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신경질을 내는 손님을 향해 알바생은 다시 사과했다. 이런 일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역시 손님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었으니까.
곧 자리에 도착했다. 남자는 자리에 앉았고, 알바생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몇 분이신가요?”
“한 명.”
“혼자요?”
깜짝 놀라 알바생이 물었다.
호프집에 혼자 오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그래. 혼자 왔다.”
“아, 네…….”
당황해서 알바생은 그렇게 말했다. 이 손님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마음속에 살짝 갈등이 됐다.
아직도 밖에는 기다리는 사람도 많은데 여러 사람을 받아들여야 할 테이블에 덜렁 혼자 앉아 술을 마신다니, 이건 솔직히 민폐 아닌가.
조심스레 알바생은 말했다.
“저기 손님, 일행이 많은 분들이 있는데 그러면 합석 안 되겠습니까?”
“뭐야? 혼자선 술도 못 마셔?!”
남자는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주변에서 기분 좋게 술을 마시던 이들이 놀라 그 광경을 바라보았을 정도였다. 일이 처지면 안되겠다 생각한 알바생은 서둘러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맥주 한 잔.”
“한 잔요?”
테이블을 혼자 통째로 차지하게 했더니 주문도 어이없었다. 맥주 한 잔이라니.
“그래. 한 잔.”
하지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저…… 그건 좀.”
진상이다!
진상 경고등이 머릿속에 켜지는 것을 느끼면서 알바생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했다.
하지만 알바생이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진상은 진상답게 양 눈을 사납게 부릅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는 외쳤다.
“씨발 뭐 이딴 가게가 다 있어! 맥주 좀 맛있다 해서 찾아왔더니, 이제 아주 손님을 대상으로 명령까지 하려 하네!”
“아, 알겠습니다. 그럼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손님이 왕이라는 법칙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알바생은 화가 났지만 솔직히 어쩔 수 없이 주문을 받고 물러갔다. 얼른 술이나 마시고 사라져 줬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퉤!”
알바가 멀어지자 남자는 가래침을 바닥에 뱉었다.
“가게가 지랄이니 알바 새끼까지 지랄이군.”
자신이 뱉은 가래를 발로 길게 문지르면서 주변에 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주변 사람들은 잠시 저마다 찌푸린 얼굴을 했다가 다시 술을 마셨다.
그러는 사이에도 한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일어났다. 알바가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받았다.
“몇 분이나 같이 오셨나요?”
“혼자 왔수다.”
간교하게 웃는 남자가 번호표를 들고 말했다.
알바생의 얼굴이 또 석연치 않은 얼굴이 됐다.
“혼자요?”
“그래. 여기 맥주가 맛있다길래 찾아왔지.”
“아, 그러시군요.”
웃음을 되찾으며 알바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때론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정말로 좋은 맥주를 찾아서 혼자서도 오는 사람들. 그런 이들은 비록 혼자라 해도 좋은 손님들이다.
또 높은 확률로 블로그 같은 걸 운영하기 때문에 좋은 광고가 되기도 했다.
알바생은 친절하게 그를 빈자리에 안내했다. 넓은 자리라 아깝긴 했지만 곧 갈 사람이니 상관없겠지, 라고 생각했다.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1500 하나 주쇼.”
“네.”
알바생은 주문을 받아 갔고, 곧 1500짜리 맥주통을 들고 와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다른 주문은……?”
“필요하면 부를 테니 가요.”
“네.”
알바생은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을 떠났다. 맥주 맛을 철저히 즐기려는 손님인가 보다 하고 그는 가볍게 생각했다.
알바생들은 오늘 이상한 손님들이 좀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술장사가 다 그런 법이기 때문이다.
*
아주 거대한 공간이었다.
비교하자면 돔구장만 한 공간.
웅웅웅웅.
그 공간의 중앙에서 거대한 고리 여럿이 겹쳐진 채 회전하고 있었다. 그 중앙에는 강렬한 빛이 번쩍이며 심장처럼 박동 쳤다.
투웅!
투웅!
투웅!
투웅!
박동 칠 때마다 대기의 주변으로 동심형으로 무언가 알 수 없는 투명한 것이 퍼져 나가는 게 빛의 일그러짐으로 보였다.
그 고리의 주변에 설치된 무언가 모를 강철제의 기계들은 박동 치는 에너지 넘친 빛의 조각들을 받아 그 기둥 가운데로 흡수했다.
도무지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였다.
그리고 그 기계를 정면에 두고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여성이 하나 있었다.
로브를 입고, 후드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몸 전체를 가리고 있었지만, 로브를 통해 은근히 보이는 실루엣만으로도 그 여성의 전체적인 몸매가 비길 데 없이 빼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기묘한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문을 통해 갑자기 한 사람이 들어섰다.
뚜벅, 뚜벅.
질 좋은 군화에 몸에 잘 맞는 장갑을 차려입은 여성 기사였다.
흐르듯이 아름다운 금발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지녀 마치 강림한 여신 같은 아름다움과 위엄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허리춤에 찬 검이 너무도 잘 어울려 전사로서의 강인함 역시 뚜렷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중앙의 빛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에게 물었다.
“어떻지?”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말하면 기쁘겠지만 말이죠.”
로브를 입은 여성이 몸을 돌리며 답했다.
쓴웃음을 지은 여성의 얼굴이 드러났다.
놀라웠다. 지금 들어온 갑옷 차림의 여성도 아름다웠지만, 이 여성의 아름다움 또한 경이 그 자체였다.
백금발에 잡티 하나 없는 고운 피부, 거기에 크고 반짝이는 눈망울에 오뚝한 코, 그리고 붉은 입술.
하지만 자세히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적어도 뾰족하고 긴 귀를 지닌 인간은 없으니 말이다.
기사인 여성이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어려운가?”
“어려워요.”
로브의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인 여성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다가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미 보냈잖아?”
“그야 그는 본래 그곳의 존재니까요. 존재의 파장이 맞아요. 우리는 아니니까 쉽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지요.”
기사인 여성이 당혹스레 물었다.
지금 상대가 한 말에 따르자면 그를 먼저 보낸 것이 잘못된 것만 같았다.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파장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면 문제없이 다 같이 갈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로브를 입은 여성은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파장에 대한 자료는 가지고 있으니까. 그냥 이건 어떤 방식으로 해도 원래 어려운 문제란 것뿐이에요. 우리는 육신을 가진 존재잖아요?”
“그렇긴 하지.”
문제가 육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사인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 때문에 그 역시 모든 것을 놓아두고 갔다. 신조차 탐낼 만한 무수한 보물들이 주인을 잃은 채 쓸쓸히 처박혀 있을 뿐이다.
로브를 입은 여성이 밝게 말했다.
“뭐, 그래도 확실한 방법은 이미 알고 있으니 괜찮아요.”
“다행이군. 그 방법이란 게 뭐지?”
“에너지양을 늘리는 거죠.”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게 수반하는 문제를 기사인 여성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 그렇게 하면 계획이 틀어져요. 다 같이 가려고 했지만 아마 한 사람밖에 못 보낼 거예요. 다음에도 다른 사람이 가려면 시간이 다소…… 많이 걸리겠죠.”
“시간만 많이 걸리진 않을 텐데.”
필요한 에너지의 양만 아니라 질도 문제다.
그건 절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 사용하고,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만 해도 힘겨운 싸움을 끝내고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걸 사용하고 나면 다음은 대체 언제가 될 수 있을지.
그런 상대의 걱정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고 로브 차림의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하면 한둘 더 보내는 데서 멈출 수도 있죠.”
“그러나 지금은 그 외에 방법이 없다?”
“안타깝게도.”
둘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기사 차림의 여성이었다.
“내가 가겠어.”
“누구 마음대로요?”
아름다운 눈썹을 상큼하게 뜨고 로브의 여성이 반대했다.
그러나 기사인 여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흔들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단언했다.
“내가 지금 그에게는 가장 도움이 될 거야.”
“나는 대현자예요.”
로브의 여성은 당당하게 자기를 주장했다. 그 당당한 태도 앞에서 마법에 종사하는 이라면 모두 무릎 끓고 말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
대현자. 그것은 이세계에서 마법의 정점에 선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기사인 여성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아~ 그래서 요리랍시고 만들면 다들 식중독을 일으켰나.”
“그, 그건…….”
로브를 입은 여성의 얼굴이 붉어졌다.
기사인 여성이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 공세에 나섰다.
“요리는 못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일루전으로 요리 맛을 속이는 짓은 양심을 의심하기 충분한 게 아닐까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거 먹고 다들 다음 날 난리가 났었지? 그걸로 암살용 독이라도 만들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암상용 극독이 나오겠다 싶을 정도던데?”
“으, 으으…….”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가 거론된 데 로브의 여성은 아무말도 못했다. 종지부를 찍듯이 기사인 여성이 말했다.
“그런 이를 이쪽 문명 세계의 대표로서 보내고 싶진 않군.”
참다못한 로브의 여성이 표독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과거에 실수를 한 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상대 역시 뻔뻔스럽게 비판만 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과거를 가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익! 언제 적 얘길! 당신이야말로 요리한답시고 칼을 휘둘러 주방을 박살 냈잖아요! 나 역시 그런 야만적인 조리법이 우리 세계의 문화라고 소개되는 꼴을 참을 수 없어요!”
“큭!”
그것은 나름대로 좋은 일격이 되었던 모양이다. 무너지지 않던 기사 여성의 얼굴이 당혹감에 일그러졌다.
나름대로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싶은 로브의 여성은 신이 나서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마그누스예요! 그랜드 마스터 정도로 도움이 될 것 같나요!”
그랜드 마스터가 참으로 저렴하게 취급된다고 기사인 여성은 속으로 탄식했지만 마그누스가 상대라면 어쩔 수가 없다.
마그누스. 그 강함은 그야말로 신화의 영역이다.
“나는 단순한 마스터가 아니야. 다양한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어.”
“그래 봤자죠. 흥!”
당당하게 기사인 여성이 주장했지만 로브의 여성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로브의 여성은 대현자다. 마법의 궁극에 도달한 존재. 나름대로 뛰어난 정도의 마법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둘이 실랑이를 하고있는 사이로 피싯, 하고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는 금발의 무척이나 매력적인 남자였다.
“또 싸우고 있나?”
놀리는 것처럼 그가 말하자 서로를 노려보며 실랑이를 벌이던 두 여성은 동시에 시선을 돌려 상대를 바라보고는 열 받은 어조로 외쳤다.
“당신은 꺼져!”
“빠져주세요!”
찍소리도 못하고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으, 으음…….”
남자를 놓아두고 여자 둘은 다시 실랑이를 벌였다.
그들의 싸움을 잠시 지켜보다가 남자가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했다.
“나도 친구를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은…….”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남자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 깃든 살기의 가혹함에 남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딱 한 마디를 겨우 했을 뿐이다.
“……미안하네.”
그리고 두 여인의 싸움이 재개됐다. 치열했다.
지켜보다가 이대로 있다간 도저히 정리될 것 같지 않다 싶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들 두 여인에게 제안했다.
“그러면 공평하게 제비뽑기를 하지?”
“제비뽑기요?”
“그랜드 마스터와 대현자가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제비뽑기란 게 가능한가?”
실랑이를 벌이던 여인들이 멈추고 물었다.
대현자의 마법은 물질을 조작하고, 그랜드 마스터의 몸놀림과 감각은 페이지에 손가락만 가져다 대는 순간 거기 쓰인 글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다.
이런 이들을 상대로 평범한 제비뽑기는 의미가 없다. 정보의 비밀은 지켜질 수 없고, 지켜진 정보는 조작되고 파괴된다.
“보통은 불가능하지만, 나는 가능하지.”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주장했다.
두 여인은 잠시 생각했다.
남자의 말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다. 그는 사실 두 여인 모두 정면으로 승부하자면 그다지 높은 승산을 기대할 수 없는 강자다.
마그누스, 그만이 아마 대등하게 싸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좋아요.”
“인정하지.”
결국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싸움을 하느니 단번에 결정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좋아.”
남자는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안에 종이쪽지 두 개가 생겨났다. 남자는 그것을 두 여인 앞에 내밀면서 말했다.
“뽑아보게. 말린 끝머리를 풀면 누가 갈지 적혀 있는 거야.”
둘은 긴장에 가득 찬 눈으로 그 종이쪽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뻗으려다 서로 멈칫 멈췄다. 마법사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확실히 해 두기로 해요.”
“뭘?”
“누가 가든지 간에, 가서 해야 될 일은 확실히 해 두자는 거예요.”
“흠! 룰을 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
“사실 당신도 나도 알지만 그가 간 곳에서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은 이야기잖아요? 마왕의 파편이라도 거기 튀었으면 몰라.”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솔직히 우리는 그를 만나러 가는 거예요. 그렇죠?”
“맞아.”
“그러니 누가 가든 그 화상이 거기서 바람을 피우지 않게 감시하도록 해요! 그것이 우리 두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아닐까요?”
“음! 그 점에 대해서는 동감이야.”
치열하게 싸우던 두 여인의 의견이 거기서 철저하게 일치했다. 그들은 한동안 타오르듯 뜨거운 눈동자로 서로를 바라봤다. 거기에는 동지애가 가득했다.
둘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쪽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자는 열의에 타오르는 아름다운 두 여인을 보면서 혀를 찼다.
기껏 격무에서 해방된 마그누스가 휴가를 보낸답시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걸 또 못 기다려 쫓아가서 감시까지 하겠다니!
남자는 강민을 동정했다.
이세계 최대의 영웅 더 마그누스. 그에게 휴식다운 휴식이란 없을 듯했다.
아마 앞으로도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