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바로 어제만 해도 넷은 보육원에서 팔자에도 없던 애들 돌보기에 꽤 많은 시간을 썼다.
싫고 괴롭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상대는 자갈을 맨손으로 부순다.
그리고 그런 주먹으로 때리고 때려도 아프기만 할 뿐,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지도 않는다.
하소연하거나, 법적인 조치도 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호성은 인상을 쓰고 말했다.
“성적이라면 자신 있어. 안 좋으면 열공해서 좋은 대학 가야지. 그래야 그놈이랑 떨어질 게 아니냐. 다행히 경민 그놈 성적은 안 좋잖아?”
“헉!”
“대학까지?”
호성이 꺼낸 말에 재철 일당은 푸르죽죽하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대학까지 강민과 얽힌다는 건 상상도 안 했는데,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지옥이 펼쳐질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성은 도리어 그걸 이제까지 생각 못한 재철을 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당연히 생각해 둬야지. 너는 고딩 때 인생이 끝나냐? 대학 간다고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 놈이면 지금 당장도 마찬가지로 해결할 수 있어.”
호성이 어리석다고 질책하듯이 말했다.
재철 일당도 생각해보니 그럴 것 같았다. 대학 가면 고등학교 때처럼 왕따가 일어나지 않는 건 다들 행동의 자유가 주어져서 싫으면 떠나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민은?
찾아온다!
같은 학교라면 도망치지 못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재철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으, 으으, 나, 나는 괜찮아. 나는 대학 안 간다. 돈도 없고.”
“나는 가야 하는데……. 그래도 집에선 대학 가야 한다하고…….”
“나도.”
수구와 만수는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그들은 그래도 설마 대학까지야, 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법이다.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재철은 수구와 만수가 대학에 간다 한 것이 기분 나쁜 듯이 중얼거렸다.
“쳇. 그깟 똥통 대학 나와 봐야 뭐한다고. 똥 만드는 기계들 주제에. 뭐, 어쨌든 잘들 해 봐라.”
호성은 별 관심 없다는 얼굴로 빵을 사 와서 음료수와 함께 먹었다.
어째 일이 꼬여서 부하로나 부릴 놈들과 같이 일하는 처지가 됐지만 원래 대로라면 재철 일행 같은 사회의 쓰레기는 올려다보기조차 힘든 것이 호성의 원래 사회적 신분이다.
그들이 잠시 그렇게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매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응?”
“밖이 시끄럽네.”
재철이 수구에게 턱짓했다. 수구는 밖으로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왔다.
“유리가 왔네. 시험 치러 온 모양이군.”
“걔는 뭐하러 오는지 몰라. 덕분에 민얼굴도 보고 좋긴 하지만. 헤헤.”
재철이 의아한 듯 말했다.
“나도 좀 그래.”
“나도. 이런 짜증 나는 데 뭐하려고.”
수구와 만수가 동의했다.
호성이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수란이야 지금도 성적이 좋은데 뭐하러 학업을 그만둬. 그리고 너희도 생각을 해 봐라. 머리 좋은 연예인이란 게 얼마나 이미지 메이킹에 도움이 되는데.”
“아, 그것도 그런가.”
재철 일행은 호성의 설명을 듣고 그럴듯하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호성은 멍청한 놈들이라 속으로 욕하면서 남은 음식을 털어 먹었다. 그러면서 호성은 언젠가 지금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수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리라 결심했다.
***
유리, 즉 수란은 자신의 교실에 들어갔다. 그녀의 뒤를 졸졸 따르던 남학생들의 무리가 침을 흘리며 그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수란은 자신의 자리에 앉으려다 강민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
“응.”
강민은 어색하게 그녀를 맞았다.
여전히 수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지구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유독 더 아름다움이 두드러지는 것 같았다.
강민은 더한 미녀도 많이 알지만, 지구에 와서는 그런 여인들을 못 보게 됐으니까. 사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민이 어색해하는 것만큼 수란도 멋쩍어하는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열심히 했어?”
“그럭저럭.”
“나는 일이 많아서 충분히 못 했어. 걱정이야.”
수란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 밝은 표정을 하고 강민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괜찮아. 너라면 충분히 좋은 성적 얻을 테니까.”
“응. 너도 잘 쳐.”
“그래야지.”
강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란은 강민의 모습을 잠깐 아쉽게 바라보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반은 물론 반 밖의 창가를 둘러싸고 있는 남학생들이 분노한 시선으로 강민을 노려봤다.
저놈은 대체 뭐길래 수란과 친하단 말인가!
하지만 강민으로서도 난처한 일이다.
수란에게야 얼마 전 일이라지만, 강민의 입장에서는 십 년도 전의 일이다. 기억도 안 난다는 소리다. 그 일로 호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당황스런 일이었다.
물론 기분 나쁘진 않지만.
시간이 십수 분 정도 지났다. 인파를 헤치고 재철 일행이 으름장을 놓으며 반으로 들어왔고,
딩동댕.
종이 쳤다.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곧 선생님이 들어왔고 시험지와 답안지를 나눠줬다.
첫째 시험은 국어였다.
“하아.”
시험지를 앞에 두고 강민은 심호흡을 했다.
오늘 이 시험을 대비해 두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해 왔다. 드디어 그 성과를 맛볼 차례인 것이다.
재빨리 시험지에 나타난 문제를 훑어 살폈다.
‘오오.’
역시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지난번 시험 칠 때는 까마득해 보이기만 하던 문제들이 이제는 이해되고,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민은 필기도구를 들고 답을 하나하나 체크해 나갔다.
***
퉁퉁퉁퉁.
소란스러운 대화 사이로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다.
가게의 한 테이블에 앉아 붉어진 얼굴로 술을 마시던 한 회사원이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술맛 떨어지게.”
“이번에 이 가게에서 2층을 빌리기로 결정 했다는군. 리모델링에 한창이래.”
사정을 미리 들어 알고 있던 맞은편 좌석에 앉은 회사 동료가 설명했다.
그 말을 듣자 회사원의 얼굴이 팍, 하고 밝아졌다.
“오우, 그것 기대되는데. 만들어지면 이제 드디어 와봐야 자리가 꽉 차 술맛도 못 보고 떠나야 하는 더러운 경우는 안 겪어도 된다는 거 아냐?”
“하하! 그렇지.”
맞은편 사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친구라는 술집은 여러모로 좋았다. 그야말로 최고다. 특히 믿을 수 없이 뛰어난 맛의 맥주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다는 것이 그러했다.
보통 맥주에 비해 두 배밖에 비싸지 않다니!
열 배 값이라도 기꺼이 마실 텐데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자리 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행사가 있어 자리를 잡으려 한다면 가게가 문 열기 전에 문 앞에 텐트를 치고 밤샘을 하며 기다려야 할 지경이었다.
오늘도 정말 운이 좋아서 이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같이 여기 오기로 한 회사원 셋 중 한 명이 반일 휴가를 써서 오후부터 문 앞에 기다려 자리를 잡았고, 회사가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다른 이들이 달려와 마실 수 있었다.
가게가 확장한다면 그런 황당한 꼴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음, 그렇다면 비록 지금 당장은 좀 시끄러워도 참고 마셔야겠군.”
“그래! 한두 번 찾아올 가게도 아니고, 이 정도는 참아 줘야지!”
모두 동감했다.
이곳의 맥주 맛은 그야말로 마약이다!
그리스 신들이 마신다는 넥타르의 맛이 이러할까!
그 정도로 훌륭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많이 찾아오면 자리 좀 늘어봐야 큰 의미 없는 거 아냐?”
“아니야. 2층은 예약제로 운영할 거라던데? 시간당 자릿세를 약간 받긴 한다지만 크게 비싸진 않은 모양이고.”
“자릿세라니……. 그건 좀 별로군. 장사 잘된다고 유세 부리는 것 같고.”
설명을 들은 회사원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의 동료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뭐, 별수 있냐. 하지만 나라면 차라리 돈을 내서라도 안심하고 찾아오는 쪽을 택하겠다. 그렇다고 1층을 접는 건 아니라잖아. 돈을 좀 더 내고서라도 안심하고 찾아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거라는 모양이니까. 내 마음 같으면 차라리 좀 비싸면 좋겠다. 그래야 안전하게 자리 잡지 않겠냐? 까고 말해 룸에 가서 노는 것보다 여기가 낫잖아?”
룸은 정말 비싸다. 그러면서도 여기보다 술맛이 좋은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쁘진 않군.”
그 말에 회사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물론 룸은 술 마시러만 가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목적이 더 중요한 곳이다. 물론 그걸 고려해도 좋은 친구가 훨씬 더 좋은 곳이고, 예약제로 운영한다면 돈을 들이고서라도 오고 싶은 곳인 건 사실이다.
“그렇지. 부가적인 목적이야 2차를 여기로 오면 되는 거고.”
낄낄 웃으며 맞은편 동료가 음흉하게 말했다.
닳고 닳은 직업여성들 옆에 앉히느니 마음에 든 회사 동료나 아가씨를 가볍게 유혹해 이곳 술을 먹이는 쪽이 자빠뜨리기도 훨씬 편하리란 것도 이유이긴 했다.
아무 말도 없이 회사원 역시 킬킬 웃어 동감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맥주를 또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켜려 했다.
하지만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어? 이야기하는 사이 또 다 떨어졌네?”
“카! 뭐라 떠들어도 역시 여기 맥주는 최고라니까.”
이해한다는 뜻으로 맞은편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잔 마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사이 벌써 다 마시고 말았다.
“자자, 불러.”
“그래. 이번엔 5000이다!”
“오오! 먹고 죽자!”
그들은 의기투합해서 술을 주문했다. 물론 안주도.
곧 술이 안주와 함께 왔다. 각자의 잔에 가득 그 맥주를 채웠다.
그들은 잔에 가득 찬 맛있는 맥주를 서로 탕, 소리가 나도록 건배하며 외쳤다.
“더러운 월급쟁이 인생, 술 말고 어디서 위로를 받겠냐!”
“받겠느냐!”
“원 샷!”
좋은 친구는 오늘도 호황이었다.
가게 밖에서 우글거리며 자리가 비지 않나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가게를 아주 음흉한 눈으로 살피는 사람도 있었다.
*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도 급식을 빼먹고 매점에서 산 것으로 점심을 때우며 그나마 강민과 떨어진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던 재철과 그의 무리들에게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카톡시대에 문자라니? 스팸인가 생각하며 그들은 메시지를 받고 굳은 얼굴이 되고야 말았다. 강민에게서 온 문자였기 때문이다.
-강민단 모여라! 어딘진 알지?
재철과 그의 무리들은 우울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모이는 장소 또한 아주 나빴는데, 다름 아닌 처음 강민에게 얻어맞은, 그리고 재철 일당이 모임 장소로 사용하던 학교 뒤에 있는 공터였기 때문이다.
가보니 강민이 이미 와서 앉아 있었다.
싱글 웃는 얼굴로 그는 재철 일당을 맞았다.
“여~!”
“아, 무, 무슨 일이야?”