까?”
“강석이란 애 아냐?”
재철이 묻는데 강민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수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석요? 강석이라면 공부 잘하는 쥐똥만 한 애 아닙니까?”
“공부 잘해?”
살짝 놀란 표정으로 강민이 물었다.
이번엔 만수가 답했다.
“전교 일등일걸요.”
“생각 외네.”
강민은 연달아 놀랐다. 강석은 애걸하면서 도움을 청하는 이미지 때문인지 그렇게 똑똑해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전교 일등이라니.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으론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수구는 자신이 아는 정보를 좀 더 풀었다.
“집은 또 찢어지게 가난하답니다. 요즘 보기 힘든 타입이죠.”
“호오. 기특하네. 니들도 좀 보고 배워라.”
강민은 돕는 보람이 있겠다고 생각하며 뒤에서 최상위권 셋을 보고 혀를 찼다.
재철 일당은 멋쩍게 웃으며 변명했다.
“억지로 배우는 것도 못해서 이런데 어떻게……. 헤헤.”
“그런데 지난 기말 때 좀 망했지요. 제가 이긴 걸로 알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호성이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뻐기듯이 말했다.
“그래?”
강민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왕따 때문이리라.
강민 본인이 과거 당해서 성적이 박살 난 적이 있었던 만큼 알고 있다. 갑자기 왕따로 전락해서 괴롭힘을 당한다면 그 스트레스는 정말 못 견딜 정도다. 공부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재철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걔가 왜?”
“왕따를 당한다고 나한테 탈출 비법을 알려달라더라.”
눈을 부라리며 강민이 말했다. 그 말은 명백히 과거 강민이 그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던 것을 질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강민단원 넷이 현재의 처지에 처한 것이기도 하다.
“헉…….”
“죄, 죄송합니다.”
넷은 쩔쩔 매며 다시 사과했다.
강민은 손은 흔들며 말했다.
“그래. 잘못인 줄은 알아야지. 평생 죄의식을 짊어지고 살아가도록 해라.”
“으음…….”
사실 강민단원들은 죄의식이 문제가 아니라, 인생 자체가 꼬였다.
강민은 자세를 바로 하며 그들에게 지시했다.
“이런 일에 내가 직접 나서기는 귀찮기도 하고, 눈에도 띌 수 있고 하니 니들이 좀 움직여라. 호성이 네가 2학년 대장이라며?”
강민이 알기엔 그랬다. 각 반마다 일진이 있다면 그 일진 가운데에서는 호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존재라고나 할까.
하지만 호성은 그렇게 지목되는 게 부담스러운 듯 몸을 굽히며 낮춰 말했다.
“대장이라기보다 발언권이 좀 있는 정도죠.”
“뭐든 간에 걔 왕따 안 당하도록 손 좀 써. 그 정도는 쉬울 거 아냐?”
“네. 그거야 가능합니다.”
호성은 재깍 답했다.
집의 경호 대장 아저씨와 이야기한 것도 있고 해서 그는 현재 강민에 대해 쓸데없는 반항심 가지기를 포기한 상태였다. 억울하고 분해도 소용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시키는 거 잘하면서 잘 보이는 게 더 낫다는 게 호성의 생각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하지 않던가.
매저키스트도 아니고 즐길 수야 없겠지만, 착실하게 시키는 대로 하면 최소한 불필요한 갈등은 줄일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오늘 부른 건 그것 때문이다. 이제 가봐.”
“네.”
지시를 끝낸 강민은 손짓했고 강민단원들은 깍듯이 목례하고는 그 장소에서 멀어졌다.
돌아가면서 그들은 수군거렸다.
“야. 우리 완전 강민이 부하 된 것 같지 않냐?”
“씨발, 이제 알았냐.”
재철이 수구에게 신경질적인 눈빛을 돌리며 말했다.
“동갑인데…….”
수구가 구시렁거리는 말에 호성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수구는 되돌릴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정말 그랬다. 동갑이고 뭐고 간에 지금 강민과 그들 사이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재 그들의 관계는 압도적인 강민의 무력에 그들이 억압당하는 입장이라서 상식 같은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 이렇게 되기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사이라면 억울할 수나 있을 텐데, 좀 심하게 괴롭혔었다.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다.
그들은 함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시킨 일이나 잘할 일이다. 그러면 혹시 또 모른다. 쥐구멍에 볕 들 날이 있을지!
……있을까?
***
강민은 침대에 누워 전화를 받고 있었다.
통화 대상은 재철. 통화 내용은 며칠 전에 시킨 강석을 왕따 처지에서 구출하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보고의 한 단락이 끝나고 무료한 얼굴로 강민은 물었다.
“그래서?”
-그냥 아이들 만나서 이야기했습니다. 전교 일등 하던 애가 갑자기 성적 떨어지고 우울해지면 여러 사람 피해 본다고, 걔는 더 건드리지 말라고.
“알아듣던?”
-띠꺼워하긴 했는데 뭐 틀린 말도 아니고, 호성도 있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잘 끝났다는 말이었다.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대로였다.
호성도 재철도 일진들 사이에선 나름 알아주는 재목이라 한다. 왕따 처지에 있는 애 하나 구하는 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강민은 이어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왕따가 됐다던?”
-그게 알아보니까 좀 이상한 이유던데요.
“뭔데?”
재철은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공부 잘하고 조용하니까 신경질 난다고 3반 일진 놈이 왕따로 지지난 달인가 결정한 모양입니다.
“어이가 없군.”
강민은 황당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재철도 같은 심경이었던지 보고할 때와 같이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네. 저도 듣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이유로…….
강민은 화내는 재철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누가 들으면 꼭 자기는 그런 일을 안 한 것 같은 태도이지 않은가. 그래서 촌철살인으로 찔렀다.
“맞아. 최소한 돈 받고 청부를 받아야지.”
-죄송합니다.
재철은 즉각 사과했다.
“됐고, 이번 일은 잘했다.”
-헤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하면 가끔 주말에 놀 수 있도록 기회를 주마.”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강민이 마지막 던진 떡밥은 그야말로 특급이었던 모양이다. 눈이 뒤집어질 듯한 기세로 재철은 충성과 성실을 맹세했다.
강민은 통화를 끊고 책상으로 갔다.
***
강석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하루 정도 뒤,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책상에 앉아 있었을 때였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네 덕분이지? 정말 고마워. 앞으로 무슨 일이든 필요하면 불러!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뭐든 할게! 진짜야!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야!
강석의 메시지에는 기쁨과 감사가 흘러넘쳤다.
강민은 그 메시지를 보고 잠시 생각했다.
강석. 전교 일등. 가난하지만 독하게 공부하는 아이.
‘흠.’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뭐든지 한다는 그 말 기억해 둬라.
강민은 그렇게 문자를 보냈다. 강석의 답장은 곧 도착했다. 성심성의가 흘러넘치는 ‘물론이야!’란 대답이었다.
그 대답을 보면서 강민은 참 조심성 없는 놈이라 생각하며 혀를 찼다. 친구가 보증 서달라면 서주고도 남을 타입이지 않은가.
하지만 동시에 뭐든지 하겠다는 말을 쉽게 하고 말 정도로 당시 상황이 괴로웠다는 뜻이리라.
그런 심정을 강민 역시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괴롭힌 놈들에게는 장난이지만 당하는 이에겐 정말 인생 전체를 일그러뜨리는 문제가 되고 만다. 그것이 바로 왕따다.
‘흠! 얘는 뭐 어떻게 구했다지만…….’
석연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의 왕따를 왕따라는 처지에서 구했다. 그 처지에서 탈출한 아이에게는 물론 기쁜 일일 것이다. 간이나 쓸개라도 빼줄 것처럼 구는 강석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날까?
아닐 것이다.
그 반의 일진이란 놈은 또 제물이 될 애를 찜해 뒀다 왕따로 만들고, 셔틀 노릇을 시킬 것이다.
다시 말해 이걸로는 한 명의 피해자를 또 다른 새로운 피해자와 교환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흠.”
강민은 생각에 잠겨 턱을 긁었다.
***
방학식을 일주일 정도 남긴 시점에서였다.
그날 점심시간, 강민단원들은 늘상 모이는 공터에 모였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강민은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강민단원들이 악몽처럼 걱정하던 걸 현실로 만들었다.
“우리가 방학 때도 친하게 지내야 하지 않겠냐?”
너무도 당연하게 강민단원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헉?!”
“아, 아니…….”
“무슨 그런…….”
“무, 무리가 아닐지?”
그들은 일제히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부정적인 의사를 표시했다.
강민이 눈을 부라렸다.
“싫으냐?”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강민단원들은 본래 그 말을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 꼴을 당하니 그 원통함은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억지로 찌그러졌던 표정을 펴고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시, 싫다기보다…… 일정이 있지 않으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강민은 피식 웃었다.
네 단원의 속내가 어떤 것인지 정도야 강민도 잘 안다.
“하기야 싫겠지. 하지만 내가 뭐라고 했지? 니들 데리고 서울대 간다 하지 않았냐? 그러니 자주자주 모여서 같이 활동을 해야지. 공부도 하고. 안 그래?”
“그, 그건…….”
강민단원 중 재철 일당의 표정이 뭉개졌다.
확실히 강민이 한 말을 지키고자 작심했다면 방학은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더라도 셋은 모두 진지하게 그걸 실천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보통은 재철 일당처럼 생각할 것이다. 자기 성적도 급한 판에 남의 성적을 챙기다니.
그러나 강민은 진심이었다.
끈질기게, 오래도록 곁에 붙여 놓고 부려먹고, 부려먹고, 부려먹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강민 자신의 복수인 동시에, 양아치질하다 짜장 셔틀로 진화하고 말 재철 일당의 구제, 마지막으로 아직 발생하지 않았으나 장래 여럿 탄생할지도 모를 일진 재철 일당에 의한 피해자 발생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었다.
그래서 강민은 협박조로 물었다.
“싫으냐?”
“아, 아닙니다!”
강민의 물음에 모두 예상했던 반응을 보였다.
“뭐, 사실 방학 동안 매일 봉사 활동 나가라고 하려 했거든. 근데 대신에 주말만 가도 좋다고 하는 거니까 감사하도록 해라.”
“으으…….”
재철 일당은 질린 얼굴을 풀리지 않았다.
평일에도 봉사 활동을 가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강민과 계속 붙어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치면 결코 봉사 활동보다 못하지 않은 일이니까.
“잡아놓고 공부만 하고 그러진 않을 거야. 내가 그런 건 싫어하니까. 재밌는 이벤트도 준비해 둔 게 있지.”
“이, 이벤트요?”
“그래. 이벤트는 좀 이따가 설명해 주마.”
재철 일당은 약간 기대하는 얼굴이 됐다. 노는 거였으면 좋겠다는 커다란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호성.”
“네. 그러면 저는 필요 없는 건가요?”
희망 어린 얼굴로 호성은 물었다.
호성은 성적이 탁월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은 그 스터디 그룹에 안 끼어도 될 것 같다는 희망을 약간 품고 있었다.
강민이 웃으며 물었다.
“아, 그래. 너는 방학 내도록 봉사 활동 나갈래, 여기 낄래?”
“으음……. 우……선은 어떤 내용인지 좀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목구멍에서는 당장 봉사 활동! 이라는 답이 튀어 올랐으나 어떤 일을 할지 모른다. 이벤트란 것을 마련해 뒀다고 하지 않은가.
우선은 조건을 확실히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호성은 질문으로 답을 돌렸다.
“뭐, 좋아. 그렇게 할까.”
강민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했다.
“그 전에 소개할 사람이 있다. 나와 봐.”
그러자 강민이 앉은 목재 더미 뒤쪽에서 불쑥 사람 머리가 솟아올랐다.
“안, 안녕.”
“보시다시피 강석이다.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강민단에 가입시켰지.”
강민이 소개했다.
그는 뭐든지 하겠다는 강석에게 그렇다면 강민단의 다섯 번째 단원으로 가입하라 했고, 강석은 기꺼이 그러겠다 하여 이렇게 와 있었다.
강석은 어색한 얼굴로 앞으로 나오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놀랍다는 표정이 됐다.
여기 모여서 강민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존댓말로 굽실거리는 네 사람이 모두 유명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동갑에게 존댓말로 굽실거리고 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그중 셋은 자기 반의 일진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의 대표적인 엄친아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구나…….’
어째서 강민이 왕따였던 자신을 그렇게 쉽게 구해줄 수 있었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강민이 이렇게 이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건진 알 수가 없었다.
강민의 집이 대단한 부자라는 말도, 싸움을 끝내주게 잘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는데.
“그, 그렇습니까.”
“강석이가 전교 일등이라고 해서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거든. 특히 너희 말이다. 나는 괜찮아. 나는 독학으로도 서울대 갈 성적 낼 수 있어. 그러나 너희는 안 되잖아?”
강민은 뻐기며 말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재철 일당이었다.
“으음.”
곤혹스런 얼굴로 재철 일당은 강석을 바라봤다. 강석은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겁을 먹은 듯 헉, 하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강석은 곧 가슴을 쓸어내리며 앞으로 나섰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강민과 재철의 관계가 이렇다면 자신에게 쉽게 해코지는 못 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건 사실이다. 재철 일당은 모두 제 코가 석 자인 입장이라 강석에 대해 크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강민이 이어 말했다.
“만에 하나 쟤들이 널 괴롭히거나 회유하면서 공부를 안 하려 한다면 나한테 말해.”
“으, 응.”
“니들도 강석의 행동이 갑자기 바뀌어서 너희 공부 봐주고 하는 거 갑자기 잘 안 하려 든다면, 그리고 그게 너희가 개입되어 있어서라면……, 알지?”
“무, 물론입니다.”
강민이 눈을 번쩍이며 하는 말에 재철 일당은 바싹 얼어붙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은 그걸 보고 이 관계가 어떻게 형성된 건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강민은 싸움을 잘하는 모양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아니라면 재철은 몰라도 호성까지 저런 순한 양 꼴로 만들진 못했을 것이다.
호성은 옆에서 그 광경을 보며 역시 공부는 잘하고 볼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안도했다. 공부를 못했다면 재철 일당 옆에 끼어서 상관이 하나 더 생겼을 것이다.
“그러면 방학 때 내가 따로 마련한 이벤트를 설명해 주마. 니들이 더럽고 치사하고 사악한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알고 있지?”
“네, 네.”
“바,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키시는 대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거지요.”
모두 순순히 인정했다. 맞는 말인데다 아니라 해봐야 얻어맞을 뿐이다.
강민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역시 부족해. 그래서 생각해 둔 게 있지. 과거의 나나 강석처럼 부당하게 당하고 있을 애들이 아직 우리 학교에 많을 게 아니냐?”
“네. 뭐 반마다 한둘 정도는 있는 법이니까…….”
무슨 소릴 하려는 건가 불안해하면서 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이어 말했다.
“그래서 우리 학교를 학교 폭력 청정 구역으로 내가 만들고 싶거든.”
“강민 님이시라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네.”
강민단원들은 모두 아부 가득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부도 아니었다. 강민에게 여러 차례 얻어맞고 협박도 당한 그들은 알고 있다. 강민의 주먹을 견딜 만한 인간은 이 세상을 통틀어도 거의 없다는 것을. 효도르도 안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일진이란 일진들을 죄다 한 군데 모아서 강민과 싸우게 해도 강민이 이길 것이다.
그러나 강민은 또 찌푸린 얼굴이 됐다.
“무슨 소리야. 나는 시끄러운 거 싫다니까. 니들이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