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리고 지금 강민은 그런 느긋한 시간 가운데 학교의 작은 소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서랍에 메모 한 장이 있었다. 강민은 그에 따라 공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공원 파고라 곁 나무에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강민은 그녀가 누군지 금세 기억해냈다.
아마도 안정희라는 아이였을 것이다. 그다지 눈에 띄진 않지만 귀여운 용모에 성격이 좋아 친구가 많은 소녀였던 걸로 그는 기억했다.
저 소녀가 자신을 부른 게 틀림없었다. 강민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가 넣은 거지?”
“응.”
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야?”
“저, 저기…….”
“괜찮아. 말해봐.”
자상한 표정으로 강민은 말했다. 정희는 그 후로도 잠시 머뭇거리는 표정을 보였지만 곧 뜻을 정한 듯이 눈을 꾹 감고 말했다.
“나, 나랑 사귀지 않을래?”
“아…… 이것 참.”
강민은 당황한 표정이 됐다.
하지만 그는 이내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그, 그래…….”
울 것처럼 정희의 얼굴이 슬프게 변했다.
강민은 이대로 그녀를 떠내 보내는 것은 사내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고 위로하기 위해 말했다.
“하지만 네가 싫어서는 아냐. 오해하지 말고. 단지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니까 상처받지 마. 너는 매력적이야.”
“정말?”
슬펐던 정희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강민은 웃었다.
“정말이지. 숙녀에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좋은 남자의 소양 아니겠어?”
“그러면 친구로라도…….”
“그건 물론이지.”
친구로라니, 그건 강민 쪽에서 도리어 부탁해야 할 일이다. 이제까지 사실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했다.
“응, 고마워.”
“하하!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너처럼 예쁜 여성으로부터 과분한 고백을 받았으니까.”
정희는 능청맞게 말하는 강민을 보고 잠깐 웃고는 수줍은 얼굴로 목례하고 멀어져 갔다.
손을 흔들며 그녀를 떠나보낸 다음 강민은 근처 벤치에 앉아서는 여유롭게 여름의 바람을 맞았다.
“후후. 이 무서운 매력하고는.”
별로 티 내려고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오라처럼 주변으로 뻗어 나가 이성을 매혹하다니!
강민은 크게 만족했다. 역시 좋은 휴가가 될 것 같았다. 지구로 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귀찮고 무서운 혹들도 없고 말이다!
***
디스플레이 위의 키패드 위를 고운 손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때마다 글자가 만들어졌다.
손의 주인은 완성된 문장을 상대에게로 보냈다.
-학교생활은 어때?
지금 문장을 보낸 이는 수란이었다. 그녀는 지금 침대 위에 있었다.
방은 전체적으로 하얀색이었고, 다양한 장식과 인형 같은 것들이 많았다. 이곳은 뷰티걸이 함께 사용하는 건물 가운데 수란에게 배정된 방이었다.
답장이 곧장 돌아왔다.
-항상 그렇지 뭐. 너야말로 어때? 자주 tv에서 보긴 하는데 실제로 네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보는 건 아니라서 답답해.
답장을 보내는 소녀의 이름은 혜나다.
수란과는 학교 다닐 때부터 친하게 지냈고, 아이돌 일로 학교에 잘 없게 된 수란은 그녀와 문자나 통화를 하며 학교에 대한 그리움을 해결하던 차였다.
-매일 연습이고 행사고, 뭐 그렇지. 힘들어 죽겠어. 성적도 떨어졌고.
-이 사악한 기지배! 그래서 전교 34등이니!
커다란 글자로 혜나는 답장을 보내왔다.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100위권 안으로도 들어왔던 적이 없다.
하지만 수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얘는 그게 얼마나 많이 떨어진 건데.
-흥. 하기야 분하지만 너는 이전엔 전교 1등도 노렸었으니까. 뭐 용서해 줄께!
수란은 정겨운 혜나의 어조에 웃으면서 이어 물었다.
-학교에선 별일 없어?
-무슨 일이 있겠어. 항상 똑같은 거지.
-흐응. 그렇구나. 하긴 그렇지 뭐.
그 반복이 지루해서 이런 길을 선택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나름대로 성공했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회가 아주 없을 수는 없어서, 학교 이야기를 할 때면 역시 그리움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혜나의 카톡 메시지가 이어졌다.
-아 , 강민 알지?
-응, 알아. 이전에 같은 반이기도 했고.
수란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왜 혜나가 강민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한데 이어진 말은 한층 더 의외였다.
-요새 여자애들 사이에 걔가 좀 화제야.
-강민이 왜?
-요새 좀 뭐라고 할까, 멋있어졌거든.
멋있어졌다니?
수란은 지금 문자 대화라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만일 음성 통화 중이었다면 당황을 숨기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래?
-응. 이상하지? 그렇게 눈에 띄게 뭘 한 것도 아닌데 같은 반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뭔가가 있어. 카리스마라 해야 하나? 굉장히 여유 있고, 멋진 느낌 같은 거 말이야. 진짜 가만히 보고 있으면 걔는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어. 학기 초엔 왕따 당해서 침울했는데 그때와는 딴사람 같다니까. 진짜 못 믿을 거 같아. 또 성적도 이번에 굉장히 많이 올랐거든.
-그 정도야?
혜나의 문장 가득 찬사와 감탄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헤나가 말하고 있는 대상이 수란이 알고 있는 바로 그 강민이 맞는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였다.
-응. 뭐라고 할까. 진짜 굉장해. 호호, 하지만 유리 너하곤 상관없는 이야기지. 멋진 남자 연예인들 하고도 많이 알고 지낼 거 아냐.
-그래 봐야 다들 일로 만나는 건데 뭐. 그보다 너야말로 강민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설명이 너무 자세한데.
조심스레 물어봤다.
하지만 답은 생각보다 쉽게 돌아왔다.
-호호, 들켰나? 솔직히 좀 있어. 여자애들중에 고백한 아이도 나왔다고 하고.
수란은 어떤 문자를 보낼까 고민했다. 고백한 아이가 있다는 말이 마음에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혜나 쪽에서 문자를 이어 보내왔다.
-하지만 차였대. 다행이지 뭐야. 그런데 강민 걔 그런 얘기 절대로 안 한대. 멋지지 않니? 남자 새끼들 그걸로 여자 차면 고백 받았다고 자랑하는 꼴이 얼마나 재수 없었는데.
수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자를 적었다.
-강민은 착하니까.
강민은 착하다.
하지만 수란은 강민이 착하다는 것 이상의 걸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용감하다. 자신의 위험에 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움직일 줄 안다. 아직도 수란의 마음 한구석에는 당시 강민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한데 혜나가 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그래서 아직 내게도 기회는 있단 말씀. 이번 여름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멋진 몸매를 만들어서 어택해 볼까 해. 응원해 줄 거지?
-응, 어쩔까.
솔직히 응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실망한 것 같은 헤나의 문자가 불처럼 들이닥쳤다.
-얘는 친구끼리!
-그래 잘해봐.
어쩔 수 없어서 수란은 건성으로 문자를 보냈다.
-알았어. 너도 활동 잘해! 응원할게!
-응.
그리고 카톡이 끊어졌다.
수란은 가만히 스마트폰의 화면을 살폈다.
“후웅…….”
마음이 답답했다.
수란은 외롭다고 생각했고, 근처에 있던 커다란 곰돌이를 껴안았다. 그 인형의 푸근한 감촉을 느끼면서 수란은 고백하듯이 말했다.
‘나는 못된 아이인가 봐.’
이어서 마음속으로 몰래 수란은 말했다.
혜나가 차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마음속에 강민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시험 때 보고 대화를 나눈 것이 마지막이었다.
만나보고 싶었다.
‘뭐야!’
자신의 마음에 깜짝 놀라며 수란은 곰돌이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떼어냈다.
***
주말 늦은 오후.
호성은 봉사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의 집은 거대한 저택이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집이 있고, 주변은 넓은 정원이었다.
호성의 방은 2층에 있었다. 1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 있던 정장 차림의 사내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남자는 호성네 집의 경호 책임자다. 성격이 사근사근하고 실력이 좋아서 평가가 좋다.
하지만 모두 직업상의 친절함, 흔히 말하는 영업 스마일이다.
경호 일은 사람을 대하는 것인 만큼 서비스의 성격도 가지고 있어서 무술 좀 잘하는 걸로 대장직을 맡을 순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호성이 요즘 봉사 활동을 위해 주말마다 나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호성에 대한 친절은 직업적 가식이 아니라 진짜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집이 좀 잘산다고 거들먹거리는 시건방진 꼬맹이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제대로 된 인간이다 싶었던 것이다.
갑자기 너무 크게 변해서 왜 그런지 의아한 측면도 있었지만 그거야 저 나이 대에는 흔한(?) 일이지 않은가.
“아저씨.”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던 호성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도련님.”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질문이라니 전에 없던 일이었다.
“말씀해 보십시오,”
호성은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만일 손으로 돌을 바스라 트릴 수 있고, 뛰어오르면 10m씩 점프하는 사람이 있다고 쳐요.”
“하하! 재밌는 상상이시군요.”
황당한 말에 남자는 웃었다.
하지만 호성은 웃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진짜니까!
세상에는 정말 그런 놈이 있다. 그리고 그놈이 바로 요즘 호성의 인생을 꼬이고 또 꼬이도록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저를 노린다고 치면, 막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호성은 물었다.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는 것도, 또한 아직도 반항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반항을 하기에는 지난번 얻어맞은 고통은 너무도 컸다. 그의 협박 또한 너무 무서웠다.
그냥 궁금했다. 절대로 반항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줬다.
“흠…….”
남자는 진지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요즘 호성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가끔 있는 이런 대화에서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경호 일에도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
“한국입니까?”
한국인가, 미국인가, 소말리아인가에 따라서 경호 스타일과 난이도는 달라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판단을 하자면 한국은 쉽고, 미국은 좀 어렵고, 소말리아는 그냥 포기해야 하는 난이도다.
그러나 호성이 말한 조건에 맞춰 생각하면 또 결과가 달라진다.
“한국이라 치고요.”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고 잠시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부정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한국이라면…… 솔직히 방법이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없단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